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의 명망있는 과학자 스레텐스키 교수의 일상은 단조롭다. 오직 연구에만 시간을 쏟는 그에게 그나마 말 상대가 되어주는 이는 무뚝뚝한 성격의 가정부 엘자이다. 여느 날처럼 엘자가 차린 저녁을 먹고 있는 교수의 집에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아가씨가 들어온다.

  "난 아빠의 딸 타샤에요.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대학 시험 준비를 도와줄 테니 가보라고 하더군요. 앞으로 이 집에서 살려구요."

  결혼한 지 1년 만에 헤어진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딸은 아내가 키웠는데, 그 딸 타샤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 제멋대로인 딸은 스레텐스키 교수에게 커다란 숙제처럼 느껴진다. 시험에 실패하고 돌아가는 딸과의 짧은 만남 이후, 교수는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몇 년 후, 그 딸은 다시 아기를 안고 찾아온다.

  "아빠, 난 새로운 사랑을 찾았어요. 아기는 여기다 두고 갈게요. 아빠는 잘 키울 수 있을 거에요."

  그렇게 골때리는 딸 타샤는 교수에게 손녀딸 니나를 안겨주고 떠난다. 세월이 흐르고, 니나는 멋진 아가씨로 자란다. 스레텐스키 교수는 이제 연구는 접고 은퇴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젊고 야심에 찬 과학자 코티코프는 교수의 이전 연구가 매우 가치가 있으니 후속 연구를 해보자며 제안한다. 그 즈음, 남편과 헤어진 타샤가 다시 찾아온다. 교수의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에는 예기치 못한 흔들림이 이어진다.

  일리야 아버바크(Ilya Averbakh) 감독의 1972년 영화 '독백(Монолог, Monologue)'은 평생을 과학 연구에만 헌신한 노교수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 본다. 모스필름, 고리키 필름 스튜디오와 더불어 소련의 3대 국영 영화사 가운데 하나였던 '렌필름(Lenfilm)'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소련 영화에서는 드문 심리 드라마를 보여 준다. 매우 조용하고 건조하게 흘러가는 서사는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면, 스레텐스키 교수와 타샤가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장면에 바로 뒤를 이어 타샤가 아기를 데리고 등장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 그렇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별로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된다. 아기였던 니나는 16살의 생일 파티 때 소녀의 모습으로 어느새 나타나고, 타샤는 등장할 때마다 이혼과 재혼 같은 삶의 새로운 사건을 몰고 온다. 그런 외부의 변화와는 달리 교수의 옷차림이나 외모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 흰머리도 별로 늘어나지 않았고, 늘 입는 갈색의 양복은 마치 교수의 하나뿐인 외출복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버바크 감독은 '독백'의 서사적 구획을 교수의 유일한 취미인 조립 모형 장난감을 번갈아 비춰주는 것으로 대체한다. 칼싸움을 하는 구식 병정, 코끼리에 탄 전사, 낙타와 유목민, 다양한 모습의 소형 장난감들은 교수가 천착하는 연구와도 같이 내면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을 조립하고 바라보면서 보내는 평화롭고 충만한 시간과는 달리, 교수가 가족과 맺는 외적 관계는 끊임없이 물결이 일렁인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며 툭하면 남자를 갈아치우는 타샤는 딸로서도, 엄마로서도 낙제점이다. 16년 동안이나 자신을 대신해 니나를 키워준 교수에게 애를 버릇없이 키웠다며 비난을 퍼붓는다. 새 남편과 결혼해 아빠 집에서 얹혀 살면서도 미안한 기색은 조금도 없다. 이 뻔뻔하고 이기적인 딸에게 스레텐스키 교수는 한결같은 인내와 사랑을 보여준다. 그의 이런 태도는 손녀딸 니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가정사의 어려움 속에서도 스레텐스키 교수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과학 연구에 대한 집념과 헌신이다. 학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명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진실 추구라는 과학자의 본분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남들은 현업에서 은퇴해 평안한 노후를 보낼 때에 교수는 후배 과학자와 새로운 연구에 몰두한다. 교수는 직설적이고 외골수인 후배 코티코프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포용력도 가지고 있다. 그의 연구 주제가 가진 혁신성 때문에 연구소 측과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마침내 원하는 연구 결과를 얻고 명성은 더 커져간다. 그러는 동안, 손녀딸 니나의 연애 문제가 교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별로 아파하는 손녀딸을 위로하지만, 손녀딸은 꼴도 보기 싫다며 폭언을 퍼붓는다. 그는 충격을 받고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다.

