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104분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89분




1. 애국 영화 속 전복된 젠더 이미지,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5)

  그의 부친 김필순은 의사로 독립운동가였다. 조선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게 되자 김필순은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북동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져감에 따라 김필순에 대한 일제의 압박도 커져갔다. 결국 김필순은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다. 가장을 잃은 가족의 삶은 무척 어려웠다. 힘들게 정규 교육 과정을 마친 그는 영화계로 흘러들게 된다. 준수한 외모의 그에게 운이 따른다. 그가 출연한 무성 영화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조선인 김염(金焰)은 그렇게 1930년대 중국 무성 영화계의 스타가 되었다. 쑨위(孫瑜) 감독의 1935년작 영화 '대로(The Big Road)'는 김염의 대표작이다.

  영화는 기근을 피해 길을 떠나는 한 가족을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린 아이를 두고 어머니가 죽고, 10년 후에는 아이의 아버지도 길에서 죽는다. 세월이 흘러 1930년대, 부모를 잃은 아이 진(김염 분)은 이제 20대 청년이 되었다. 진은 도로 건설 현장에서 만난 동료들과 형제처럼 지낸다. 건설 현장 인근의 식당에는 유쾌하고 발랄한 두 아가씨 딩샹과 자스민(리 리리 분)이 있다. 진과 동료들은 두 아가씨들과 친분을 쌓으며 즐겁게 보낸다. 하지만 좋은 시간도 잠시, 일본군의 침략이 임박함에 따라 도로 건설 현장에서 긴장이 고조된다. 그들이 짓는 도로는 중국군의 진군을 위한 것이다. 일본군과 내통한 지역의 유지 후는 도로 건설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진과 동료들이 그 뜻에 따르지 않자 후는 그들을 자신의 지하 감옥에 가둔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과 일본군을 동시에 상대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장제스는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일본군 보다도 공산당의 존재를 더 위협적으로 인식했다. 영화 '대로'에서 일본군의 존재는 '적군'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로 제시된다. 그 검열의 배경에는 항일 의식을 고취하려다가 일본을 도발시키게 되면 전선이 확대될 수 있다는 국민당 정부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일본군을 일본군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 기이한 영화가 당시 관객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군과 내통한 부자 후는 악인으로 묘사되며, 그에 의해 핍박을 받는 진과 동료들은 진정한 애국자이다. 그것은 일본군의 공습에 의해 진과 동료들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장면으로 명료해진다.

  국민당 정부의 시책에 따르는 프로파간다(propaganda)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대로'에는 감독 쑨위의 전복적 젠더 관점이 드러난다. 서로의 몸을 친밀하게 쓰다듬는 딩샹과 자스민의 관계는 느슨한 동성애적 연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남성들이다. 내성적인 딩샹이 전통적인 여성상에 가깝다면, 자스민은 좀 더 주체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식당을 찾은 노동자 손님들 앞에서 자스민은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전쟁과 재난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묘사한다. 남자들은 자스민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외모에 매혹된다. 그럼에도 자스민의 노래는 남성들의 욕망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외부의 적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다. 자스민의 강인한 면모는 후의 감옥에 갇힌 진과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격동의 시대 상황 속에서 여성들은 로맨스에 매달리는 수동적인 캐릭터로만 존재할 수 없었다. 도로 건설로 중국군의 항일 투쟁에 기여하는 진과 동료들처럼 여성들 또한 그 전선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필요가 있었다. 쑨위 감독의 여성에 대한 흥미로운 젠더 설정은 '대로(1935)' 이전 해에 만든 영화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자스민 역의 리 리리(黎莉莉)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여성의 육체는 '스포츠 정신'과 '국가'라는 무형의 개념과 긴밀히 결합된다.


