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크게 터질 한 건을 기다리며 산다. 여자 친구에게 대단한 거물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해리 파비안. 그러나 현실은 도시의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고 있다. 뒷골목 큰 술집 실버 폭스 클럽에 손님 물어다 주는 것으로 푼돈이나 버는 파비안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는 찾아올 기미가 없다. 돈 떨어지면 클럽 가수 여자 친구의 지갑이나 뒤적거리는 일상. 그러던 어느 날, 레슬링 경기장에서 엿들은 대화가 파비안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네이키드 시티(The Naked City, 1948)'에서 뉴욕을 배경으로 느와르를 찍었던 줄스 다신은 1950년, 런던을 배경으로 도시에 얽힌 욕망의 변주곡을 들려준다. '밤과 도시(Night and the City)'는 그의 헐리우드 경력을 마감하는 작품이었다. 매카시즘은 이 재능있는 감독을 미국 밖으로 내몰았다. '밤과 도시'는 시대의 광풍이 이후 미국 영화에 끼친 크나큰 손실을 헤아려 보게 만든다.

  해리 파비안은 허풍쟁이 사기꾼이다. 멀끔한 외모에 대단한 화술을 지닌 그는 맘만 먹으면 누구든 속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도시의 뒷골목 세계에서 파비안은 하수(下手)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주변 상황 그 어느 것도 통제할 수 없다. 클럽 소유주 필은 파비안을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신세라며 조롱한다. 아내 헬렌이 자신을 떠나 파비안과 함께 할 거라는 것을 알고 필은 파비안을 파멸시키기로 결심한다. 필은 파비안의 레슬링 사업에 돈을 댄다. 파비안은 전설적 레슬러 그레고리우스가 프로모터 아들 크리스토와 불화한 틈을 파고든다. 파비안은 그레고리우스를 내세워 레슬링 프로모터로 나서려고 한다. 사업 자금을 회수하겠다는 필의 압박에 파비안은 크리스토의 레슬러 스트랭글러(Strangler)를 도발해서 그레고리우스의 제자 니콜라스와 싸우게 만든다. 그러나 경기도 하기 전에 스트랭글러는 니콜라스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그레고리우스는 스트랭글러와 맞붙다 체력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크리스토는 파비안에게 현상금을 내걸고, 파비안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데...

  리처드 위드마크가 연기한 파비안은 정말로 놀랍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쏟아내는 이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성공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추동하는 물질적 욕망에 끌려다니는 인물이다. 영화의 후반부, 크리스토의 현상금 때문에 쫓겨다니는 파비안은 어둠이 깔린 런던의 뒷골목을 달리고, 또 달린다. 위드마크는 신들린 듯한 달리기 실력을 보여준다. 그는 달리는 장면을 위해서 체중을 감량하기까지 했다. 줄스 다신은 '네이키드 시티'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특기를 더 심화시킨다. 전후 재건이 진행되던 런던의 가려진 부분을 하나 하나 열어 보인다. 비좁은 골목과 끝없이 이어진 계단들, 폐허가 된 건물, 영화는 제목 그대로 '밤'의 도시를 탐구한다.