  그는 바람 불고 스산한 레닌그라드의 네바 강가와 거리를 하릴없이 헤맨다. 영화 제목 '독백'은 교수의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이 가깝다고 생각한 가족의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했던 교수의 쓸쓸하고 공허한 내면에는 오로지 혼잣말이 가득할뿐이다. 과학이라는 진리 추구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는 세상과 인간사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연애를 시작한 손녀딸에게 '남자를 조심하려므나'라든가, 이별에 대한 위로도 '시간이 가면 다 잊혀질 거야'라는 평범하고 뻔한 조언을 해줄 수 밖에 없다. 그런 그가 보여주는 인간 관계에서의 순진함과 미숙함은 상처와 고통으로 돌아온다. 그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존재는 홀로 헤매다 어스름이 깔린 공원에서 보게 된 14살 때 첫사랑의 환영
()이다. 그는 비로소 응어리진 마음 속 외로움과 슬픔에 대해 털어놓는다.

  영화 '독백'은 학문적인 업적을 쌓은 노교수의 개인사를 통해 관객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다. 어떤 식으로든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는 좋은 영화이다. 과학자로서 쌓은 명성과 지위, 그럼에도 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고독한 내면에 유폐된 교수는 누군가의, 또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생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일리야 아버바크 감독이 레닌그라드의 풍경 속에 풀어놓은 고독한 노교수의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내면과 인생을 응시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kino-teatr.ru  스레텐스키 교수 역의 미하일 글루즈스키, 그가 이 영화를 찍을 당시의 나이는 54세였다. 자신 보다 더 나이 든 연배의 노교수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다음 글은 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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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수록 오래전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KTV(국민방송)에서 요새 방영해주고 있는 드라마 '토지(1987)'를 다시 보고 있다. 햇수로 무려 34년 전의 드라마이다. 어제는 최 참판 댁의 재산을 노린 김평산의 음모에 동참한 참판 댁 하녀 귀녀의 비참한 말로, 귀녀의 아들을 거두는 강 포수 이야기가 나왔다. 어찌나 조연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는지 이미 다 본 것을 또 보게 된다. 많은 등장 인물이 나오는 대하 드라마의 경우, 주연 배우들의 연기를 받쳐주는 조연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야말로 극을 이끌어 가는 주요한 동력이 된다. '토지'는 당시 KBS의 드라마 제작 역량이 총집결된 작품으로, 박경리 원작의 치밀한 서사와 당대의 대표적 TV 출연 배우들의 열연이 빛난다.

  '토지'는 하동의 평사리를 배경으로, 구한말에서 광복 전까지 만석꾼 최 참판 댁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소설이 완간된 것은 1994년이어서, 이 드라마는 당시까지 출간된 부분까지만 다루었다. KBS에서는 주인공 '최서희' 역의 최수지를 드라마의 간판으로 내세워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최수지의 사진이 인쇄된 KBS 엽서를 홍보물로 받았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신인 배우로 연기력이 미흡하다는 평이 있기는 했었지만, 최수지가 보여주는 서희의 이미지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최수지를 비롯해 이 드라마는 신인 배우들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서희의 아역으로 나왔던 이재은과 안연홍은 이 드라마의 출연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서희의 몸종 봉순이의 소녀 시절을 연기했던 전미선의 고왔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서희와 길상의 큰아들 환국 역으로는 김민종이 나왔다. 그의 첫 드라마 출연작이었다.      