2. 여성의 신체에 투사된 국가, 체육 황후(体育皇后, Sports Queen, 1934)

  "오늘날 중국이 약한 이유는 신체를 단련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시골에서 자란 린 잉(리 리리 분)은 아버지가 있는 상하이로 왔다. 화려한 도시의 외관에 왈가닥 시골 아가씨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있다. 린 잉은 해골처럼 마른 사람들과 지나치게 뚱뚱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하이에 존재하는 빈부 격차는 야윔과 비만에 대한 묘사로 드러난다. 그 두 가지 모두 올바르지 않은 병적인 상태이다. 조화로운 신체에 대한 린 잉의 열망은 중국의 부국강병과도 직결된다. 우선 자신의 신체부터 단련하기로 마음먹은 린 잉은 체육학교에 진학한다.

  쑨위 감독은 배우 리 리리를 위해 영화 '체육 황후'의 시나리오를 썼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리 리리를 위한 맞춤 영화인 셈이다. 당시 무성 영화계의 독보적 스타였던 여배우는 이 영화에서 건강한 체육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다. 리 리리가 연기한 린 잉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뛰어난 단거리 선수로 거듭난다. 그런 린 잉의 뒤에는 젊고 잘 생긴 코치 윤이 있다. 윤은 제자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매우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린 잉을 대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로맨스가 아니다. 국가라는 이상적 관념과 결합한 린 잉의 신체는 잘 단련되어야 하며, 동시에 거기에는 건전한 스포츠 정신도 깃들어야 한다. 윤은 린 잉이 화장품으로 얼굴을 꾸미는 것조차 반대한다.

  '체육 황후'는 실질적 내전 상태에 처한 국민당 정부가 필요로 하는 여성상을 잘 보여준다. 쑨위는 체육 학교의 아침 일과를 면밀하게 제시한다. 기상한 여학생들은 체조를 시작하며, 일사불란하게 세면장으로 향한다. 린 잉의 빛나는 치아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양치질 장면은 보건위생에 대한 공익 광고처럼 보일 정도이다. 정규 수업 시간에는 이론적인 것을 비롯해 실질적인 훈련이 이어진다. 린 잉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체육인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연이은 우승으로 자만해진 린 잉은 기존의 절제된 생활에서 벗어난다. 또래 운동 선수와의 연애, 음주가무의 유혹에서 린 잉을 구해내는 사람은 윤이다. 심기일전한 린 잉은 전국 체육 대회에 출전해서 우승을 노린다.

  로맨스의 경로에서 이탈한 영화는 주인공 여성의 성공 신화로도 직진하지 않는다. 린 잉의 급우는 승리에 대한 지나친 갈망으로 신체를 혹사하다가 경기 도중 사망한다. 그 죽음을 본 린 잉은 충격을 받는다. 1등이 되는 것이 자신의 목표가 아니라고 느낀 린 잉은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일부러 놓친다. 왜 린 잉이 1등의 왕관을 포기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이 영화가 설파하는 진정한 스포츠 정신은 승리와 타이틀에 대한 집착에 있지 않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절제에 있다. 그리고 이는 전시중인 국가가 국민에게 바라는 덕목이기도 하다.

  쑨위는 '체육 황후'를 통해 이상화된 국가 이미지를 여성의 신체에 투사한다. 분명히 그것은 프로파간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 여성의 몸이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에 온전한 생의 활력을 전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마도 린 잉의 진정한 성취는 체육 황후의 왕관이 아닌, 신체의 훈련을 통해 습득한 통제의 감각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녀는 패자가 아니며 주체적인 여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에 들어섰다고도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김염(金焰, 1910-1983)의 경력은 중국 공산당의 집권 이후에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배우이며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그의 두 번째 부인 진이(秦怡)와는 달리 김염은 공산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잘못된 위수술 후유증으로 중년 이후의 삶이 망가져 버렸다. 거기에다 그의 가족은 문혁의 광풍에 휩쓸리면서 큰 고통을 받았다.