  이 도시에는 파비안처럼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들이 끓어오르고 있다. 탐욕스러운 클럽 소유주 필은 젊은 아내의 마음을 얻지 못해 불행하며,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늙은 남편 곁에 머무르는 헬렌은 자신의 클럽을 열고 싶어한다. 프로모터 크리스토는 아버지의 바램과는 다른 쇼 같은 경기로 돈을 그러모은다. 줄스 다신은 그런 인물들이 추구하는 욕망의 충돌을 그레고리우스와 스트랭글러의 레슬링 장면으로 극화시킨다. 거대하고 강인한 육체들이 뒤엉켜 죽일 듯이 싸우는 이 장면을 파비안과 스트랭글러의 매니저는 긴장과 흥분 속에 지켜본다. 노쇠한 레슬러가 자신의 모든 힘을 쥐어짜내 최후를 맞기까지의 그 과정에는 돈에 사로잡힌 도시 뒷골목 인물들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파비안이 이루고자 했던 허황된 욕망들은 결국 강물에 가라앉는다. 마치 줄스 다신의 도시 탐구 보고서 같은 두 영화들에서 도시는 좀처럼 희망과 낙관을 허락하는 곳이 아니다. 죽기 직전 높은 다리 꼭대기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았던 '네이키드 시티'의 살인범처럼, 자신을 쫓는 이들을 피해 밤새 달렸던 파비안은 부둣가에서 새벽의 런던을 바라본다. 그 도시는 파비안을 늘 목마르게 했고, 헐떡거리며 달리게 만들었다. 그 질주는 죽음으로 멈춘다. '공산주의자 색출'이라는 마녀 사냥을 피해 유럽으로 도망친 줄스 다신은 이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찍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라는 통보를 받았다. 파비안의 죽음에는 줄스 다신의 경력 단절이라는 공포가 투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으로 도피했다 미국으로 가서 의회 증언대에 섰던 에드워드 드미트릭과는 달리 줄스 다신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서 자신의 영화 경력을 계속 이어갔다. '밤과 도시'는 이 감독이 가진 영화적 재능은 일시적인 시련에 수장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리처드 위드마크의 뛰어난 연기를 비롯해 프란츠 왁스만이 맡은 영화 음악도 이 영화에 빛을 더한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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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미할코프의 독특한 소련 웨스턴, 황금을 찾아라(Свой среди чужих, чужой среди своих, 1974)
 
*이 글에는 영화 '황금을 찾아라(1974)'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구 소련 시절 국영 영화사였던 Mosfilm은 인터넷 홈페이지와 유튜브 전용 채널에서 소장 영화들을 무료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다. 러시아 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제목 검색이 오직 러시아어로만 된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영어 자막이 제공되는 영화들은 한정되어 있다.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 영어 자막이 있고 모스필름에서 복원 작업을 한 영화들은 볼만하다고 할 수 있다. 복원 작업에는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작품성과 역사성이 있는 영화들이 엄격하게 선정되기 때문이다. 니키타 미할코프(Nikita Mikhalkov)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 '황금을 찾아라(At Home Among Strangers, 1974)'도 모스필름의 복원작이다. 소련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웨스턴 형식을 갖춘 이 영화는 미할코프의 감독으로서의 패기와 포부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정도가 좀 지나쳤던 것 같다. 영화는 여러 인물들의 등장과 함께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산만하게 얽혀서 진행된다. 관객들은 1시간 반 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썩는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인다. '백군'이라 불리는 반 볼셰비키 세력들과 러시아 혁명 세력간의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이 이어졌다. 영화는 그 적백 내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내전으로 러시아 경제는 붕괴 상황에 직면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식량 수급'이었다. 영화 초반부, 비밀 정보국 체카(Cheka, KGB의 전신)는 해외의 식량을 구입하기 위한 금괴를 모스크바로 수송하려고 한다. 수뇌부에서는 실로프를 주축으로 금괴 수송 작전을 지시한다. 그런데 실로프의 형제는 백군에 가담했다 처형당했기 때문에, 실로프는 정보국 내부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열차에 실린 금괴 가방은 강도들에게 탈취당하고, 호송하던 요원들은 실로프만 빼고 모두 죽는다. 적과의 내통 의심을 받고 체포되는 실로프, 그는 누명을 벗고 금괴를 찾아올 수 있을까?