  '토지'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김평산의 사악한 계략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서희는 할머니마저 돌림병으로 잃은 후, 일가붙이인 조준구에게 재산을 강탈당한다. 할머니가 숨겨놓은 금괴를 가지고 연변의 용정에 자리를 잡은 서희는 조준구에게 복수할 계획을 진행시켜 나간다. 한편 조선의 국운은 기울어 일본의 압제에 놓이게 되고, 조준구는 친일파가 되어 하동의 권력자로 군림한다. 송노인을 내세워 광산 투자를 미끼로 조준구를 망하게 만든 서희는 평사리의 집과 땅을 되찾고 마침내 귀국한다. 종의 신분으로 서희의 남편이 된 길상은 독립 운동에 투신하고, 서희의 두 아들도 시대의 격변 속에 어려움을 겪는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서희는 길상의 빈자리,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들을 보며 인생의 회한을 느낀다. 일제의 폭정이 심해지는 가운데,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커져 가지만 그 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된 정서는 혈연주의이다. 평사리 만석꾼 최 참판 댁의 가계(家系)는 최치수의 딸 서희에게 이어진다. 최치수가 비명횡사한 이유는 집안의 종손 자리를 넘 본 김평산 일당의 계략 때문이었다. 조상 제사를 모시는 아들에게 가문의 모든 재산이 상속되는 유교적 전통에서 딸 서희가 가진 지위는 무의미하다. 할머니의 일가붙이 조준구가 최씨 집안의 재산을 강탈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서희는 아들들에게 남편의 성씨인 김씨 대신 최씨를 부여함으로써 단절될 위기의 가문을 복원시킨다. 핏줄을 타고 이어지는 것은 성씨뿐만이 아니다. 박경리가 그려내는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외모와 기질, 성격에 더해 부모의 인생과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사악한 김평산의 아들 김거복은 일제 시대의 밀정이 되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성품을 보여준다. 김평산과 대비되는 그의 착한 처 함안댁은 남편의 악행에 절망해 자살하는데, 함안댁의 성품을 닮은 거복의 동생 한복은 길상의 독립 운동을 돕는다. 강직한 용이가 후처 임이네와의 사이에서 얻은 홍이는 아버지의 성품을 물려받는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삶까지도 빼닯는데, 무당 월선에 대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 했던 용이의 젊은 날처럼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대체적으로 '토지'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자식들은 부모의 태생을 따라간다. 동학당의 우두머리 김개주와 서희의 할머니 조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김환의 일생은 체제 저항적인 삶이었다. 그것은 결코 교육이나 주변 환경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경리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철저히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갇혀 있다.

  타고난 운명에 순응하며 그저 살아갈 따름인 인물들에게 출구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여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죽음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김평산의 처 함안댁의 자살 말고도 '토지'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인물들이 여럿 나온다. 서희의 몸종에서 기생이 되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봉순은 결국 딸을 남기고 강물에 몸을 던진다. 김환은 자신이 몸담은 동학 잔당 내의 분란 때문에 체포되는데, 동료를 밀고할 위기에서 조직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다. 박경리가 보여주는 등장인물들의 '자살'이라는 삶의 종결 방식은 다소 미화되어 있으며, 윤리적인 결단에 의한 측면이 강하다.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갈 수 밖에 없었던 민초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죽음, 그것도 순탄치 못한 여러 죽음의 방식으로 재현된다. '토지'에서 타고난 자신의 명줄대로 살아가는 인물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 타고난 운명대로 변혁의 시대와 맞서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 '토지'는 무려 2년에 걸쳐서 방영된 대장정의 드라마였다. 그런 엄청난 제작비와 인력이 투입된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공영방송으로서 KBS가 가진 장점이었고 의무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를 빛나게 만들었던 것은 주 조연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였다. 김평산 역의 이치우, 그 아들 김거복 역의 백인철이 보여준 사악하기 짝이 없는 연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2004년에 SBS에서 리메이크로 방영된 '토지'에서 김거복 역은 유해진이 맡았는데, 그의 연기도 백인철의 연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악랄한 조준구 역의 연규진과 조준구의 처 홍씨로 나온 김성녀의 연기는 또 어떠한가? 어떤 면에서 연규진의 배우 경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그 연기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용이 역으로 나왔던 임동진, 강청댁 역의 연운경, 월선 역의 선우은숙, 임이네로 나온 박원숙의 연기도 명불허전이다.

