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의 일이다. 우연히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가 EBS라디오에서 추리소설을 낭독해주는 것을 듣게 되었다.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의 초반부가 낭독되고 있었다. 배우 조희봉 씨의 낭독이 꽤 좋았다. 어찌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던지, 매일매일 그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한 며칠 듣고는,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지 인터넷으로 검색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와 손톱'의 리뷰들을 찾아 읽다가, 어느 글에서 멈추었다. 저자를 보니 '물만두'라는 닉네임을 쓰는 이였다.

  '물만두'... 무언가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그 닉네임을 쓰는 이는 내 서재 방명록에 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오래 전에도 내 블로그에는 누가 댓글을 남기는 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는 몇 안되는 방명록 글을 기억하고 있었다. 찾아보니, 2005년에 그가 남긴 방명록 글이 있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터넷에 댓글을 달고, 서로 친구 신청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퍼런색 화면의 PC통신 시절부터 인터넷에서 뭔가 댓글로 소통한 적은 거의 없다. '싸이월드'와 '아이러브스쿨'도 내겐 남의 일이었다. 그랬던 터라, 그 방명록에도 따로 답글을 달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자 소개 글을 읽다가, 나는 순간 멈칫했다. 책은 그의 유고집 '물만두의 추리책방'이었다. '물만두'라는 닉네임을 쓰는 홍윤 님은 추리 소설 리뷰의 대가였다. 젊은 시절부터 불치병으로 투병하던 그는 자신이 좋아하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했다. 바로 추리 소설을 읽고, 그것에 대한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쓴 글로 인터넷의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이 그에게는 삶의 낙이고 의미가 되었다. 그렇게 10년간 쓴 리뷰글이 1800편이 넘었다. 내가 읽은 글은 그가 쓴 리뷰를 엮은 책의 한 부분이었다. 라디오 낭독 추리 소설의 결말을 알아보려다 그렇게 오래 전 내 블로그의 방문자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남긴 방명록의 글에 답글을 남기기에는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인이 2010년에 세상을 떴으니, 벌써 10년도 더 지났다. 새삼, 나는 한 사람이 남긴 글과 그의 삶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글을 써냈다. 병마와 싸우는 시간 동안 글이 그에게 가졌을 의미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작년 가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 소설을 쓰기 위해 글쓰는 습관을 만들려 시작했던 수필이 이제는 영화 리뷰들로 채워지고 있다. 거의 매일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가끔은 모니터 앞에서 멍 때리는 시간이 오기도 한다. 도대체 이걸 왜 하고 있는 걸까?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막내 동생을 위해서 쓰고 있기는 하다. 막내는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해본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동생이 나에게 글을 계속 쓰는 것이 좋겠다고, 꼭 그랬으면 한다고 말했다. 막내는 내가 영화 공부를 하던 시절에 매달 용돈을 부쳐 주었다. 고흐의 편지글에서 내가 결코 잊지 못하는 귀절이 있다.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너에게 진 빚은 꼭 갚겠다."

  고흐는 그렇게 동생 테오에 대한 마음을 글로 남겼다. 물론 나는 고흐가 아니지만, 동생에게 진 마음의 빚은 여전히 갚지 못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영화 공부한 것이 뭐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었나 싶다. 나는 영화로 딴 학사 학위 절반은 막내 동생의 몫이려니,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배웠던 것을, 이제는 영화 리뷰 쓸 때나 조금 써먹을 뿐이다. 어쨌든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폴 오스터가 '빵 굽는 타자기'에서 했던 말도 그랬다. 트랙의 어느 지점에서든 시작을 해야 하며, 날마다 무언가를 써내려 간다는 것은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을 뜻한다고.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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