  영화는 흑백과 컬러 화면이 수시로 전환되는데, 이것이 과거와 현재 시점을 나누는 의미가 아니라 별다른 개연성이 없이 제시된다. 미할코프가 영화를 그렇게 찍은 이유는 간단했다. 한마디로 '컬러 필름이 모자라서'였다. 국가 영화 위원회에서는 예산상의 문제로 흑백 필름을 부분적으로 제공했다. 의외로 그렇게 섞어서 촬영된 영화는 나름의 영상 미학을 보여준다. 미할코프는 꽤나 '보여주기'에 공을 들인다. 항공 촬영으로는 체첸 지역의 광활한 자연을, 역동적인 핸드 헬드 기법으로 비좁은 실내 공간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거기에다 14살 때부터 배우로 활약했던 미할코프는 자기가 직접 주연도 했다. 강도들에게서 금괴를 빼앗는 도적단의 두목 브릴로프로 나온다. 러시아 민속음악과 엔리오 모리코네의 스파게티 웨스턴 선율의 변주같은 음악은 영화 내내 웅장하게 울려퍼진다. 이 소련 웨스턴은 뭔가 어설프면서도 독특하다.

  미할코프 자신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온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영향을 받아서 만들었다고 말한 이 영화는 분명 웨스턴의 러시아적 변용을 보여준다. 헐리우드 웨스턴이 미국 남북 전쟁 이후 공권력 공백기의 서부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면, 소련 웨스턴은 적백 내전 시기의 우크라이나에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금괴가 실린 열차를 탈취하는 장면도 박진감 넘치게 재현된다. 그런데 이 소련 웨스턴의 문제는 바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버무려야 한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실로프가 산적단에 잠입하는 동안 체카에서는 내부자의 소행으로 보이는 테러 행위가 발생한다. 분명 금괴 강도단과 연계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그 범인의 색출은 혁명이념을 더럽히는 불순분자의 처단이라는 측면이 부각된다. 영화 속에서 체카의 작전 수장 샤리체프가 레닌의 초상화를 응시하면서 항전의 의지를 다지는 장면이 나온다. 부르주아에게서 강탈한 금괴는 혁명의 대의에 쓰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금괴를 노리는 이들은 모두 적들이며 반동분자들이다. 결국 그들은 죽음으로 댓가를 치룬다.

  당연히 미할코프가 연기한 산적 두목 브릴로프도 죽는다. 적들 가운데 산적단에 합류한 백군 장교 렘케는 살아남는데, 실로프는 그를 죽이지 않고 금괴와 함께 체카로 호송한다. 실로프가 실종된 줄 알았던 체카의 동료들은 실로프의 귀환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때 홀로, 포승줄에 묶인 렘케의 모습이 대비된다. 그 장면은 패배자이며 조직력도 없는 백군과는 달리 동지애로 뭉친 볼셰비키의 우월성을 보여준다. '황금을 찾아라'에는 그런 이념적 측면에서의 강조 뿐만 아니라, 혁명 시기 이민족들을 통합해나가는 소련 공산당의 모습도 들어있다. 브릴로프가 이끄는 산적단은 다양한 민족 구성원들을 포함한다. 금괴를 찾는 실로프에게 협조하는 타타르인 카이윰의 존재가 그러하다.

  미할코프는 이 영화 이후 제작된 일련의 영화들로 소련의 인기 감독으로 떠오른다. 영화 '황금을 찾아라'에서 관객들은 그의 영화적 재능과 함께 놀라운 정치적 감각을 발견하게 된다. 매우 정권친화적이었던 그는 소련 붕괴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미할코프는 사업가로도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와인 사업, 교육기관, 보석 가공 사업체까지 가진 미할코프는 러시아에서 대단한 재력가로 꼽힌다. 그의 첫 영화에서 금괴를 탐내는 이들은 혁명의 적으로 처단된다. 그런 결말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한 미할코프의 생애는 기묘한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mysea.space  산적 두목 브릴로프를 연기한 감독 니키타 미할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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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네이키드 런치(1991)'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네가 아내를 죽였다고 들었는데."
  "죽이다뇨? 그건 죽인 게(murder) 아니라 사고(accident)였단 말입니다."

