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프랑스인의 미국 만화경(萬華鏡), America As Seen by a Frenchman

  '도미(渡美)하다'라는 단어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희망과 성공을 상징하는 결말로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오래 전 드라마라 제목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시골 마을의 돈푼깨나 있는 여자는 자신의 아들 이름을 그 '도미'로 지었다. 반드시 미국에 가서 성공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주인공이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 장면은 그냥 그 자체로 장밋빛 미래를 뜻했다. 1980년대까지도 한국인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했다. 그런데 1960년, 어느 프랑스인에게도 미국은 신기하고 놀라운 나라였던 모양이다. 프랑수아 라이헨바흐(François Reichenbach) 감독이 미국을 둘러 보고 찍은 다큐멘터리 'America As Seen by a Frenchman'은 당시 미국의 다양한 사람들과 풍광을 담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프랑스인의 미국 탐방기는 미국의 엄청난 소비주의에서부터 시작한다. 상업용 광고 사진을 찍는 사진 작가와 모델들의 작업 과정을 비롯해 곳곳에 넘쳐나는 관광객들이 화면을 장식한다. 이 나라는 그 무엇이든 스케일 면에서 보통을 뛰어넘는다. 꼬마 아이가 주문한 밥솥 크기의 그릇에 담겨 나온 아이스크림(녀석은 그걸 혼자서 맛있게 다 먹는다), 수박 먹기 대회의 아이들, 엄청나게 큰 피자, 너른 마당을 채운 바비큐 화덕... 먹거리에서부터 풍요로움이 넘치는 미국을 보여준다. 먹을 거리 구경은 뭐 별 것도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볼 거리도 넘쳐난다. 항공 모함에서 이착륙하는 전투기들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의 위상을 부각시킨다. 도처에서 벌어지는 축제와 군악대 행진은 당시의 미국에 '황금기(golden age)'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여성과 남성이 번갈아 가며 들려주는 내레이션은 결코 정적이거나 무미 건조하지 않다. 그들은 놀라움과 찬탄을 담은 목소리로 미국을 이야기 한다. 그런 내레이션과 함께 쓰인 다양한 음악들은 이 다큐에 즐거운 운율을 부여한다. 얼핏 보기엔 미국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 영상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냉철한 프랑스인 관찰자는 부드러움 속에 뼈를 감추고 있다. 미국의 빛을 보여주고는, 이내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뒷골목도 살펴 본다. 교도소의 죄수들이 참가하는 로데오 경기에서 우승을 하는 이는 1년의 형기를 감면받는다. 죄수복을 입고 경기하는 그들을 보며 로데오 경기장을 찾은 많은 시민과 군인들은 열광한다. 폭주족과 스트리퍼들, 라스베가스의 도박장을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국의 또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향락이 넘쳐난다.

  다큐는 미국의 여러 다양한, 시시콜콜한 면면들까지 담아낸다. 개와 고양이들의 천국, 쌍둥이 축제, 아이들의 훌라후프 대회까지, 그걸 보고 있노라면 당시의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져만 간다. 도대체 저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끝없이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처럼 프랑스인 감독의 관찰기는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히 특권을 의미합니다."

  정말 그럴까? 자유분방하게 춤추고 노는 해변가의 젊은이들, 눈부신 캘리포니아 해변의 서퍼들, 온갖 놀이기구를 타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꿈의 나라 미국의 시민으로 사는 것은 꽤나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노는 장면이 자아내는 기묘한 파열음은 이 나라가 갖고 있는 인종 문제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백인 아이들은 잘 정돈된 공원 풀밭에서, 흑인 아이들은 구질구질한 빈민가 공터에서 지들끼리 논다. 경범죄를 저지른 젊은이들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머그샷을 찍고 있고, 정신없이 춤추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무도장처럼 보이는 곳은 교회이다.