  토속적이고 장중한 주제곡이 흐르는 가운데 소가 쟁기질을 하는 '토지'의 인트로 화면을 잊는다는 것은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덧 34년의 세월이 흘렀고, 좋지 않은 화질의 드라마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감동과 재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이런 대하 사극을 만드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드라마는 외주 제작의 형식으로 바뀌었고,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간접 광고들로 범벅이 된 드라마들이 쏟아질 뿐이다. 사극 장르 조차도 판타지 사극으로 생존하는 마당에 '토지'같은 대하 드라마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희망사항으로만 남을뿐이다. 공채 시스템 하에서 기용할 수 있었던 실력있는 조연 배우들의 인력 풀도 무너진 지 오래다. 오래전 사극 속의 중견 배우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은 '인생 다큐 마이웨이'에서 인데, 은퇴한 그들은 시골의 전원 주택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KTV에서는 평일 저녁 10시 반부터 11시 반까지 '토지'를 방영하고 있다. 박경리 작가의 필생의 업적 '토지'를 드라마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혼란의 구한말과 엄혹한 압제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민초들의 이야기, 그리고 흘러간 시대의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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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는 어느 여름날, 가족의 평범한 식사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일상적인 가족극 같은 첫인상을 주는 이 영화, 그런데 첫 장면부터 흐르는 영화의 음악은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의 1959년 영화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Thus Another Day)'의 러닝 타임은 73분으로 짧은 편이지만, 이 영화가 주는 여운은 길고 오래 지속된다.

  가정주부 야스코의 머릿속에는 늘 돈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도쿄 외곽에 마련한 집의 대출금을 갚는 일은 버겁기만 하다. 평범한 샐러리맨 남편 쇼이치는 여름 동안 상사에게 집을 빌려주고 월세를 받아 살림에 보태자고 제안한다. 쇼이치는 도쿄의 친구 아파트에, 야스코와 아들 가즈오는 친정 가루이자와에서 지내기로 한다. 잡화점을 하는 친정 가게일을 봐주면서, 야스코는 동네 주민 슈스케와 친해진다. 그는 퇴역 군인으로 아내 대신 딸을 돌보며 지내고 있다. 평온해 보이는 휴양지 마을에 야쿠자 일당이 오면서 분란이 생기기 시작한다. 야스코와 쇼이치 부부의 힘겨운 여름 나기는 순탄하게 끝날 수 있을까...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 자신이 쓴 각본은 여러 등장 인물에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흩어져 있어서 산만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영화의 서사에는 응축된 힘이 있다. 영화에서 서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은 퇴역 군인 슈스케이다. 전장에서의 살상의 기억 때문에 슈스케는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가 주는 군인 연금을 거부한 것은 슈스케가 지닌 도덕적 양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로 인한 경제적인 곤궁은 아내와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고, 그는 아내가 부쳐주는 생활비에 의지해 딸을 키우고 있다. 가장으로서도, 사회의 일원으로도 기능하지 못하게 된 슈스케의 모습은 전후 일본 사회의 그늘을 보여준다. 슈스케는 끝없이 펼쳐진 산과 유유히 흐르는 강의 풍광 속에 은거를 택한다. 그는 친해진 야스코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싯귀를 들려준다.