  남자는 정색을 하며 대답한다. 정말로 남자는 피치 못할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일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1991년작 '네이키드 런치(Naked Lunch)'는 미국의 비트 문학(Beat literature)의 대표 작가 윌리엄 S. 버로우즈(William S. Burroughs)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크로넨버그는 소설의 주요 내용과 함께 버로우즈의 인생사를 결합시켜서 자신만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냈다. 영화 초반부에 주인공 윌리엄 리(피터 웰러 분)는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총으로 아내를 죽이게 된다. 이른바 '윌리엄 텔' 묘기를 하려다 그렇게 된 것이다. 아들의 머리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을 쏘아야만 했던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 속 주인공 빌헬름 텔. 실제로 윌리엄 버로우즈는 1951년, 영화의 그 장면처럼 아내를 총기 사고로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소설 '네이키드 런치'는 버로우즈에게 작가로서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해준 작품이다. 약물 중독자인 주인공의 기괴한 모험담을 그린 이 책은 외설적인 표현과 난해한 이야기 구성 때문에 출간 이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부의 발명품 특허로 불어난 집안의 재산은 버로우즈에게 크나큰 자유를 선물했다. 하버드 대학까지 나온 남자는 결국 온갖 약물에 찌든 '약쟁이'가 된다. 그의 아내도 약물의 영향 아래에 함께 놓였다. 아내의 죽음은 버로우즈를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살인죄로 기소되었지만, 부유한 집안의 도움 덕분에 감옥행은 피한다. 그런 그가 주목한 곳은 모로코의 '탕헤르(Tangier)'였다. 1949년에 나온 폴 보울스(Paul Vowles)의 소설 'The Sheltering Sky'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보울스가 머물던 곳이 탕헤르였다. 당시 탕헤르는 프랑스, 스페인, 영국이 공동 관리하는 국제 관리 지역으로 다양한 코스모폴리탄들의 집결지였다. 동성애자, 마약 중독자, 예술가들이 탕헤르에서 자유를 찾았다. 영화 속에서 방역 회사 직원 윌리엄이 아내를 죽인 후 도피하게 되는 '인터존(Interzone)'은 버로우즈가 5년 동안 지냈던 바로 그 탕헤르를 가리킨다.

  소설의 제목과 이야기의 큰 얼개를 빌리기는 했지만, 영화를 채우는 세부적 이야기와 묘사는 크로넨버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주인공이 약물에 절어있다는 설정에는 변함이 없다. 윌리엄은 외계인과 같은 기괴한 형상의 Mugwumps들과 마주하는가 하면, 커다란 딱정벌레로 변한 타자기로 끊임없이 글을 써낸다. 마치 약쟁이의 뇌에서 일어나는 온갖 환상들을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그런 장면들은 원작자 버로우즈가 아닌 크로넨버그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크로넨버그 영화들에서 반복되는 테마들, 기괴한 생명체와 기계가 결합하고 실제와 환상이 뒤죽박죽 얽힌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윌리엄 버로우즈의 '네이키드 런치'와는 다른 이야기로 영화적 궤적를 만들어 나간다. 인터존에서 윌리엄은 머그웜프의 지시대로 상부에 보고할 첩보 내용을 타자기로 써내는데, 이 타자기는 윌리엄에게 공포와 강박의 대상이 된다. 약물을 뿜어내며 기이하게 변모해가는 타자기는 스스로 글을 써내기도 한다. 타자기는 윌리엄의 또 다른 자아이며, 약물에 절어서 글을 써내는 작가 자신의 모습 그 자체이다.

