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다큐 찍는 사람들마다 만나면 그 소리야. 찍을 게 없대. 하긴 이 좁은 나라에서 뭐 얼마나 찍을 게 있겠어. 그러니까 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싶은 사건 현장에 가보면 다큐 찍는 팀들이 여럿 모여있는 거야. 일본만 해도 찍을 사람이나 이야기가 많다던데. 내가 장담하건대, 다큐의 새로운 개척지는 중국이 될 거야. 두고 봐봐. 한 10년만 지나도 다큐들이 쏟아져 나올 걸. 큰 땅덩어리에,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냐구..."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다큐 수업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이다. 중국의 다큐 감독 왕빙의 작품을 보면서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왕빙의 2013년작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Til Madness Do Us Part)'를 보았다. '미세스 팡(2017)'에 이어 두 번째로 보는 그의 작품이다. 이 다큐는 윈난 지역의 어느 정신 병동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말 그대로 3시간 50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미친 사람들만 나온다. 광인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그들의 하루 일상은 어떻게 채워지는지, 가족들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 그런 모든 것들을 가감없이 다 보여준다. 꽤나 긴 러닝타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큐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에게는 각각이 가진 사연과 특색이 있으므로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물론 광인과 직접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자체가 버거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다큐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해 보인다. '정신 병동에 갇힌 미친 사람들은 저렇게 지내는구나', 하는 것과 '근데 저거 어떻게 찍었지?' 하는 의문이다. 나도 그랬다. 무엇보다 어떻게 촬영 허가를 받고 찍을 수 있었나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답을 2014년 Jihlava IDFF(체코 이흘라바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있었던 왕빙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왕빙은 윈난 지역에서 작업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지역 정신 병원 의사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자신이 가진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촬영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정신 병동에 대한 촬영 허가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다큐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에게는 어떻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을까? 엔딩 크레딧에는 촬영에 동의해준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글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 부분이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환자의 가족들에게 동의를 얻은 것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그곳 환자들의 동의는 과연 촬영 전반에 걸친 그 모든 것에 대한 진정한 동의라고 볼 수 있는가? 병동의 환자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이성적인 사고나 판단이 가능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카메라를 들이대었을 때 별다른 거부 의사가 없으면 동의한 것인가? 아무리 미친 사람들이라고 해도 인권이란 게 있다. 대부분은 그곳에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더러는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이들이라고 해도 저렇게 찍어도 되는 건가? 도대체 나는 왕빙이 엔딩 크레딧에서 언급한 환자들의 '동의'가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이 이루어진 모든 과정에서 과연 그가 다큐 제작자로의 윤리를 얼마나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왕빙의 2017년작 '미세스 팡'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 의식을 느꼈다. 임종 직전의 치매 노인을 찍으면서 가족들의 촬영 동의는 구했지만, 정작 치매 노인 당사자에게서 동의를 구했다는 증거는 다큐 전체를 통털어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왕빙이 자신이 찍고 싶은 이야기와 사람에 대해 아주 집요한 의지와 끈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열정과는 별개로 왕빙은 자신의 촬영 대상이 되는 이들에 대한 윤리적 관점과 지침이 매우 흐릿하다.


  과연 'Til Madness Do Us Part' 같은 다큐를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찍는 것이 가능한가? 아마도 촬영 허가부터도 쉽지 않을 것이며, 환자들은 물론 그 가족과 관련해서 동의를 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왕빙에게는 그 모든 것이 가능했고, 그 결과로 관객들은 광인들이 사는 세상을 '관람'할 수 있는 초대권을 받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이것을 끝까지 보았던 것은 왕빙의 다큐 제작자로서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가 엔딩 크레딧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왕빙의 카메라 앞에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거나, 때론 흥미롭게 바라보고, 어떤 환자들은 아주 친근감있게 다가선다. 그러나 어떤 환자는 취침 시간인데도 불 켜진 방에서 촬영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불 좀 꺼. 그러면 그가 못볼 거 아냐'라고 말하기도 한다. 때로는 환자들이 문을 닫고 들어가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찍는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은 핸드 헬드로 찍어서 흔들리며, 그렇게 매우 정신사나운 쇼트들은 어쩌면 미친 이들을 담아내는 방법이 그것 뿐이라고 강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왕빙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피사체를 도구적으로 담는 것이며, 거기에 그 어떤 조화나 균형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 거칠고 조악한 화면들이 왕빙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거기에 미학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을까?