  "어제는 지나갔고, 오늘은 어제와 또 다른 날,
  무엇이 괴로운가,
  왜 내일을 걱정하는가..."

  슈스케처럼 야스코의 동생 고로도 틈만 나면 전원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런 시와 노래들은 기이하게도 영화 속에서 계속적으로 비춰지는 자연의 풍광과 어울리지 않는다. 마을에 머물게 된 야쿠자들의 존재 때문이다. 젊은 야쿠자들은 부잣집 딸 노리코와 대학생 친구들을 위협하며 돈을 갈취한다. 마을 곳곳을 다니며 불안을 조성하는 그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지만, 그저 감내할 뿐이다. 경찰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늘 또 오늘'에서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겉으로 아무 문제 없이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전후 일본 사회의 내면을 해부한다. 전쟁의 상흔으로서의 슈스케, 거기에 지나친 경제적인 압박감에 시달리며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중산층 가정주부 야스코의 모습이 더해진다. 영화 초반부에 야스코가 장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채와 생선에 붙여진 가격표가 연속적으로 편집된 몽타주로 이어진다.


  어린 아들 가즈오는 힘들게 손빨래를 하고 있는 엄마에게 왜 세탁기와 TV를 사지 않느냐고 불평을 쏟아낸다. 무리해서 장만한 집의 대출금은 야스코의 내면을 피폐하게 만든다. 남편 쇼이치는 그런 야스코를 보듬어 주기 보다는, 상사에게 아부해서 빨리 출세할 방법에만 몰두할 뿐이다. 이 중산층 가족은 돈과 물질에 대한 열망에 매몰되어 가고 있다. 그는 가루이자와에 놀러온 상사 부인에게 인사를 차려야 한다며, 비가 오는 날 수박을 사들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갔다 온다. 밤새도록 마작 놀이 상대가 되어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남편을 보면서 야스코는 환멸을 느낀다. 슈스케와의 대화가 야스코에게는 유일한 위로가 된다.

  아름다운 전원의 풍광 속에서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펼쳐 보이는 이야기들은 생각 보다 무겁고 어둡다. 슈스케는 갑작스럽게 딸의 죽음을 맞이하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야쿠자들의 횡포는 갈수록 도를 더해 간다. 군도(軍刀)를 들고 야쿠자를 찾아간 슈스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마감한다. 길게 뻗은 좁은 풀숲길에서 칼에 찔린 야쿠자와 총에 맞은 슈스케의 고통스런 죽음이 롱쇼트로 포착된다. 이 끔찍하고 우울한 풍경은 일본 사회의 근원적 불안이 전쟁과 폭력에서 기원했음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그 불안은 '죽음'이라는 방식으로도 제거되기 어려운 것이다.

  '24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에서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보여주었던 반전(反戰)과 사회 비판의 목소리가 '오늘 또 오늘'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관객들은 확인하게 된다. 섬 마을 학교에 닥쳤던 전쟁의 고통스런 상처는 가루이자와의 초록의 풍광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가을의 어느날, 야스코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예전의 일상을 이어간다.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슈스케에게 울면서 털어놓았던 야스코는 삶의 의미를 찾았을까? 키노시타 케이스케는 영화라는 도구로 작성한 전후 일본 사회의 심리학적 보고서를 보여준다. 놀랍게도 이 건조한 보고서에는 인생의 단편적 진실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사진 출처: en.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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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항구의 아그니(Η Αγνή του λιμανιού, Lily of the Harbor, 1952)'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데이비드 로웰 리치 감독의 '마담 X(Madame X, 1966)'에서 라나 터너는 아들을 향한 절절한 모정을 보여준다. 하층민으로 상류층 남자와 결혼한 홀리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시어머니에 의해 어린 아들을 놔두고 떠나게 된다. 세월은 흐르고 홀리는 밑바닥 주정뱅이의 삶을 전전한다. 우연히 홀리의 과거를 알게 된 사기꾼이 아들을 찾아가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그 사기꾼을 죽인 홀리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마담 X'라는 이름으로 법정에 선다.