  윌리엄이 인터존에서 겪는 모험담은 사실 버로우즈의 탕헤르 생활 요약편이나 다름없다. 버로우즈는 탕헤르에서 약물과 동성애, 모든 일탈을 맘껏 즐겼다. 영화 속 윌리엄을 유혹하는 젊은 남자 키키는 실제로 작가가 탕헤르에서 동거했던 소년의 이름이었다. 탕헤르는 버로우즈에게 인생의 해방구와 같은 곳이었지만, 또 다른 의미로 작가의 정체성을 얻은 곳이기도 했다. 윌리엄은 커다란 딱정벌레에게 먹혀 피투성이가 된 타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는다. 그것은 아내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가진 그가 글쓰기로 도피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의미한다. 결국 이 영화는 아내 살인범 버로우즈가 비트 문학 작가로 탄생하기까지의 내적 투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윌리엄 버로우즈는 아내의 죽음이 자신을 작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워드 브루크너가 5년에 걸쳐 버로우즈를 찍은 다큐 'Burroughs: The Movie(1983)'에서 작가가 그 비극적 사건에 대해 담담하게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거기에서도 그는 영화 '네이키드 런치'에서 윌리엄이 말했듯, 아내의 죽음은 '사고(accident)'였다고 강조한다. 영화의 마지막, 인터존에서 탈출해서 다른 자유 지대 아넥시아로 가려는 윌리엄은 검문소에서 질문을 받는다. 직업을 묻는 질문에 '작가'라고 하자, 검문을 하던 군인은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한다. 윌리엄의 차에는 인터존에서 만난, 죽은 아내와 꼭 닮은 외모의 조안이 타고 있다. 그는 또 다시 한 번 윌리엄 텔 묘기를 선보이고, 조안은 아내와 같은 모습으로 죽는다. 그제서야 군인은 '통과', 라고 외친다. 약에 취해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윌리엄의 과오는 작가적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치환된다. 해충 구제 회사 직원(exterminator: 박멸하는 사람) 윌리엄의 죄의식은 그렇게 소멸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진정한 작가로 태어난다.

  버로우즈는 책의 제목 'Naked Lunch'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The title means exactly what the words say: naked lunch, a frozen moment when everyone sees what is on the end of every fork(제목은 단어 그 자체를 의미할 뿐입니다. 벌거벗은 점심,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포크 끝을 바라보는 얼어붙은 순간)."

  평생을 헤로인 중독자로 살았던 이 작가의 약에 절은 문학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 소설 'Naked Lunch'의 영화화 판권을 샀던 콘라드 룩스(Conrad Rooks)는 정작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크로넨버그가 만든 이 영화를 보고, 진짜 약쟁이가 아닌 사람이 '네이키드 런치'를 만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평했다. 룩스의 말대로 영화 '네이키드 런치'는 약쟁이 작가의 뇌내 망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 버로우즈의 삶에 대한 크로넨버그식 영화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약쟁이 작가의 기괴한 문학 세계의 소개글로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사진 출처: horror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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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미국에서 '사라(Sarah)'라는 제목의 소설책이 나온다. 작가의 이름은 Terminator.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가명으로 출판된 이 책은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매춘부 엄마를 둔 어린 소년의 학대와 상처 가득한 성장기를 그린 소설이었다. 역시 그 해에 출판된 단편 소설 모음집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도 호평을 받으면서, '터미네이터'란 이름의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해인 2000년 5월, 익명의 작가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의 이름은 'JT LeRoy', 제레마이어 터미네이터를 줄인 'JT'로 불리는 17세의 소년은 단번에 천재 소설가로 떠오른다. 염색한 긴 머리, 선글라스, 독특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JT는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 마약 중독,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예민하고 불안한 예술가로 대중에게 비춰졌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학계 뿐만 아니라 패션, 영화, 음악계의 유명인들과 교류하는 셀럽이 된다. 영화 감독 구스 반 산트는 JT가 쓴 '사라'를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 이탈리아의 유명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인 아시아 아르젠토는 JT의 또 다른 책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는다. 커트니 러브, U2, 위노나 라이더 같은 이들도 JT와 알고 지냈다. 그런데 이 잘 나가는 젊은 작가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제프 퓨어차이그(Jeff Feuerzeig) 감독의 2016년작 다큐 'Author: The JT LeRoy Story(2016)'는 작가 JT 르로이를 둘러싼 거대한 사기극의 전모를 보여준다.