  왕빙은 2014년 Jihlava IDFF 마스터 클래스에서 이 다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 병동의 환자들이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자신은 그들이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자유, 그러니까 병동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다 할 수 있는 자유, 예를 들어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법은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이 다큐에서 관객이 느끼기를 바라는 지점은 정신 병동의 환자들이 누리는 한계를 넘어선 어떤 자유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다큐에서 온갖 종류의 광기의 나열과 아무 희망도 없는 무기력의 극치를 보았다.


  병동의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창살 밖을 바라보거나 복도를 배회한다. 왕빙이 말한 어떤 '자유'의 형태가 있다면 유령처럼 끊임없이 배회하고 출몰할 자유일 것이다. 단, 창살로 폐쇄된 방안과 복도에 한해서. 이 다큐를 본 관객들은 자신이 목격한 그 다양한 광기와 그 비인간적인 공간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하게될 뿐이다. 왕빙이 보았던 미친 자들의 특별한 자유에 대한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대다수의 관객들은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할 것이다. 더 나아가 광인들을 가두고 격리하는 그 어떤 방식이라도 찬성하는 편에 서 있게 될지도 모른다.


  왕빙의 카메라는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지만, 거기에는 피사체에 대한 그 어떤 인간적 배려나 윤리적인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다큐를 제작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촬영 대상자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의무와 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찍고 싶은 것을 찍을 자유가 그 윤리적 의무 보다 앞선다면, 그리고 그렇게 찍은 다큐가 아무리 좋은 결과물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 다큐는 본질적으로 심하게 어그러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 다큐의 중국어 제목은 '瘋愛', 그 뜻은 '미친 사랑'이다. 카메라에 대한 미쳐버린 사랑으로 정말로 지켜야할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의 중요한 윤리적 자세와 관점은 놓쳐버린 것이 아닌지, 왕빙의 이 다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list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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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의 다큐멘터리 제작의 세계적 경향을 다룬 뉴스를 읽었다. 예전에 제작되는 다큐들이 대부분 독립 제작사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면 요새는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큐 제작자들과 감독들도 적극적으로 흥행 수익을 생각하면서 아주 감각적이고 흥미있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 거기에는 N사로 대표되는 스트리밍 서비스 회사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었다. 아예 N사가 제작비를 대고 자체 제작하는 다큐들도 많다. 독립 다큐 제작사들도 그 회사와의 계약을 염두에 두고 주제 선정과 관객들의 취향에 맞춘 다큐를 제작하는 것이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잡았다고도 했다. 


  2014년에 나다브 쉬르만이 만든 다큐 'The Green Prince'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다큐를 극장에서 상영한다면 과연 관객은 얼마만큼 들 것이며, 흥행 수익은 얼마나 낼 수 있을까? 또는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와 배급 계약을 맺는다면, 시청자 수는 얼마나 될까?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 다큐에 나오는 주요 인물은 두 사람이며, 재연 화면은 대개가 흐리고 뿌연 감시 카메라 화면과 별다른 색감도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에서 매력적인 요소는 바로 '이야기'에 있다. 정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할만큼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두 사람의 인터뷰 화면으로만 엮어 나간다. 이런 다큐를 요새처럼 빠르고 감각적인 영상과 이야기 전개에 익숙한 시청자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 나다브 쉬르만이 이 다큐를 지금 다시 만든다고 한다면 이전의 방식으로는 제작비를 건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다큐 제작에 있어서도 이제 '수익'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2, 3년간 제작된 해외 다큐들을 보면 확실히 관객의 눈길을 끌만한 소재(때론 커다란 논란까지 불러일으키는)와 직관적인 촬영으로 승부를 본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제는 다큐도 잘 만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다큐 제작자와 감독이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이 시대의 다큐가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 약간은 회의적이 되기도 한다.