  홀리의 아들은 그 여인이 자신의 모친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변호인으로 나선다. 매우 잘 만들어진 이 멜로 영화는 더글라스 서크의 'Imitation of Life(1959)'에 나왔던 라나 터너의 유명세에 힘입어 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멜로 드라마의 주 관객층인 여성이 영화에서 TV의 연속극(Soap opera)으로 이동하면서, 멜로 영화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실제로 '마담 X'의 흥행 성적도 시원찮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라나 터너의 열연, 심금을 울리는 서사, 좋은 연출로 멜로 영화의 황금기를 마감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마담 X'에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아들을 향한 엄마의 모정이다. 자신의 삶이 망가지더라도 아들만은 지켜내야 한다는 홀리의 집념은 급기야 살인까지 불사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모성은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신성화된 가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모성은 불멸의 가치인가? 섀리 엘 서러(Shari L. Thurer)는 '어머니의 신화(1995, 까치 글방)'에서 발견된 관념으로서의 '모성'의 역사를 기술한다. 도덕적 의무로 강제된 모성이 신화화되면서 그것은 여성에게 억압적인 심리적 기제로 작동한다. 라나 터너가 연기한 홀리는 그 모성의 신화를 충실히 재현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지고지순한 모성의 가치에 감동받는다. 이 모성 신화에는 '자기 희생'이 수반된다. 그것이야말로 멜로 드라마로서 '마담 X'를 구축하는 중요한 뼈대이다.

  요르고스 차벨라스(
Yorgos Tzavellas) 감독이 1952년에 만든 그리스 영화 '항구의 아그니(Η Αγνή του λιμανιού, Lily of the Harbor)'는 그런 모성 신화와는 반대되는 관점에서의 부성(父性)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뱃사람으로 살아온 지아코미스 선장은 고향 피레우스 항구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 한다. 그에게는 아내와 양아들이 있다. 귀환 축하 파티가 열리는 밤, 급한 전갈이 지아코미스에게 도착한다. 마리아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 거리의 여인 마리아는 젊은 시절 그의 연인이었다. 마리아는 선장에게 딸 아그니의 존재를 알려주지만, 그는 아그니를 혈육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술집 여자로 살아가는 아그니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히고, 아버지의 양아들 안드레아스를 유혹해 파멸시키기로 작심한다. 지아코미스에게는 딸 보다는 자신의 대를 이어 선장이 되려는 양아들이 더 소중하다. 그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아그니에게 빠진 안드레아스는 술과 도박으로 돈을 날리고 선장이 될 기회도 놓친다.

  왜 지아코미스 선장은 혈육인 딸 보다 핏줄이 아닌 양아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선장은 무엇보다 아그니의 출신을 확신하지 못한다. 마리아의 유언도, 마리아의 고백 성사를 들은 신부의 증언도 그는 믿지 않는다. 놀랍게도 그가 아그니를 딸로서 인정하게 된 계기는 딸의 등에 자신과 똑같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이다. 유전자 검사로 혈육을 확인할 수 있는 오늘날의 관객에게는 실소를 자아내는 설정이지만,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1936)'의 장돌뱅이 허 생원이 동이를 아들로 확신하는 증거가 '왼손잡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라. 눈에 보이는 확실한 신체적 증거를 보고나서야 선장은 아그니를 딸로 받아들인다. 
 