  마침내 이 프랑스인 관찰자는 마천루의 도시 뉴욕에 다다른다. 풍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자신의 탐방기가 20년 안에 닥칠 유럽의 변화를 예견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 다큐 속에 나온 것들은 상품과 군수 물자를 비롯해 미국이 유럽과 전 세계에 다양한 방식으로 수출한 하위 문화들의 집합체였다. 과연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던 나라와 사람들이 있었나?


  그럼에도 라이헨바흐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어두운 심연을 주저없이 드러내 보인다. 어느 저수지에 줄지어 물에 잠긴 차들의 음산한 풍경은 결코 알 수 없는 미국의 숨겨진 일면을 드러낸다. 위험을 무릅쓴 자동차 묘기에서 차들은 뒤집혀지고 찌그러지기를 반복한다. 폐차장에 산처럼 쌓인 고물차들 사이로 허리가 굽은 노파는 유모차를 끌고 무언가를 찾는 것인지 헤매고 있다. 도금칠된 화려한 뉴욕의 빌딩 숲을 거니는 관광객들은 절대로 볼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그렇게,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프랑스인 감독은 관객들에게 1960년의 미국을 담아낸 만화경(萬華鏡)을 선사한다. 



*사진 출처: acedmagazine.com



*다음 글은 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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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어버린 커피와 김빠진 맥주. 흘러간 옛 영화를 보는 것이 가끔은 풍미를 잃은 커피와 맥주를 들이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카렐 라이츠(Karel Reisz) 감독의 데뷔작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1960)'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 그러했다. 이 영화에서 카렐 라이츠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영국의 새로운 영화 사조 '프리 시네마(Free Cinema)'의 주역으로서 현실에 천착하는 사실주의와 영화의 결합을 보여준다. 이른바 '싱크대 사실주의(Kitchen Sink Realism, 표현주의 화가 John Bratby가 주방 싱크대, 쓰레기통과 같은 일상적 소재로 그린 그림에서 유래)'의 영향은 당시 영국의 문화 영역 전반을 아우른다. 그것은 하층 노동자 계급의 실제적 삶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성과 낙태, 범죄에 대한 소재까지 다루었다.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은 어떤 면에서 그 사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전거 공장에서 선반공(旋盤工)으로 일하는 청년 아서는 고된 노동을 주말의 여흥과 음주로 달랜다. 그는 직장 동료의 아내 브렌다와 불장난 같은 밀회를 이어가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된 도린과 진지한 연애를 시작하지만, 아서는 결혼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다. 그 즈음, 브렌다는 임신 사실을 알리고 아서는 낙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서의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브렌다의 낙태는 여의칠 않고, 아서와의 관계를 알게 된 남편의 군인 동생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고된 육체 노동으로 부모와 자신의 생계를 겨우 해결하는 삶, 결혼은 멀고 답답하게만 느껴지고 그렇다고 별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서의 청춘에 볕들 날은 있는 걸까?

