"이건 현실 세계가 아니에요. 우린 '거품' 속에서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죠.
(But it is not the real world. We live in a bubble)."
플로리다주에는 미국 최대의 은퇴자 마을이 있다. 'The Villages'. 1980년대 초반에 부동산 업자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이곳의 주민은 초창기 800명에서 이제는 약 18만 명으로 늘어났다. 다큐가 시작되면 관객은 카메라가 비춰주는 '빌리지'의 풍광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50개가 넘는 골프 코스로 연결된 주거지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 다양한 레크리에이션 센터를 비롯해 쇼핑몰과 병원, 커뮤니티 활동을 지원하는 수많은 클럽까지. 열정적으로 연습하는 할머니 치어리더들이며 휴양지의 옷차림으로 일광욕을 하는 노인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래서 종종 이곳은 '은퇴자들의 디즈니랜드'로 불리기도 한다.
Lance Oppenheim의 2020년작 다큐 'Some Kind of Heaven'은 관객을 'The Villages'로 안내한다. 노인들이 꿈꾸는 천국처럼 보이는 곳. 과연 빌리지의 삶은 행복할까? 물론 그곳의 주민이 되려면 안정적인 재정은 필수이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온갖 편의시설과 안락함은 '돈'에서 나온다. 빌리지 주민들은 2016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몰표를 주었다. 주로 백인, 공화당 지지자들이 거주하는 그곳은 인종적, 정치적으로 편향된 인구 구조를 갖고 있다.
랜스 오펜하임은 처음에 시네마 베리테(Cinéma vérité) 형식으로 빌리지의 삶을 담아내려 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의 존재는 흥미있는 외지인으로 늘 주목을 끌었다. 그런 이유로 자연스러운 촬영이 쉽지가 않았다. 1년의 시간을 두고 그곳을 자주 방문하면서 결국 그는 인간적인 유대를 맺은 일부 주민들의 이야기를 찍었다(harvardmagazine.com과의 인터뷰 참조). 그 인물들을 통해 다큐는 매일매일이 휴양지의 삶 같은 빌리지의 반짝거리는 바깥에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거기에도 숨겨진 이면이 있다.
결혼 47주년을 맞이하는 Anne과 Reggi 부부는 오랜 세월 소통의 단절로 서먹서먹한 상태이다. 거기에다 남편 Reggi는 약물 남용(마리화나와 마약) 혐의로 기소된 상태이다. 정서적인 문제가 있는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잘못된 방식을 택했고, 그것이 부부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 간절하게 연인을 찾는 과부 Barbara도 있다. 남편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집을 팔고 빌리지에 정착한 바바라는 남편이 세상을 뜬 후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눌러 앉았다. 원래 살았던 곳으로 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 그래서 빌리지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활비를 벌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외로움이야말로 바바라가 해결하고 싶은 중요한 문제이다.
아마도 이 다큐에서 가장 흥미있는 인물이라면 Dennis일 것이다. 낡은 승합차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빌리지에서 돈 많은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꿈이다. 지인들에게 돈 좀 꾸어달라며 호기롭게 전화를 돌려대는 데니스의 모습에서는 번지르르한 말발이 나이와는 상관없음을 알게 된다. 가진 거라곤 그저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로 들어찬 비좁은 차 한 대 뿐이지만, 데니스는 당당하다. 과연 81세의 노인은 부자 애인을 만나 늘그막의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을까?
'Some Kind of Heaven'을 보고 있노라면 에롤 모리스의 'Gates of Heaven(1978)'과 'Vernon, Florida (1981)'를 떠올리게 된다. 그 두 개의 초창기 에롤 모리스의 다큐는 장차 독창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될 그에게 흥미로운 습작이었다. 'Gates of Heaven'은 애완 동물 묘지 사업을 하는 특이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어진 'Vernon, Florida (1981)'에서는 플로리다의 버논 마을에 사는 기이하고 괴상한 주민들과의 인터뷰가 주를 이룬다. 모리스는 원래 그 마을을 횡행하는 신체 절단 보험 사기에 대해 찍으려 했으나, 촬영에 반감을 가진 주민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일을 겪은 후 포기했다(그는 정말로 기분 더러운 경험이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1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모리스는 촬영의 방향을 바꾸어서 마을의 '괴짜들' 이야기를 다큐로 찍었다. 그는 미국의 공영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찍는 다큐의 인물들을 일부러 찾거나 조사한 적은 없어요. 대개는 아주 우연한 기회로 그들이 나의 눈에 들어옵니다."
랜스 오펜하임이 포착한 다큐 속 빌리지의 주민들은 그곳을 대표하지도, 다양성을 보여주는 이들도 아니다. 인간적인 유대를 맺고 좀 더 솔직한 삶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주민들로 선정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다큐는 엄밀히 말해서 '빌리지'와 '빌리지 피플'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한 인물 다큐로 보는 편이 맞다. 다큐 속 인물들은 독특하고 흥미있는 면모를 가지고 있다. 애인을 찾길 바라는 바바라는 골프 카트 판매자 린과의 만남에서 강렬한 연애 감정을 느낀다. 린이 다른 여자와 춤추는 것을 보고 매서운 눈빛으로 변하는 장면에서는 사랑의 감정이 청춘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제비족 영감이라고 할 수 있는 데니스는 또 어떤가? 그의 속보이는 뻔뻔스러운 수작은 애잔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낸다.
다큐는 은퇴자들의 천국 '빌리지' 안에 만화경과 같은 세상이 있음을 보여준다. 정서적인 어려움을 가진 Reggie가 약물 남용 혐의로 재판을 받는 장면은 빌리지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이들의 주거지로만 적합한 곳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중간 중간 제시되는 열정적인 교회 부흥 설교자들의 강연은 역설적으로 그곳 주민들의 영적인 갈망과 내면의 빈곤을 부각시킨다. 바바라는 돈 때문에 그곳에 묶여 자신이 원하는 이전의 인간 관계망을 복원하지 못한다. 바바라에게 빌리지는 즐거운 디즈니랜드가 아니라 외로움을 강제하는 족쇄일 뿐이다.
과연 노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큐 속 인물들은 노년에도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유대에 대한 욕구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안락한 삶만이 전부는 아니다. 다양한 계층과 세대와의 만남이 단절된 채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 제공하는 휴식에 안주하는 삶은 건강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거품처럼 터져버릴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이다. 'Some Kind of Heaven'은 '타인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라는 영화의 성찰(retrospection)적 측면을 제공한다. 이 다큐를 보는 관객들은 언젠가 다가올 노년의 날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사진 출처: variety.com
부자 애인을 만나는 것이 꿈인 Dennis

노년의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Barba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