  서론이 길었다. 'The Green Prince'는 관객을 극심한 분쟁 지역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팔레스타인의 무장 정치 단체 '하마스(Hamas)', 그 조직의 창립 멤버 셰이크 하산 유세프의 아들 모사브가 주인공이다. 모사브는 17살 때 총기 소지 혐의로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공포스러웠던 수감 기간 동안 첩보 책임자 고넨은 그를 이스라엘 편에 서서 일하는 스파이가 되도록 회유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모사브는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해 하마스 내부의 기밀을 이스라엘 측에 넘긴다. 그런 모사브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하마스가 저지르는 자살 폭탄 테러를 비롯해 여러 무장 투쟁에 심한 반감을 가졌다. 자신의 행동이 더 큰 인명피해를 막고, 더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의 목숨을 위협받지 않게 하는 안전핀으로 작동할 거라 믿기도 했다.


  모사브가 건넨 첩보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내부 동향을 훤히 꿰뚫게 된다. 그러는 동안 모사브에게 여러 번의 위기가 닥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책임자 고넨은 모사브와의 인간적 유대를 쌓아가며 그를 다독인다. 그러나 그런 고넨이 그때문에 상부의 문책을 받게 되고, 책임자가 바뀌면서 모사브의 위치는 흔들린다. 결국 가족들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서 망명신청을 하게 된 모사브. 과연 미국에서 그는 정착할 수 있을까...


  'The Green Prince'는 매우 흥미있는 첩보 스릴러물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모사브와 고넨의 인터뷰, 별로 성의있게 만든 것 같지도 않는 재연 화면이 전부인 이 다큐를 지탱하는 것은 온전히 '이야기'다. 무장 정치 투쟁 세력을 이끄는 핵심 인물의 아들이 적국의 스파이 노릇을 10년 동안 하다니... 생각만으로도 손에 땀이 나지 않은가? 아주 단촐한 영화적 구성도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는다. 관객들은 저 이야기 다음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보다 보면 그렇다. 이렇게 얼굴 내놓고 다큐까지 만들어도 주인공 모사브의 신상은 괜찮을 걸까? 모사브는 미국이 그의 망명 신청을 거부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송환하려고 하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다. 가족으로부터는 절연당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배신자로 찍혔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입장은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고넨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Green Prince' 모사브를 위해 미국 당국에 호소한다. 바로 이 다큐의 제목은 이스라엘 첩보기관에서 모사브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이 다큐는 모사브가 쓴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무척 흥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감독 나다브 쉬르만이 다큐 제작자로서 윤리적인 책임감을 더 무겁게 느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이 다큐로 인해 모사브의 목숨이 더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 모사브 본인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촬영에 협조한 것이라도 해도 그렇다. 그는 아직도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닌다는 뉴스를 읽었다.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현실로 이어지지는 못한 모양이다. 저런 극적인 삶을 사는 인물의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다큐는 뭔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첨예한 정치적 문제와 함께 인물의 신상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단지 책의 내용을 다큐로 만들었을 뿐, 무언가 새로운 다큐적 성취라던가 대단한 성찰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내가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한 것은 '이야기'가 가진 매혹적인 힘이었다. 정말로 괜찮은 이야기는 포장이 허술하기 짝이 없어도 관객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뿐이다. 다큐 그 자체로는 실망스럽고, 그다지 주목할만한 무언가가 없다. 하나 꼽으라면, 현대 음악 작곡가 막스 리히터가 담당한 음악이다. 관객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시종일관 낮게 깔리면서 불안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놀랍다.    