  혈기왕성한 이십대의 청년 아서에게 현실의 모든 것은 불만족스럽다. 그가 하는 공장일은 위험하고 고된 것이다. 기계에 손이 끼여서 절단되는 산재 사고는 일상적인 일로 여겨지고, 쥐꼬리만큼 받는 주급 14파운드에서 3파운드는 세금으로 뜯긴다. 부모와 함께 사는 그의 수입 대부분은 먹고 사는 데에 쓰인다. 남는 돈 몇 푼은 주말의 폭음으로 낭비된다. 한마디로 아서에게는 삶의 낙이 없다. 그런데 나이든 윗 세대들, 그 꼰대들은 '옛날이 좋았어'라든지, '인생을 즐기고, 착실하게 살라구'라는 소리를 걸핏하면 해댄다. 아서는 그런 말이 제일 듣기 싫고 역겹다. 꼰대들의 좋았던 시절이 어땠는지는 모르겠고, 지금의 현실은 수채구멍처럼 역겹고 냄새날 뿐이다. 전쟁과 혁명이 젊은 세대들에게 변화의 역동성을 가져다 주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아서는 현실에 순응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아서는 자신의 화를 폭음과 욕설, 장난으로 해소한다. 아서가 사는 하층 주거 단지는 벌집처럼 이어져 있는데, 이웃의 수다쟁이 벌 부인과 아서는 사이가 좋지 않다. 유부녀를 만나고 다닌다는 험담을 떠들고 다니는 벌 부인에게 공기총을 쏘아 골탕 먹이고 조롱한다. 공장에서는 쥐의 사체를 부품 상자에 두어 늙은 여직원을 기겁하게 만드는 장난을 친다. 몸뚱이는 어른인데, 하는 짓은 애들 같다. 아서의 이런 미성숙하고 제멋대로인 행동은 그가 자신의 진지한 인생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무지한 청춘은 낙태 문제를 상담하러 고모에게 달려간다. 그는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서는 어른이 된다는 건 기성 세대와 지배 계층이 깔아놓은 판에서 비굴하게 사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촌과의 대화에서 아서는 체제에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진 부모처럼 살기는 싫다고 말한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도린과의 결혼을 주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So what?"

  영화가 보여주는 아서의 답답함과 울분은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야?'로 끝나고 만다. 그 시절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소설, 연극, 영화, TV는 노동자 계급의 일상과 현실의 부조리를 가지고 참 많이도 울궈먹었다. 아마도 특정 '사조(思潮)'의 흥망성쇠는 그 우려내 먹는 기간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토니 리차드슨(Tony Richardson)이 그 무렵에 만든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9)', '꿀맛(1961)', 린제이 앤더슨의 'This Sporting LIfe(1963)' 같은 영화들. 결국 그런 영화들이 보여준 것은 영국이란 사회의 견고한 계급적 폐쇄성이었다. 표현과 비판으로서의 예술은 그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에 별 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하층 계급의 문화적 소비재가 되어, 불만의 적당한 분출구를 만들어 줌으로써 안정적 체제의 윤활유 같은 역할을 했을 뿐이다.

  현실의 'Angry young man'도 먹고 사는 것에 매여 살다 보면 '착실하고 온순한' 기성 세대가 되어 버린다. 아서가 짜증스럽고 역겹게 생각하는 기성 세대를 '욕받이' 꼰대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쉬운 방법이다. 불만족스럽고 힘든 현실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아서는 그런 변화를 위한 그 무엇도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아서는 도린과 함께 교외의 언덕에서 주택 단지를 바라보며 자신들이 살 집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이제 진짜 '어른'이 되려는 걸까? 영화 속에서 술 취해 거리의 가게 유리창에다 돌을 던진 늙은이처럼 아서는 멀리 있는 그 집들을 향해 심통이 나서 돌을 던진다. 잔뜩 화가 난, 답답한 청춘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다. 그의 짜증과 분노는 아무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짧게 쉬고 즐길 수 있는 주말이 지나가면 다시 일해야 하는 지겨운 월요일이 돌아온다. 영화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의 정서는 일요일 저녁에 직장인들이 느끼는 긴장과 우울감과 맞닿아 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사진 출처: eastman.org    아서 역의 배우 알버트 피니(Albert Fi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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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 '광란의 오후(One False Move)'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약간 들떠있다. 아칸소 주 스타 시티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경찰 데일 딕슨은 LA 경찰국으로부터 마약상들을 잔인하게 죽인 3인조 강도가 자신의 마을에 들를 수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매일의 일상에서 별 일이라고 해봐야 술 취한 남자가 집 문짝을 도끼로 부수는 걸 말리는 정도인 딕슨에게 그것은 진짜 경찰 업무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LA에서 파견된 경찰 콜과 맥필리와 함께 딕슨은 범죄자들을 기다린다. 이 마을 출신의 환타지아와 애인 레이, 뛰어난 지능을 가진 냉혈한 플루토는 마약상들에게서 탈취한 마약을 거래하기 위해 휴스턴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들이 기대한 거래는 결렬되고, 환타지아는 고향집에 있는 어린 아들을 보기 위해 이탈한다. 레이와 플루토는 환타지아를 찾기 위해 스타 시티로 향하고, 어리버리해 보이는 시골 경찰 딕슨에게 그렇게 위기의 시간이 다가온다.