  여성은 출산의 과정을 통해 모성을 인식하지만, 남성의 경우는 다르다. '부성(父性)'은 자기 결정과 확신을 필요로 한다. 그 아이가 내 자식이라는 믿음이야말로 부성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그니의 등에 난 점은 지아코미스 선장의 부성을 일깨운다. 딸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나서야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선장은 양아들 안드레아스에게 아그니와의 결혼을 허락하고 함께 살자고 말한다. 영화는 임성한의 드라마 '하늘이시여(2005)'의 기이한 막장 결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드라마에서 젊은 시절 사생아로 낳은 딸과 헤어진 여자는 그 딸을 찾아 양아들과 결혼시킨다. '하늘이시여'의 모성이 어릴 때 버릴 수 밖에 없었던 딸에게 못다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면, '항구의 아그니'의 부성은 떠나려는 양아들을 붙잡기 위해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딸을 받아들인다. 아그니가 자신의 혈육임을 인정한 이후에도 지아코미스 선장에게 양아들의 존재는 중요하다. 50년 넘게 바다를 떠돌던 이 남자는 아들이 있는 과부와 결혼하면서 가족을 이루었다. 그 아들에게 그가 보이는 부성은 결코 '사랑'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선장은 자신의 명망을 이어갈 후계자로서의 덕목을 안드레아스에게 역설한다. 딸은 가족이 될 수 있지만, 후계자가 될 수는 없다.

  영화 '마담 X'가 지극한 '자기 희생'의 모성 서사와 모성에 의해 보호받는 아들을 보여준다면, '항구의 아그니'는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 부성과 그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눈물겨운 분투를 치루는 딸의 여정을 그린다. 초창기 그리스 영화사의 대표적 감독으로서 요르고스 차벨라스는 주로 그리스 비극에 영향을 받은 드라마를 영화로 구현했다. 그가 만든 '항구의 아그니'는 멜로 드라마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올가미에 묶인 비극적 인물들의 갈등을 화합 속에 봉합한다.


  자살을 기도한 딸 아그니는 살아난다. 서사의 완성도를 생각한다면, 아그니는 죽고 연인과 아버지는 파멸에 이르는 결말이 멜로 드라마의 공식에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쓴 차벨라스 감독은 희망의 출구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그리스에서 크게 흥행했는데, 아마도 오랜 좌우 내전과 정치적 혼란에 시달린 그리스 국민들에게는 이 영화의 결말이 꽤나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떠나려는 딸과 양아들을 집으로 불러모으는 아버지 지아코미스 선장의 모습은 전후의 상처를 회복하고 새로운 그리스를 이끌 부성의 반영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 출처: finosfilm.com  아그니 역의 배우 엘레니 하치아르기리(Eleni Hatziargy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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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때로 더이상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너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딸 로즈를 향해 이런 말을 쏟아내는 모랑 부인은 삶이 너무나도 괴롭다. 뉴욕 빈민 아파트의 삶, 거칠고 강압적인 남편, 철없는 딸과 아직 어린 아들, 모랑 부인은 그 삶에서 탈출을 꿈꾼다. 어디 모랑 부인뿐인가? 찌는듯한 무더위에 집안에 머물 수 없어서 죄다 밖에 나온 모랑 부인의 이웃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Ain't It Awful, the Heat?'로 이 놀라운 미국 오페라는 시작된다. 'Street Scene'은 쿠르트 바일(Kurt Weill, 1900-1950)이 미국 극작가 엘머 라이스가 쓴 동명의 희곡(퓰리처 상 수상작)을 원작으로 1947년에 만든 오페라 작품이다. 대본은 미국의 흑인 작가 랭스턴 휴즈가 맡았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을 원작으로 만든 음악극(Singspiel) '서푼 짜리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 1928)'로 잘 알려져 있다. 유대인인 그는 히틀러의 압제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다. 1935년의 일이었다. 미국에서 살면서, 그는 자신이 이전부터 작업해온 'Singspiel(독일어로 된 음악극)'을 새롭게 갱신한다. 영어와 미국의 정서를 결합시킨 '미국 오페라(American Opera)'가 그것이다. '미국 오페라'라는 명칭은 쿠르트 바일이 붙인 이름이지만, 1935년에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인이 만든 3막의 영어 오페라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가 그 앞에 자리하고 있다. 거슈인이 보여준 재즈와 오페라의 놀라운 결합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바일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독창적 형태의 미국식 오페라를 탄생시켰다.