*사진 출처: hollywoodrepor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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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케이블에서는 NHK 위성방송이 나왔었는데, 거기서는 매일 저녁 8시인가 9시쯤에 영화를 틀어주었다. 세계 유명 영화들, 때로는 일본 영화들이 나왔다. 쉽게 접하기 힘든 영화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오직 일본어 자막만 나온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은 린제이 앤더슨의 'If....(1968)'를 보았다. 영어라고 해도 영국식 억양의 영어는 내게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처럼 들렸다. 아무튼 대충 일본어 자막으로 꿰맞추어 가며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 엄청난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다. 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나는 영화의 모든 것이 마치 벼락치듯 다가오는 느낌과 마주했다. 영화에서 언어란 그렇게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티베트어 이름으로는 페마 체덴(Pema Tseden), 중국어 이름으로는 완마 차이단(Wanma Tsaidan)이라는 두 가지 이름을 가진 감독이 있다. 1969년생인 이 티베트 출신의 감독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것이 여러가지다. 티베트어로 된 영화를 최초로 촬영한 감독, 티베트인으로는 최초로 북경 전영학원을 졸업한 사람. 그 페마 체덴 감독의 2011년작 '老狗(Old Dog)'을 보았다. 이 영화는 유일한 자막이 있기는 한데, 중국어 자막이다. 어쩔 수 없다. 그냥 본다. 그나마 대사가 별로 없어서 다행이다. 아는 한자(字)들이 나오면 대충 헤아려서 본 다음에, 줄거리도 검색해 본다.


  티베트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양을 치는 늙은이가 아들 내외와 살고 있다. '곤포'라는 이름의 아들은 별 다른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며 지낸다. 어느날 그는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집에서 기르는 양몰이 개를 중국인 개장수에게 팔아 넘긴다. 노인은 13년 동안 가족같이 지내온 개를 팔아넘긴 아들 녀석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 돈을 주고 개를 다시 찾아오려 하지만, 개장수는 돌려주지 못하겠다며 완강히 버틴다. 하는 수 없이 공안(우리나라의 경찰에 해당)인 사위를 앞세워 겨우 돌려 받는다. 다른 개장수가 노인에게 개를 팔아 넘길 것을 권유하지만 노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던 와중에 개를 훔치려는 도둑이 들기도 한다. 노인은 개를 산에다 풀어주지만, 개는 그 중국인 개장수에게 다시 붙잡힌 신세가 된다. 그걸 알게된 아들은 개장수와 시비가 붙어 유치장에 갇힌다. 노인은 다시 찾은 개를 평온히 키울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아주 단순한 서사와 롱테이크를 주로 하는 간명한 촬영 방식을 취하고 있다. 내가 느낀 것은 그렇다. 롱테이크는 이제 정말 한물 갔다는 것. 진짜 촌스럽다. 그렇다고 감독 페마 체덴이 영화를 어설프게 배워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그는 당시 티베트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 그런 영화적 방식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영상 언어는 낡은 것이며, 그야말로 후졌다. 아마도 서구의 비평가들에게는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는 그런 모습들이 자신들의 과거 영화를 연상케하는 향수를 가져다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느리게 흘러가는 인물들의 시간, 고요한 평원의 풍경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 문명과 대비되는 지점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 형식적인 측면에서 'Old Dog'은 별로 참신하다거나 칭찬받을만한 요소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끝내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페마 체덴이 엮어나가는 서사에는 티베트의 현실에 대한 여러 은유들이 다양하게 내포되어 있다. 영화에서 노인은 개장수들로부터 늙은 개를 팔아넘기라는 요구를 끈질기게 받는다. 티베트 양몰이 개는 중국인들에게 인기있는 애완견이 되어서 꽤나 큰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노인의 아들 곤포는 덜덜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를 누비는데, 비포장 흙길은 양과 염소, 트럭과 자동차, 오토바이가 서로 엉켜서 다닌다. 곳곳에는 신축 중인 건물들이 보인다. 건축 자재를 싣고 달리는 덤프트럭은 티벳에 불고 있는 개발의 바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흙바람 부는 공간을 채우는 것은 어디선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불경 소리다. 가난하지만 영적이고 소박한 삶을 살았던 티베트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다.