리 리리(黎莉莉, 1915-2005)의 배우 경력은 매우 순조롭게 이어졌다. 리 리리는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공산 정권 수립 이후에는 후학들에게 연기를 지도했다. 리 리리의 아들은 중국 군부의 실력자 예젠잉(叶剑英, 마오쩌둥 사후 임시 국가 부주석의 지위에 오름)의 사위가 되었다. 하지만 문혁의 피바람을 이 여배우도 피해갈 수 없었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江青)은 자신이 배우였던 시절에 잘 나가던 리 리리에 대한 미움을 갖고 있었다. 홍위병에 의해 머리를 삭발당하는 굴욕을 겪으면서 문혁 시기를 견딘 리 리리는 나중에 복권되었다.



쑨위(孫瑜, 1900-1990)는 미국에서 영화 제작 교육을 받은 엘리트 영화인이었다. 그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시절에 정권 친화적인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마오쩌둥에 의해 비판받은 '우순의 삶(The Life of Wu Xun,1950)'은 쑨위의 경력에 치명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을 무상으로 가르친 교육개혁자 우순은 마오쩌둥의 말 한마디에 반동분자로 몰렸다. 그런 인물의 전기 영화를 만든 쑨위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영화계에서 잊혀진 인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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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은 손녀딸과 함께 대보살 고개에 다다른다. 손녀딸이 잠시 물을 뜨러 간 사이, 노인은 작은 석탑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손녀딸 더는 고생시키지 않게 얼른 이 늙은 몸을 데려가 달라고 되뇌인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방랑승의 복장을 한 남자는 일순간에 칼을 휘둘러 노인의 목숨을 빼앗는다. 손녀딸 오마츠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아무 이유 없이 노인을 죽인 살인자의 이름은 류노스케(나카다이 타츠야 분). 사무라이인 그는 뛰어난 검술을 지녔으나, 그 영혼은 사악함으로 물들어 있다.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영화 '대보살 고개(大菩薩峠, The Sword of Doom, 1966)'는 막부 말기, 어지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피와 광기에 사로잡힌 검귀(劍鬼) 류노스케의 행적을 따라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1860년 봄, 사쿠라다몬 사건(桜田門外の変, The Sakuradamon Incident) 직후'라는 자막이 뜬다. 그 사건은 막부 대신 이이 나오스케가 존황양이파 사무라이들에 의해 암살당한 일을 가리킨다. 사쿠라다몬 사건은 막부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후 막부파와 천황파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막부 시대의 종말을 재촉하는 계기가 된다.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영화 '사무라이(侍, Samurai Assassin, 1965)'는 바로 그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시대극이다. '대보살 고개'는 '사무라이(1965)'에서 이어지는 막부 말기 시대극 연작같은 느낌도 준다. 천황파의 공세 속에서 막부파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1863년, 막부를 옹위하기 위해 '신선조(新選組)'가 결성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영화 이해에 도움이 된다.

  죄없는 순례자 노인을 죽인 일은 류노스케의 내면이 심각하게 어그러져 있음을 입증한다. 류노스케는 검술 문파 사이의 평가전에서 상대방을 가차없이 죽인다. 대결 전에 남편을 위해 져달라는 부탁을 하러 간 오하마는 류노스케에게 겁탈당한다. 그 일로 류노스케는 아버지와 문파로부터 쫓겨난다. 류노스케는 신선조에 들어가고, 오갈 데가 없어진 오하마는 류노스케와 함께 하며 아들을 낳는다. 살기를 내뿜는 류노스케의 칼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운명도 뒤흔든다. 할아버지를 잃은 오마츠는 처음엔 영주의 시녀가 되었다가, 결국은 유곽에 팔려 게이샤가 된다. 형을 류노스케에게 잃은 효마(카야마 유조 분)는 복수를 위해 시마다(미후네 토시로 분)의 문하에 들어가 검술을 연마한다.