  칼 프랭클린(Carl Franklin) 감독의 '광란의 오후(One False Move, 1992)'는 잔혹한 살인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안하고 흥분하기 쉬운 레이(빌리 밥 손튼 분)와는 달리 플루토(마이클 비치 분)는 뛰어난 두뇌와 침착성으로 서슴없이 마약상들을 죽이고 마약을 탈취한다. 이 장면을 보는 것은 꽤나 곤혹스럽다. Pluto(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의 신 Hades의 영어식 명칭)라는 이름처럼 그는 자신에게 방해되는 것은 칼을 사용해 무엇이든 저승으로 보낸다.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혹한 살인마로 실질적인 강도단의 리더인 그는 흑인이다.


  이 영화에서 '인종'이란 요소는 매우 중요하고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레이의 부주의하고 다혈질적인 성향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도 플루토이다. 마약에 절은, 팔에는 지저분한 문신으로 도배한 레이는 전형적인 백인 루저의 모습을 보여준다. 레이의 흑인 애인 환타지아는 이 강도단에서 제일 하부에 위치하고 있다. 새된 목소리로 우는 소리나 하고 약하게 보이지만,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으로 레이를 조정하며 마약 탈취극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는 대범함을 가졌다. 영화에서 이 기묘하고 불안정한 3인조 강도단의 이야기가 서사의 한 축을 이룬다.

  빌리 밥 손튼은 시나리오 작가 톰 에퍼슨과 함께 공동으로 작업에 참여했다. 남부 아칸소 출신인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남부의 정서와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광란의 오후'에 밀어 넣었다. 빌 팩스턴이 연기한 시골 경찰 딕슨은 남부인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현명하고 따뜻한 성품의 아내와 8살 난 딸이 있는 그에게는 시골 사람의 순박한 정서가 엿보인다. 딕슨은 LA에서 온 경찰 콜과 맥필리를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환대한다. 그는 콜에게 시골에서 벗어나 LA 경찰이 되고 싶다는 꿈을 털어놓지만, 그의 이런 솔직함과 순진함은 콜과 맥필리에게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된다. 딕슨이 없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진 두 경찰의 대화는 도시인이 시골 사람에게 가진 편견과 우월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도시 경찰들은 뭐 좀 대단한가? 백인인 콜은 알콜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커피를 달고 사는 것은 물론 수시로 술을 마신다(아침 해장술로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흑인 동료 맥필리는 비만으로 탐식하는 성향이 있음을 드러낸다. 이 영화가 그렇게 삽화적으로 묘사하는 경찰의 모습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그렇게 또 다른 한 축으로 진행되는 경찰들의 서사는 강도단의 도착을 기다리며 이어진다. 처음의 강렬한 도입부에 비해 이후의 이야기들은 좀 늘어진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추격전도 총격전도 없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만 나누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얼핏 보기에 싸구려 B급 영화, 마약과 범죄가 등장하는 그저 그런 exploitation 영화 같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도시와 시골의 격차, 인종 갈등 같은 다층적인 문제들이 드러난다.

  "난 감옥에 갈 만한 죄를 짓지 않았어. 경찰의 말은 거짓이야. 흑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거라고 보는 그 시각이 유죄라고."