  페마 체덴은 자신의 고향에 닥친 거대한 흐름을 비관적으로 응시한다. 노인은 아들 내외가 결혼한지 3년이 되었는데도 아이가 없자 걱정을 한다. 그래서 아들에게 며느리와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게 한다.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사는 아들, 그 아들이 하루종일 보는 TV에서는 중국 방송이 나온다. 술만 마시면 주정도 심하게 한다. 꿈도 희망도 없는 삶. 노인은 아들로부터 며느리가 불임이 아니라는 희소식을 듣지만, 이 가족이 이어갈 세대의 모습은 불투명하게 보인다. 'Old Dog'이 조심스럽게 펼쳐서 보여주는 티베트의 미래는 그런 것이다.


  티베트에서 급속도로 진행된 개발과 중국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내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EBS의 '세계 테마 기행'과 같은 프로와 여러 여행 다큐들에서였다. 티베트인들의 삶의 방식은 이전에 비해 많이 현대화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집과 옷차림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그들은 일상에서 티베트어가 아닌 중국어를 쓰고 있었다. 언젠가 티베트에서 탱화를 제작하는 장인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탱화를 중국인들이 얼마나 비싼 가격에 사가는가를 설명하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보였다. 어쩌면 티베트인들은 과거에 그들이 제일로 추구했던 영적 가치를 물질과 맞바꾸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불모(不毛)의 미래. 노인은 집요하고 끈질긴 개장수와 개도둑이 앞으로도 자신의 근심거리로 남아있을 것임을 잘 안다. 그에게 삶 그 자체나 다름없는 양떼와 그것을 지키는 소중한 늙은 개는 더이상 평화롭게 살 수 없다. 마침내 그는 개의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다. 이 영화의 보잘 것 없는 서사, 진부하기 짝이 없는 롱테이크,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페마 체덴은 자신이 태어난 곳과 그곳 사람들이 처한 순탄치 않은 미래를 그렇게 짧지만, 통렬한 영화적 수사로 보여준다.



*사진 출처: filmex.jp


 

*내일은 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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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사고였어. 내가 무서워서 실수로 널 때렸단다."


  늙은 남자는 실수로 오리를 다치게 만든 손주에게 오리에게 할 말을 일러준다. 어린 오리 새끼는 다리를 절며 돌아다닌다. 만약 그 대상이 오리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남자는 젊은 시절 준군사 조직의 행동 대장으로 자신의 기억으로는 10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사람이다. 그야말로 '학살자'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밖에 없는 인간이다. 안와르 콩고(Anwar Congo), 이것이 그의 이름이다.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2012년 다큐 'The Act of Killing'은 금세기에 가장 덜 알려진 어떤 학살의 기억을 복구해 나간다.


  이 다큐는 무려 2시간 40분에 이르는 러닝 타임을 갖고 있다(감독판). 나는 긴 시간 때문에도 그랬지만, 다큐가 다루는 그 무거운 이야기 때문에 거의 7년의 시간을 그냥 안보고 있었다. 어떤 실제적인 사건을 다루는 영화는 보는 이의 진을 다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아마도 이 작품도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이 다큐를 보려는 이들은 되도록이면 빈속에 보아야 하며, 무언가 먹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다. 욕지기와 함께 내내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가장 덜 알려진 학살 사건. 1965년과 6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 사건이었다. 1965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를 쿠데타로 몰아낸 수하르토는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다.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서 무차별적이고 잔혹한 범죄 행위들이 자행되었고, 그 결과 목숨을 잃은 피해자만 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무고한 양민들과 중국인이었으며 그 학살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준군사 조직 판카실라는 공식적으로 그 어떤 조사나 처벌도 받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판카실라는 유력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온갖 더러운 사업과 범죄에 연관되어 있다.


  다큐의 초반부에 안와르 콩고와 그의 수하였던 아디가 아주 유쾌하게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떠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을 가장 쉽고 편하게 죽이는 방법을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고 배웠다는 이야기부터, 자신이 철사로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지도 웃으면서 재연한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양심의 거리낌도 없어 보인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안와르와 아디에게 그들의 과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그들은 흔쾌히 승락했다. 다큐의 제목 'The Act of Killing(인도네시아어 제목 Jagal: 도살자)'는 그렇게 만들어 졌다.