  영화의 원작자 '나카자토 카이잔(中里介山, 1885-1944)'이 미완성으로 남긴 소설 '대보살 고개'는 불교적 세계관인 '연기(緣起)'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는 악업을 쌓아나가는 류노스케의 행로를 따라간다. 그의 칼에는 오로지 죽음만이 존재한다. 순례객 노인과 오하마의 남편은 죽일 이유가 없는데도 죽였다. 살인의 광기에 사로잡힌 이 남자는 급기야 자신의 아이를 낳은 오하마까지 죽여버린다. 그런 류노스케의 살인귀적 본성은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오히려 각광을 받는다. 류노스케는 신선조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영화 속 신선조는 천황파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와 암살을 일삼는 폭력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세리자와와 콘도 이사미는 신선조 내부의 권력을 두고 투쟁한다. 세리자와는 류노스케를 자신의 사냥개처럼 부린다.

  '대보살 고개'가 보여주는 막부 말기의 혼란상은 새로운 시대로의 개벽을 위한 어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배 계급 내부의 주도권 쟁탈전이었을 뿐이다. 신선조의 후원 요청을 받은 영주는 막부파와 천황파 모두 관심이 없다며 거절한다. 이 냉소적인 영주는 시녀 오마츠에게 살벌한 게임을 제안하면서 의미심장한 비유를 한다. 그는 막부와 천황은 철갑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그들을 받치는 사무라이들은 그 무게 때문에 가라앉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 낡은 권력의 껍질이 이제 벗겨지고 있다면서, 영주는 단검으로 오마츠의 기모노를 오비(허리끈)부터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8분에 이르는 류노스케의 혈투이다. 류노스케는 자신이 죽인 무수한 이들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힌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광분하며 칼을 휘두르는 그에게 콘도 이사미의 수하들이 들이닥친다. 폐쇄된 공간 속에 오로지 피와 비명과 죽음만이 존재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에도 막부 시기 축적된 '무(武)'의 단말마적 최후이기도 하다. 죽어가면서도 류노스케는 칼을 휘두르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오카모토 키하치는 이 무시무시한 악인 사무라이의 살기를 정지 화면(freeze frame) 속에 가두면서 영화를 끝낸다. 영화 '대보살 고개'는 악인 류노스케를 통해 죽음이 횡행하는 막부 말기의 폭압적 체제 변화를 통렬하게 부각시킨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에도 막부 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고샤 히데오 감독, 나카다이 타츠야 주연의 '어용금(御用金, Goyokin, 196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goyokin-1969.html

미후네 토시로 주연의 '신선조(新選組, Shinsengumi, 196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shinsengumi-1969.html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막말태양전(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sun-in-last-days-of-shogunate-1957.html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사회 비판적인 현대극 '에부리만 씨의 우아한 생활(The Elegant Life of Mr. Everyman, 196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63.html

나카다이 타츠야는 시대극을 비롯해 현대극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영화화한 '불꽃(炎上, 1958)'에서 이치카와 라이조와 함께 출연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nflagration-1958.html

'대보살 고개'에서 무사 하마 역을 연기한 카야마 유조는 배우 우에하라 켄의 아들이다. 그는 배우 보다는 가수로 더 많은 활동을 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 카야마 유조 주연의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Scattered Clouds, 196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scattered-clouds-19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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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학을 전공한 핀란드 여학생 로라는 러시아 국경 지대 무르만스크의 고대 암각화(petroglyphs)를 볼 계획이다. 무르만스크행 기차 6번 칸. 그곳에는 험한 얼굴에 빡빡머리를 한 젊은 남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보드카를 연신 들이키는 이 남자는 탁자 위에 안주거리를 지저분하게 늘어놓았다. 무언가 불쾌한 여정이 될 것 같다는 로라의 예감은 처음부터 맞아떨어진다. 로라의 행선지를 물어본 남자는 무르만스크에 매춘이라도 하러가냐며 이죽거린다. 남자의 거칠고 상스러운 언사에 놀란 로라는 식당차와 열차 복도를 헤매며 시간을 보낸다. 다른 객실로 바꾸려고 승무원에게 뇌물을 제의하며 부탁하지만 어림도 없다. 로라는 무르만스크의 암각화를 꼭 보고 싶다. 그러러면 저 6번 칸의 남자를 견뎌야 한다.