  다큐는 로라 알버트란 이름의 여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여자는 어린 시절에 이혼한 부모로 인한 불행한 성장기, 위탁 가정에서의 생활, 폰섹스 전화 상담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이십대 초반을 회고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을 '스피디(Speedie)'라는 별칭으로 소개한다.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던 여자는 청소년 전화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정신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는다. '터미네이터'란 가명의 소년으로 상담을 받았던 스피디는 의사로부터 글쓰기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 소설들을 유명 작가들의 연락처를 알아 내어 보내버린다.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은 첫 소설 'Sarah'가 출판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계속 발표한 소설이 인기를 끌자, 여자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나올 궁리를 해야만 했다. 당시 동거하던 남자 친구 제프에게는 '사반나'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뚱뚱한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를 지닌 여자는 사반나를 '터미네이터'로 소개한다. 곧 이 이름은 'JT 르로이'로 바뀐다. 그렇게 스피디의 현실 아바타 'JT'가 탄생한다. 여자는 남자 친구 제프와 함께 공동 매니저로 'JT'의 모든 것을 관리하며 함께 한다. 이 기가 막힌 사기극은 무려 5년 동안 이어졌다. 대중 매체와 유명인들은 'JT'의 모든 것에 열광했고, 덩달아 매니저 노릇을 하던 여자는 음악하는 남친 제프와 함께 꿈꾸던 음반까지 낸다. 여기에서 여자의 이름은 '에밀리 프레이저'로 또 바뀐다. 'JT'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Elephant, 2003)'의 제작 과정에도 참여한다. 물론 모든 것은 그 여자 로라 알버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각색과 작사 작업, 매니저, 가수, 의상 코디네이터... 여자는 자신의 아바타 'JT'와 함께 하는 동안 문화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간다.

  다큐 내내 유명인들과 'JT'의 통화 내용이 담긴 녹음 테이프가 재생된다. 로라 알버트는 'JT'를 가장한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했고, 그것을 다 녹음해 놓았다. 중간 중간 삽입된 애니메이션 장면들과 알버트의 자필 메모들도 이 다큐의 독창성과 사실성을 배가시킨다. 거기에 자신의 사기극을 차근차근 되짚어 회고하는 로라 알버트는 전문 배우 뺨치는 연기력까지 보여준다. 이 여자는 물론 '사기(hoax, scam)'라는 단어를 전적으로 부인한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라고 부르는 '다중 인격 장애'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양한 가명의 사용은 예술가에게 용인된 표현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단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대리인을 내세운 것이 죄가 되냐고 묻는다.

  다큐는 현실과 예술적 속임수의 불분명한 경계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로라 알버트와 시누이, 동거남 제프로 구성된 이 희한한 가족 사기단의 좋은 날은 2005년, '뉴욕 매거진'의 폭로 기사로 끝나버린다. 더는 역겨운 사기극을 볼 수 없었던 제프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로라 알버트는 'JT 르로이'의 이름으로 회사까지 차렸는데, 가명을 내세워 영화사와 계약한 일로 고소당했다. 소송은 거액의 합의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폭로 이후 잠시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로라는 자신의 글재주로 재기에 성공하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동안 잠적했던 'JT' 아니, 사반나는 나중에 공연 예술을 전공해서 행위 예술가가 되었다. 5년 동안 보여준 놀라운 연기력이 새로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로라 알버트는 대중을 기만한 사기꾼인가, 아니면 예술적 아바타를 내세워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작 활동을 한 작가인가? 'Author: The JT LeRoy Story'는 관객들에게 예술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하도록 만든다. 작가가 쓰는 소설은 현실을 모방하지만, 사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를 그린다. 로라 알버트는 자신이 써낸 소설처럼 자신의 또 다른 존재도 그렇게 만들어 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강변하는 이 뛰어난 연기자이자, 사기꾼이며, 작가인 여자의 이야기는 놀랄만큼 흥미롭다. 2018년,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JT LeRoy'가 개봉되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JT', 로라 던이 알버트를 연기했다. 영화는 혹평 속에 흥행에 참패했는데, 아마도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하는 이 다큐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저한 자료 조사, 독창적인 구성, 깊이있는 성찰까지 갖춘 이 다큐는 좋은 다큐가 무엇인지 스스로 입증한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JT'와 로라 알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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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겨울의 일이다. 우연히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가 EBS라디오에서 추리소설을 낭독해주는 것을 듣게 되었다.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의 초반부가 낭독되고 있었다. 배우 조희봉 씨의 낭독이 꽤 좋았다. 어찌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던지, 매일매일 그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한 며칠 듣고는,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지 인터넷으로 검색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와 손톱'의 리뷰들을 찾아 읽다가, 어느 글에서 멈추었다. 저자를 보니 '물만두'라는 닉네임을 쓰는 이였다.