  안와르와 아디는 그 학살에 동참했던 과거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재회한다. 그들에게 학살의 기억은 끔찍하고 참혹한 것이 아니라 웃으며 떠들 수 있는 이야깃거리다. 당시에 영화관을 끼고 암표장사를 하던 그들은 사업을 소유한 중국인들이 미국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게 하자 앙심을 품었다. 마침 수하르토의 쿠데타가 터졌고, 그들은 돈과 권력을 위해 거리낌없이 학살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대적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범죄는 인생의 새로운 발판이 되어서 지역 유지, 사업가, 정치가가 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피해자들의 가족들은 모두 숨죽이며 입을 틀어막고 살아야 했다.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영화로 만든다는 사실에 신나고 들뜬 그들은 의상이며 소품을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기도 하고, 보조 출연을 할 동네 주민들도 모집하러 다닌다. 그 주민들 가운데에는 그들에 의해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학살자와 피해자들은 함께 영화를 촬영한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한 그들의 촬영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뭔가 불안스러운 흔들림과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숲 속에서 이루어진 방화와 살인, 강간의 촬영 장면에서 안와르의 표정은 어둡고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단지 짧은 재연 장면이었음에도 촬영에 참가한 동네의 중년 부인은 넋이 나가 버린다. 촬영이 끝나고도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서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학살자 아디의 딸도 있다.


  "솔직히 후회되는데, 이 장면이 이렇게 끔찍할 줄 몰랐어요. 친구들은 나에게 더 가학적으로 해야한다고 하는데, 저 여자애들과 어린애들을 보니까... 평생 우리를 저주하지 않겠어요?"


  안와르는 그렇게 학살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나간다. 자신이 행한 고문과 온갖 살인의 방법들을 재현하는 그의 얼굴은 고통과 공포, 회한으로 일그러진다. 다큐의 마지막에 그는 자신과 조직원들이 사람을 죽인 건물의 옥상을 둘러 보며 구토를 참지 못한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그곳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학살자의 내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그에게 끔찍한 범죄의 과거는 지나갔으며, 그가 그곳을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학살자 안와르 콩고는 2019년 10월 25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신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다큐 이후에도 지역의 여러 범죄 사업에 연루된 삶을 살았다. 


  "글쎄, 안와르와 나 사이의 유대감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우정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다만 난 그가 좀 마음에 걸려요."(theguardian.com과의 2013년 6월 20일 인터뷰)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다큐 제작 이후로도 안와르와 지속적으로 연락했다. 오펜하이머가 안와르와 맺은 인간적 관계와 어떤 신뢰가 없었다면 이 다큐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안와르는 감독을 '조슈아'라고 친구처럼 부르며, 아주 가감없이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 보인다.


  'The Act of Killing'을 통해 관객은 학살자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학살자들이 스스로 배우가 되어 자신의 범죄를 '재연'하는 이 기이하고 낯선 방법은 어떤 면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한편으로는 이 다큐가 부각시킨 역사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들과 생존자들은 가해자들의 입장만을 다룬 것이라는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래서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2014년에 '침묵의 시선(Senyap, The Look of Silence)'를 만든다. '침묵'이라는 뜻의 인도네시아어 제목의 다큐 'Senyap'은 아버지를 학살로 잃은 아들이 가해자들을 만나는 여정을 담아냈다. 나는 아마도 그 다큐를 보기까지 꽤 오랫동안 망설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통스럽고 괴로운 감정에 휩싸이게 만드는 영화를 보는 이들은 누구나 그것을 삭혀내기까지 나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사진 출처: documenta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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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미스미 켄지 감독의 '검(劍, 1964)' 리뷰를 쓰면서 '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 생각이 났다. '검'은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문학을 좋아하고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이 가진 작품성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극우적인 가치관과 생의 마지막에 택한 끔찍한 죽음의 방식은 이 작가를 언급할 때 어떤 면에서는 흠칫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전집이 나오지 않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의 초기작인 '가면의 고백'과 '금각사', '파도 소리' 정도가 번역되었다. 민음사에서 미번역된 미시마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내놓을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폴 슈레이더의 '미시마-그의 인생(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 1985)'은 4개의 장으로 나누어 미시마 유키오의 생애를 조망한다.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된 사건은 역시 '미시마 사건'으로 알려진 자위대 점거 할복 자살 사건이다. 영화를 4부분으로 분할한 것은 사실 그다지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일부분을 영화적으로 재연해서 보여주는데, '금각사', '교코의 집', '달리는 말'이 나온다. 젊은 청춘 4명의 욕망의 행로를 그린 '교코의 집'과 극우적 사상이 드러난 '달리는 말'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시오카 에이코가 맡은 미술 세트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면서도 매우 화려한 색감으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음악은 그 유명한 현대 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가 맡았다. 폴 슈레이더는 그렇게 관객의 눈과 귀를 장악해나가면서도 본질인 미시마의 생애를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주인공이 논란 그 자체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 이 영화가 가져올 파장을 최소화하고 싶어한 것처럼 보인다.    