  고향에 도착한 환타지아는 마중하러 온 동생이 경찰에게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묻자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오는 길에 이미 순찰 경찰을 쏘아 죽인 환타지아는 결코 무죄가 아님에도 뻔뻔하게 그런 말을 뱉는다. 이런 인종 문제는 환타지아의 어린 아들이 딕슨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에 이르면 기이한 울림을 준다. 환타지아의 동생은 자신의 조카를 'half-mixed'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옅은 피부색의 그 아이를 보며 딕슨은 죄책감과 고통을 느낀다. 경찰로서 환타지아를 체포해야한다는 의무감과 인간적인 감정 사이에서 딕슨은 갈등한다. 딕슨이란 캐릭터는 그렇게 미국의 역사, 노예제의 본산지였던 남부의 원죄와 부채의식을 상기시킨다.

  레이와 플루토의 도착은 결국 광란의 혈투로 이어진다. 플루토의 칼에 찔린 딕슨은 구급차를 기다리며 땅에 누워있다. 칼 프랭클린은 해가 내려쬐는 뜨거운 한낮의 참혹한 풍경 속에 미국이 가진 근원적 문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딕슨이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남부의 그 땅에는 인종 차별과 내전, 폭력의 기억이 드리워져 있다. 오래 전의 피냄새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진다. '광란의 오후'를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칼 프랭클린이 보여주는 응집된 캐릭터 묘사, 역동적이고 경제적인 화면 구성과 주제 의식은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다. 영화의 제목 'One False Move'는 백척간두의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수 있는 한 끗의 실수를 의미한다. 피와 폭력의 세계에서 one false move는 죽음과 같다. 매우 음울한 영화이지만, 살아남은 딕슨과 아이의 존재는 희망의 빛을 옅게나마 드리운다.



*사진 출처: listal.com   딕슨 역의 빌 팩스턴(Bill Paxton)은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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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상승(The Ascent, 1977)'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강행되었다. 혹한의 벨라루시 무롬(Murom)에서의 촬영 기간 동안 감독과 제작진들은 추위 때문에 동상에 시달렸다. 배우들이 촬영을 위해 입은 옷은 한겨울의 칼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감독은 배우들 보다 옷을 껴입지 않았고, 허약해진 체력을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버텼다. 그 영화는 감독에게 무척 소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는 촬영 허가가 나기까지 무려 4년에 이르는 시간이 걸렸다. 그가 이전에 찍은 영화들은 검열 당국의 전적인 비호감을 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동떨어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렵게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지만, 촬영 내내 감독은 검열을 강제하는 힘들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1977년에 소련의 여성 영화 감독 라리사 셰프티코(Larisa Shepitko)가 만든 '상승(Восхождение, The Ascent)'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상승'은 2차 대전의 동부 전선, 독소 전쟁의 격전지였던 벨라루시의 겨울을 배경으로 한다. 독일군에 밀려 퇴각하는 파르티잔들의 상태는 처참하다. 추위과 부상, 굶주림에 시달리는 부대원들과 민간인들은 절멸의 위기에 처한다. 두 명의 병사가 근처 민가에서 먹을 것을 가져올 임무를 부여받는다. 콜야와 소트니코프가 길을 나선다. 겨우 찾아낸 마을 촌장의 집에서 양 한 마리를 받아낸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독일군의 습격을 받는다. 총상을 입은 소트니코프는 포로로 끌려가는 대신 자결을 택하려 하지만, 콜야의 저지로 목숨을 건진다. 도망친 그들은 아이들만 있는 민가에 숨어든다. 남편을 독일군에 잃은 세 아이들의 엄마 돔치카는 내키지 않지만 그들을 숨겨준다. 그러나 독일군의 수색으로 두 병사는 체포되고, 돔치카도 첩자라며 체포된다. 독일군 본부로 이송된 그들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운 현실이 기다린다.