  '물만두'... 무언가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그 닉네임을 쓰는 이는 내 서재 방명록에 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오래 전에도 내 블로그에는 누가 댓글을 남기는 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는 몇 안되는 방명록 글을 기억하고 있었다. 찾아보니, 2005년에 그가 남긴 방명록 글이 있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터넷에 댓글을 달고, 서로 친구 신청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퍼런색 화면의 PC통신 시절부터 인터넷에서 뭔가 댓글로 소통한 적은 거의 없다. '싸이월드'와 '아이러브스쿨'도 내겐 남의 일이었다. 그랬던 터라, 그 방명록에도 따로 답글을 달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자 소개 글을 읽다가, 나는 순간 멈칫했다. 책은 그의 유고집 '물만두의 추리책방'이었다. '물만두'라는 닉네임을 쓰는 홍윤 님은 추리 소설 리뷰의 대가였다. 젊은 시절부터 불치병으로 투병하던 그는 자신이 좋아하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했다. 바로 추리 소설을 읽고, 그것에 대한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쓴 글로 인터넷의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이 그에게는 삶의 낙이고 의미가 되었다. 그렇게 10년간 쓴 리뷰글이 1800편이 넘었다. 내가 읽은 글은 그가 쓴 리뷰를 엮은 책의 한 부분이었다. 라디오 낭독 추리 소설의 결말을 알아보려다 그렇게 오래 전 내 블로그의 방문자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남긴 방명록의 글에 답글을 남기기에는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인이 2010년에 세상을 떴으니, 벌써 10년도 더 지났다. 새삼, 나는 한 사람이 남긴 글과 그의 삶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글을 써냈다. 병마와 싸우는 시간 동안 글이 그에게 가졌을 의미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작년 가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 소설을 쓰기 위해 글쓰는 습관을 만들려 시작했던 수필이 이제는 영화 리뷰들로 채워지고 있다. 거의 매일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가끔은 모니터 앞에서 멍 때리는 시간이 오기도 한다. 도대체 이걸 왜 하고 있는 걸까?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막내 동생을 위해서 쓰고 있기는 하다. 막내는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해본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동생이 나에게 글을 계속 쓰는 것이 좋겠다고, 꼭 그랬으면 한다고 말했다. 막내는 내가 영화 공부를 하던 시절에 매달 용돈을 부쳐 주었다. 고흐의 편지글에서 내가 결코 잊지 못하는 귀절이 있다.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너에게 진 빚은 꼭 갚겠다."

  고흐는 그렇게 동생 테오에 대한 마음을 글로 남겼다. 물론 나는 고흐가 아니지만, 동생에게 진 마음의 빚은 여전히 갚지 못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영화 공부한 것이 뭐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었나 싶다. 나는 영화로 딴 학사 학위 절반은 막내 동생의 몫이려니,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배웠던 것을, 이제는 영화 리뷰 쓸 때나 조금 써먹을 뿐이다. 어쨌든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폴 오스터가 '빵 굽는 타자기'에서 했던 말도 그랬다. 트랙의 어느 지점에서든 시작을 해야 하며, 날마다 무언가를 써내려 간다는 것은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을 뜻한다고.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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