  핀란드의 감독 Juho Kuosmanen 'Compartment No. 6(2021)'에서 소련 붕괴 직후의 1990년대로 관객을 안내한다. 로라는 불편한 동행 요하를 인내하기 위해 소형 캠코더에 의지한다. 거기에는 모스크바에서 보낸 짧은 유학 기간 동안의 추억이 담겨있다. 캠코더의 영상을 보며 로라는 연인 이리나를 그리워한다. 원래 이 여행도 이리나와 함께 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리나는 갑자기 여행을 포기한다. 영화의 도입부, 이리나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이리나는 지인들 앞에서 로라를 짖궃게 놀린다. 로라는 그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방에 혼자 앉아있다. 기차가 쉬는 중간 중간 이리나에게 전화를 하지만 이리나의 목소리는 시큰둥하다. 이리나 때문에 가뜩이나 심란한데, 6번 칸의 남자는 자신을 피하려는 로라에게 집요한 관심을 보인다.

  위험해 보이는 남자와의 동행. 처음엔 공포 영화의 분위기를 풍기던 로라의 여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분위기가 누그러진다. 빡빡머리의 이 남자는 기차가 쉬는 중간 기착지에서 뜻밖의 제안을 한다. 엄마 보다 더 가까운 사이의 아줌마 집에 함께 가보자는 말에 로라도 따라나선다. 낯선 도시에서 마주한 따뜻한 환대. 로라는 요하가 겉보기와는 달리 위험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 둘 사이에 놓였던 무지와 편견의 빙벽은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로라와 요하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일반적인 로맨스의 공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요하는 로라의 연인 이름이 이리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동성애자 외국인 여학생과 하층 계급 광산 노동자 요하가 맺는 이 기묘한 인간 관계는 우정, 또는 사랑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다. 마침내 도착한 무르만스크. 그곳 사람들로부터 겨울에는 암각화가 있는 곳에 갈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은 로라는 상심한다. 요하는 그런 로라를 이끌고 힘겹게 암각화 구경에 나선다. 이 저돌적이고 우직한 남자는 그렇게 로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내비친다. 돌아오는 길에 로라와 요하는 거센 눈보라가 치는 들판에서 신나게 뒹굴며 눈싸움을 한다. 사랑이라기에는 무언가 이상하고, 우정이라기에는 더 특별한 것이 둘 사이에는 존재한다.

  이 험한 세상에서 전적으로 낯선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 '6번 칸'은 우리 내면에 자리한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 두려움 대신에 관대함과 인내심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로라의 무르만스크행 6번 칸에는 그러한 만남의 경이로움이 있다. 마음을 열고 함께 한다는 것, 그 충만한 소통의 희열을 관객은 로라와 요하를 통해 공유한다.

  영화 속 소형 캠코더와 카세트 테이프는 지금의 디지털 시대에는 없는 아날로그 시대의 상징이다.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은 아날로그적 감수성과 1990년대 불안정한 러시아 사회를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로라와 요하의 인간적인 소통은 구시대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다. 이제는 정말 보기 힘든 Kodak의 35mm 필름으로 촬영된 이 아름다운 영화에 나는 아낌없이 별 5개의 만점을 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Compartment No. 6(2021)는 2021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이란의 Asghar Farhadi 감독의 'A Hero(2021)'는 공동 수상으로 영예를 나누어 가졌다.

영화 A Hero(202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all-winners-all-losers2018-hero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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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꿔다 놓은 보릿자루. 그 말의 반대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뭐가 있을까? 'party starter'는 어떨까? 영화 'Cha Cha Real Smooth(2022)'의 주인공 앤드류는 대학을 졸업한 22살의 청년이다. 앤드류는 동생을 데리고 우연히 가게된 mitzvah party(유대교의 성인식 파티, 13살이 되는 해에 치룸)에서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잘 해낸다. 그 재능을 알아본 학부모들은 앞다투어 앤드류를 'party starter'로 고용한다. 파티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고 진행자 역할을 하는 그 일은 어느새 앤드류의 부업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앤드류는 파티에서 자폐증 여학생 롤라와 그 엄마 도미노를 알게 된다.