  '미시마-그의 인생'이 보여준 영화적 성취와 객관성은 찬사받을 만하다. 각본은 감독 폴 슈레이더와 그의 동생 레너드가 맡았는데, 레너드는 오랜 일본 생활을 통해 나름의 현지 정서에 익숙했다. 또한 그의 부인 치에코는 영어 대본을 일본어로 옮기는 작업을 맡음으로써 영화의 완성도에 기여했다. 제작비를 마련해준 미국 제작자들(코폴라와 루카스)과 미국인 감독, 일본어로 연기하는 일본 배우들, 일본인 세트 디자이너, 일본 현지 촬영이라는 다소 이색적인 조합은 놀라운 시너지를 만들어 낸다. 폴 슈레이더에게 이 작품은 자신이 각본을 쓴 '성난 황소(1980)'와 더불어 말 그대로 인생작으로 남았다. 뭔가 그가 가진 재능의 총합을 다 보여준 느낌이다. 


  미시마 역을 맡은 오가타 켄의 연기도 아주 좋다. 원래 그 역은 다카쿠라 켄에게 제안이 갔지만, 그는 극우파의 위협에 출연을 고사했다. 이 영화는 공식적으로 일본에서 상영된 적이 없는데, 그 배경에는 미시마의 유족과 극우파의 반대가 자리하고 있다. 극우파는 자신들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미시마를 동성애자로 그렸다는 점을 참을 수 없어한다. 어쨌든 폴 슈레이더는 지뢰 피해가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절제된 균형 감각을 가지고 이 논란덩어리 인물을 영화적으로 부활시킨다.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슈레이더는 왜 미시마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시작은 감독 자신의 개인적 관심에서였을 것이다. 사실, 미시마 유키오란 인물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의문과 궁금증을 남긴다. 그가 쓴 소설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그 정치적 변신의 여정과 함께 끔찍하고 참혹한,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죽음까지 모든 것이 그렇다. 나는 미시마 유키오를 떠올릴 때면 어떤 '괴물'의 형상을 상상해 보곤 한다. 어떻게 그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인 글을 써내려갔던 작가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추한 모습의 괴물로 변해버린 것일까?


  괴물을 대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피해서 도망가든가, 아니면 괴물의 주위를 맴돌면서 괴물과 직면할 방법을 찾아보든가. 괴물과 마주하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대적하기로 결심한 이들은 괴물에게 잡아먹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에게 그 모험과 도전은 가치있다. 괴물의 실체를 알아낸다면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고 괴물과 함께 공존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폴 슈레이더는 관객에게 괴물의 입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관객은 그 커다랗고 컴컴한 입구에서 뛰어난 재능의 작가와 그가 쓴 작품, 그의 시대를 조심스럽게 가늠해 본다. 어쩌면 이 탐험은 이제 시작이며, 슈레이더처럼 누군가는 자신만의 영화적 방법으로 그 여정의 기록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리뷰를 쓰고 나서 미시마 유키오와 관련된 자료를 다시 찾아 보니, 와카마츠 코지 감독이 '11・25 자결의 날, 미시마 유키오와 젊은이들(2012)'를 남겼다. 극영화로 미시마 유키오의 생의 후반기 5년의 여정을 담은 영화라고 한다.  

**사진 출처: film-gr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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