  '오페라'라는 명칭을 쓰기는 하지만, 관객들은 'Street Scene'을 보면서 이것이 뮤지컬인가 오페라인가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된다. 바일은 기존의 서양 음악을 대표하는 오페라의 모든 문법에 도전한다. 영어로 쓰여진 대본에 현대 음악과 미국의 재즈, 블루스의 음률이 덧입혀진 노래가 흐른다. 주요 등장 인물만 30명이 넘고(총 50명에 이르는 등장 인물들이 나온다), 대사와 춤, 노래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내가 본 2018년의 영국 연출가 팀 머레이의 마드리드 왕립 극장(Madrid Teatro Real) 공연 버전은 세트도 독창적이다. 4층의 철골 구조 아파트 세트가 양쪽으로 갈라지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그 사이로 뉴욕의 화려한 빌딩숲이 펼쳐진다. 보는 내내 머릿속으로 프로덕션 비용을 헤아려 보게 된다. 

  작품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푹푹 찌는 무더위의 어느 날,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맨해튼 뒷골목 아파트에서 여자들은 더위를 견디려고 집 밖으로 나와 있다. 그들은 이웃들의 흉을 보며 웃고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모랑 부인이 우유 배달부 생키와 바람난 것이 여자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프랭크 모랑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며 거친 언사를 쏟아낸다. 괴로운 모랑 부인은 과거의 꿈과 희망을 되새기며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지만, 딸 로즈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아들 윌리는 심한 장난꾸러기이다.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착하고 성실한 샘은 로즈에게 구애하고, 두 사람은 빈민가를 떠날 수 있는 날을 꿈꾼다. 그러나 로즈의 아버지 프랭크가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게 되면서 극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엘머 라이스는 이민자들의 꿈과 희망을 맨해튼 빈민가 아파트에 투사한다. 이태리 이민자 피오렌티노가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을 아이스크림으로 비유하며 주민들과 함께 부르는 1막의 노래는 흥겹다. 골라먹을 수 있는 다양한 아이스크림은 값싸고 달콤하지만, 현실의 하층 이민자로서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극 전체를 지배하는 숨 막히는 더위처럼 일상의 가난도 그들을 괴롭힌다. 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샘은 변호사를, 로즈는 브로드웨이 스타를 꿈꾼다. 딸을 어렵게 예술 학교로 보내서 졸업시켰지만,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싱글맘 힐데브란트 가족. 그들이 떠난 아파트에는 곧 새로운 이민자 부부가 도착한다. 지저분한 뒷골목에서도 새 생명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뷰캐넌 부부는 산고 끝에 딸을 얻는다. 그런가 하면 예기치 못한 죽음도 있다. 'Street Scene'의 1920년대의 뉴욕 맨해튼은 가난한 이민자들의 역동성으로 가득찬 당시 미국의 축소판인 셈이다.

  이 극의 제목은 우리말로 '거리의 풍경'으로 번역되었다. 번역 제목이 뭔가 미진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가난과 더위에 포위된 최하층 주거지를 면도날로 자른듯한 단면을 보여주는 극에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생각해 본다. 극 속에서 관리인 헨리가 양동이로 핏물을 하수구에 버리는 장면이 2번 나온다. 한 번은 출산 현장의 핏물, 또 한 번은 살인 현장의 핏물이다. 로즈에게는 선명한 핏빛 비극의 현장으로 기억되는 그 거리는 '수난의 거리'일 것이다. 엘머 라이스는 하층 이민자 가족의 비극을 통해 미국 현대사의 숨겨진 장면을 포착한다. 쿠르트 바일은 앨머 라이스가 잡아낸 그 장면들에 음악적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 덕분에 서구의 오랜 음악적 전통과 새로운 나라 미국의 정서가 만난 'Street Scene'은 미국 현대 음악사의 뛰어난 성취로 남게 되었다.



*사진 출처: naxosdir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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