  앤드류에게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대학은 졸업했지만 아직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우선은 돈을 벌기 위해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여자 친구는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났다. 앤드류는 돈이 좀 모이는대로 여자 친구가 있는 바르셀로나로 떠날 생각이다. 그런데 그런 앤드류에게 자신보다 열 살이나 더 많은 싱글맘 도미노가 눈에 들어온다. 짝사랑은 아니다. 도미노도 딸 롤라를 따뜻하게 대하는 앤드류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22살 백수 앤드류, 32살 싱글맘 도미노, 이 둘의 사랑이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앤드류는 마치 안개 속을 걷는 사람과도 같다. 22살이란 나이에 무언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32살의 도미노는 어떤가? 도미노의 삶도 불안하게 흔들리기는 마찬가지. 이른 나이에 엄마가 되었고, 아이 아빠는 자신을 떠났다. 그런 도미노가 가장 갈구하는 것은 '안정'이다. 약혼자 조셉과 함께 한다면 붕 떠있는 삶이 비로소 땅에 닿은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고 여자는 생각한다. 감정적으로는 앤드류에게 끌리는 것도 사실이다. 약속된 미래와 불확실한 모험, 도미노는 두 개의 선택지를 두고 갈등한다.

  앤드류가 도미노에게 느낀 사랑의 감정은 어떤 면에서 '보살핌'과 '관계 맺기'의 욕구와도 관련이 있다. 앤드류의 모친은 조울증을 앓고 있고, 앤드류는 12살 동생을 엄마를 대신해서 챙긴다. 아마도 앤드류에게 자폐증을 앓는 롤라와 싱글맘 도미노 또한 보살펴야할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앤드류의 배려와 보살핌은 도미노와 롤라에게 위로가 된다. 그 지점에서 도미노는 앤드류를 밀어내기로 마음먹는다. 도미노는 자신과 롤라를 보살피느라 앤드류가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될 수 있다고 걱정한다. 22살의 앤드류에게는 경험해야할 청춘의 많은 날들이 있고, 32살의 도미노에게는 안정된 삶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사랑'은 인생의 많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때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자신의 한계와 나아갈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앤드류와 도미노의 사랑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도미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돌아온 앤드류는 차 안에서 조용히 흐느낀다. 22살의 청춘에게는 일과 사랑을 찾기 위한 수업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파티 참석자들을 무대 위로 불러내기 위해 애를 쓰지만, 자신은 결코 파티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파티 스타터. 앤드류는 이제 가족과 고향을 떠나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홀로 서기를 하려는 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앤드류 역을 연기한 Cooper Raiff는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도 했다. 이 25살의 젊은 영화인은 연기와 연출, 거기에 제작이라는 세 개의 공을 실수없이 저글링해낸다. 시나리오가 꽤 좋은 편이다. 청춘의 방황을 로맨스와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솜씨가 돋보인다. 진부한 삼각 관계로 흐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쿠퍼 레이프는 '성장'이라는 주제에 잘 녹여낸다. 다소 투박하기는 해도 'Cha Cha Real Smooth'는 쿠퍼 레이프의 영화에 대한 재능과 그가 가진 포부를 가늠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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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미소는 이제 막 출산을 했다. 태반을 뒤집어쓰고 태어난 새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힘으로 일어선다. 새끼는 본능적으로 어미의 젖을 찾아서 고개를 들이댄다. 이야기만 듣는다면 뭔가 가슴 뭉클한 동물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다. 하지만 이 어미소가 있는 곳은 기업형 낙농 목장이다. 어미소가 새끼와 함께 하는 시간은 출산 후 단 몇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어미소가 원래 있던 축사로 돌아가기를 재촉한다. 어미소는 배설물로 질척거리는 시멘트 바닥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렇게 자신의 축사로 돌아온 소는 불안한듯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여러 번 울음 소리를 낸다. 소의 얼굴을 보여주는 이 극단적인 클로즈업 쇼트는 좀 무섭다. 나는 태블릿 PC의 전체 화면 대신에 일부러 작은 화면으로 보았다.