  셰프티코는 독소 전쟁의 격전지 벨라루시에서 벌어진 참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을 바탕으로 쓴 소설 '소트니코프'를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Goskino(소련 영화 촬영 국가 위원회)는 이 영화에 철저히 부정적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가 가진 종교적인 상징성 때문이었다. 셰프티코는 성서 속 예수의 마지막 수난과 순교를 주인공 소트니코프에 투영했다. 검열 당국은 위대한 애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에 종교적 신비주의가 덧입혀졌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셰프티코는 처음부터 소트니코프 역을 맡을 배우의 외모는 예수를 떠올리게 해야한다고 정했다. 당국이 추천한 배우들을 거부하고, 감독이 직접 뽑은 배우는 25살의 신인 보리스 플로트니코프였다. 순수하고 선량한 눈빛을 가진 이 배우의 얼굴에서 수난받는 십자가의 신의 아들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소트니코프는 독일군의 수사 책임자인 포트노프의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자신과 부대원들에 대한 일체의 정보를 주지 않겠다며 버티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양심'이다. 벨라루시 출신으로 합창단 지휘자이기도 했던 부역자 포트노프의 눈에 소트니코프의 그런 선택은 가소로울 뿐이다. 살고 싶지 않으냐고, 네가 지키는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고 조롱을 퍼붓는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소트니코프와는 달리 콜야는 굴복한다. 그에게는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 더 크다. 어쨌든 살아서 복수를 해야하지 않느냐고 소트니코프를 설득하지만 소용이 없다. 지하 감방에서 세 아이를 두고 온 돔치카, 촌장, 구두장이의 어린 딸, 두 병사는 죽음을 기다린다.

  셰프티코는 전쟁으로 인해 벌어지는 극한의 상황에서의 여러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양심을 지키는 소트니코프, 생존을 위해 배신을 택하는 콜야, 적극적으로 악에 동참하는 포트노프, 아무 이유없이 고통받는 민간인들, '상승'의 인물들은 거대한 수난 잔혹극을 연기한다. 소트니코프와 포트노프의 대화는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심문을 떠올리게 하고, 콜야의 배신은 유다의 행적에 비유된다. 결국 독일군의 끄나풀이 되어 목숨을 연명하는 콜야는 수치심에 자살을 기도하지만, 그는 다시 비루한 삶 속에 들어간다. 셰프티코는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죽음을 앞둔 인물들의 선택의 과정에 집중한다. 얼굴을 부각하는 여러 클로즈업 쇼트를 통해 관객들은 각각의 인물들 내면을 들여다 볼 단서를 얻는다.

  이 영화의 제목은 우리말로 '고양(高揚)'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나는 '상승'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서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비상(飛翔)'이 더 나은 대안일 수도 있다. 소트니코프는 교수형을 앞두고 두 팔을 벌려 날아갈듯한 자세를 취한다. 고결한 양심과 신념을 지닌 이들에게 죽음의 올가미는 결코 그들의 영혼을 추락시키지 못한다. 원작 소설의 제목 대신 '상승'이라는 제목을 권유한 것은 셰프티코의 남편 엘렘 클리모프였다. 그 또한 영화 감독으로 전쟁의 비극과 고통을 그린 영화 '컴 앤 씨(Иди и смотри, Come And See, 1985)'를 만들었다. 2차 대전 당시의 벨라루시에서 일어난 학살의 참상을 담았다는 점에서 부부의 영화들은 마치 연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1979년, 새 영화를 찍고 있었던 셰프티코는 촬영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트럭과의 충돌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다. 마흔 한 살의 나이였다. 그렇게 영화 '상승'은 셰프티코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흑백 영화 속에서 끝없이 펼쳐진 설원은 결코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거부할 수 없는 엄혹한 전쟁의 현실, 그 속에서 바스라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약함과 유한성이 장대한 자연 풍광에 대비된다. 러시아의 유명한 현대 음악 작곡가 알프레드 슈니트케가 맡은 음악은 영화가 주는 종교적 메시지를 매우 압축적이고 간결하게 전달한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감독 라리사 셰프티코의 자유로운 영화적 숨결이 봉인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진 출처: tcm.com   소트니코프 역의 보리스 플로트니코프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감독 라리사 셰프티코는 VGIK(러시아 국립 영화학교)에 들어가 알렉산더 도브첸코의 가르침을 받았다. 학생 시절에는 도브첸코의 영화들에서 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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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멀 그리스(thermal grease)라는 것이 있다. 컴퓨터의 CPU에서는 많은 열이 발생하는데, 그 열을 빼내는 것이 CPU팬이다. CPU의 열이 팬에 잘 전달될수 있도록 접합부에 도포하는 물질이 바로 서멀 그리스이다. 전도성 물질인 알미늄 가루가 주성분인 이것이 없다면, CPU는 넘쳐나는 열로 인해 작동할 수 없게 된다. 서멀 그리스의 가격은 몇 백 원짜리에서부터 몇 만원대까지 다양하다. 기능상에는 그렇게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저렴한 것으로 구입해서 쓴다.

  며칠 전부터 컴퓨터에서 거슬리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늘 익숙하게 듣던 소음은 아니었다. 컴퓨터 본체에 먼지라도 좀 쌓였나 싶어서 청소를 하기로 했다. 뜯어서 보니 먼지는 별로 없는데, 작은 플라스틱 조각 2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이 부품에서 떨어진 조각이라면 골치아프겠다 싶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CPU팬의 조임새 하나가 깨져 있었다. 그 부분이 들뜨면서 낯선 소음을 만들어냈던 모양이다. 다행히 예전에 사놓은 부품이 있었다. 팬을 떼어내 부품을 끼우고 다시 조립하면서 서멀 그리스도 새로 발라주었다. 나는 서멀 그리스를 쓸 때마다 배우 K가 떠오른다. 그 배우는 컴퓨터에 익숙했던 것인지, 언젠가 인터뷰에서 '서멀 그리스'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인생에서 서멀 그리스 같은 것이 있다면, 좀 더 삶을 견디기가 쉽지 않을까? 그것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좋아하는 취미나 일, 물건일 수도 있다. 오늘 문득, 내 인생의 서멀 그리스는 무엇이었나 떠올려 보게 되었다. 내게는 그것이 '영화'였다. 애정의 존재로서의 영화, 떼어내고 버리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함께 하게 되는 것. 그러나 그 '영화'는 먹고 사는 데에는 사실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얼마 전, 미술 잡지 기사를 읽다가 이런 제목의 글을 보았다. '그 많은 미대 졸업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미술 전공을 살려서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영화의 경우에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비슷한 답을 얻게 될지 모른다.

  예전에 영화 잡지에서 기획으로 낸 기사가 있었는데, 세계의 유명 영화 학교 소개에 관한 것이었다. 기사에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의 인터뷰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 기사이므로 그 인터뷰의 학생들은 이제 중년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가끔은 기사에 나온 그들의 이름을 한 번 검색해 본다. 어떤 이들은 영화계로 들어와서 일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검색 결과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땐 마음 속으로 응원하게 된다. 꼭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어떤 방식으로든 젊음의 시간을 영화에 바친 이들이 너무 힘들거나 괴롭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가끔, 인생의 가정법, 그러니까 시간을 되돌려 내가 했던 선택들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있다. 영화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던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선택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 순간을 후회했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세월이 흘러서 돌이켜 보니, 내가 그 때로 여러 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영화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물론 영화는 먹고 살 방편으로는 아무런 효용성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배우 K는 아직 서멀 그리스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TV에서 K의 얼굴을 볼 때면 K가 자신의 바램대로 그런 이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때론 스스로를 태워 삼켜버릴 수 있는 삶의 어려움 속에서 서멀 그리스 같은 무엇이 그 열기를 어디론가 빼버릴 수 있다면, 조금은 삶이 서늘해지고 가벼워질 것이다. 영화와 글쓰기, 지금의 나에겐 그 두 가지 서멀 그리스가 있다. 오늘, CPU팬에 서멀 그리스를 펴바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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