  Andrea Arnold는 영국 Kent주에 위치한 목장에서 'Cow(2021)'를 찍었다. 다큐는 'Luma'라는 이름의 젖소의 일생을 담아낸다. 농장에서 루마는 이름이 아닌 인식번호 1139로 구분된다. 루마가 낳은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귀에 인식표가 부착된다. 새끼의 번호는 04481. 어미소와 분리된 새끼는 비슷한 또래의 새끼들과 같이 지낸다. 새끼들에게 주어지는 우유는 급유통을 통해 배분된다. 새끼들이 있는 축사는 건초더미가 있고 나름 공간의 여유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젖소들이 있는 축사는 비좁고 바닥에는 늘상 오물이 흐르고 있다. 농장의 인부들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원형으로 배치된 자동 축유 시스템으로 소들을 몰아 넣는다.

  이 농장에서 소는 하나의 상품으로 관리된다. 그것은 루마의 새끼 04481이 제각(除角)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젖소도 뿔이 난다. 그런데 그 뿔을 제때 제거해주지 않으면 소들끼리 부딪히면서 상처가 날 수 있다. 농장의 인부는 뿔이 나려는 자리를 가늠해보고 인두로 지진다. 어린 송아지가 고통으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렵다. 그렇게 04481은 뿔을 잃는다. 수의사는 암소들이 수태하기에 알맞은지 수시로 점검한다. 날짜가 정해지면 숫소와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루마는 또 새끼를 갖고 출산을 한다.

  농장에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시끄러운 팝송을 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알 수 없다. 인부들이 좋아서 틀어놓은 노래를 들으며 소들은 정해진 일과에 맞추어 축유기에 몸을 맡긴다. 계속 자라는 발굽도 주기적으로 다듬고 잘라주어야 한다. 좋은 품질의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젖소들은 정해진 매뉴얼에 맞추어 관리된다. 이 농장의 시스템이 특별히 비인간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근처에 목초지가 있어서 소들은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지낼 수 있다.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는 소들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진 생명체로 바라보도록 만든다. 소들이 밤하늘의 별을 보고 울 때,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들을 볼 때, 관객은 무언가 이 소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 크고 순한 눈망울을 지닌 동물이 고통도 슬픔도 모른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곳 농장의 소들은 오직 인간을 위해서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전통적 낙농업에서 키우는 사람과 가축 사이에 존재했던 유대감은 오늘날의 기업형 낙농업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소는 상품이며 거기에서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낼 수 있도록 잘 관리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먹는 우유와 고기, 유제품은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 이 다큐가 채식주의를 고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상품 생산을 위해 사육되는 가축이 아니라, 우리와 이 지구상에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로서의 '소'를 바라보도록 요구한다.

  다큐의 마지막, 한적한 축사에 홀로 있는 루마에게 한 그릇의 사료가 주어진다. 잠시 후 들리는 짧고 날카로운 총성. 농장의 1139번, 루마는 그렇게 농장에서의 삶을 끝마쳤다. 모든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육식의 미래는 인류를 위해서도, 지구를 위해서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과학자들이 인공육을 비롯해 다양한 방식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소들은 비좁은 축사에서 끊임없이 오물 바닥을 오가며 새끼를 낳고, 우유를 짜내며, 인간의 손에 의해 죽는다. 'Cow'는 축산업과 육가공업의 근원적 토대에 대한 묵직한 물음을 던진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동물을 다룬 다큐 리뷰

농장의 돼지 Gunda의 삶, Gunda(2020)
터키 길거리 떠돌이 개의 삶, Stray(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aquarela2018-gunda2020-stray2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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