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를 보기로 결정하는 것이 때론 도박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평점이나 리뷰도 괜찮은데 막상 보니 싱겁고 별 내용도 없는 시시한 영화인 경우, 뭔가 사기당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Blaxploitation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데, 1970년대의 정서를 잘 담았다는 평이 있어서 마이클 슐츠의 'Car Wash(1976)'를 보았다. 정말이지 처참한 영화였다. 화장실 유머와 개연성 없는 설정이 너절한 시나리오를 채우고 있었다. 이런 영화로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영화에 대해 누군가 한 말을 믿었어야 했다. '당신의 아이가 더럽게 말을 듣지 않을 때, 벌을 주려거든 이 영화를 보게 하십시오' 그랬다, 벌 받는 심정으로 영화를 끝까지 다 봤다. 그러고 나서 본 영화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데드 엔드(Dead End, 1937)'였다.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이름이 등장한다. 각본을 릴리언 헬만이 맡았다. 원작은 시드니 킹슬리의 브로드웨이 연극(1935)이다. 짜임새 있고 극적인 서사를 잘 써내려가는 헬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매카시즘에 맞서서 의회 증언을 거부한 공산주의자답게(헬만은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영화는 좌파주의적 시각으로 도배되어 있다. 사실 제작사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걱정했던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라 헤이스 코드(Hays code)에 따른 검열이었다. 영화는 등장인물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다.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Baby Face' 마틴은 악명높은 갱스터이지만 영화 내내 직접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틴이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예전 여자 친구 프랜은 '매춘부'인데, 거기에 대한 언급도 검열에 걸리기 때문에 분위기로만 제시된다. 이렇듯 이 영화는 수수께끼 풀어가듯 막연한 암시들을 하나하나 짜맞추면서 보아야 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검열에 통과했음'이라고 자랑스럽게 자막이 나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촬영을 누가 했는가 하면 그레그 톨랜드가 했다. 그렇다.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의 그 위대한 촬영 감독이다. 톨랜드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촬영은 그야말로 눈을 정화시키는 느낌이다. 빛과 어둠을 명징하게 조화시키는 톨랜드의 촬영은 예술로서의 영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처음과 마지막 장면이 일종의 수미쌍관을 이룬다. 뉴욕의 화려한 고층 건물에서부터 수직으로 하강하는 크레인 쇼트는 East River의 빈민가에서 멈춘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 반대로 빈민가에서 화려한 빌딩이 보이는 공중으로 상승하는 쇼트이다. 톨랜드는 이 영화에서 크레인 쇼트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이런 쇼트들은 부자와 빈자, 고층 고급 주택과 더러운 슬럼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뉴욕의 퀸즈보로 다리 근처의 빈민가, 그곳은 강이 보이는 좋은 전망 때문에 부유한 이들의 고급 고층 주택과 맞닿아 있다. 그 거리의 아이들은 미래 갱단의 후보자들이다. 폭력과 욕설이 일상인 아이들 무리의 리더 토미는 누나 드리나와 살고 있다. 드리나는 빈민가의 좋지 않은 환경에서 동생과 벗어나려 애를 쓰지만, 경제 공황의 무거운 그늘 속에서는 하루하루가 버거울 뿐이다. 역시 그곳의 주민인 데이브도 불경기에 간판 그림을 그리며 연명하고 있는데, 그는 바로 코앞의 고급 주택에 사는 케이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 그곳에 낯선 남자 두 명이 나타난다. 데이브는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던 마틴을 기억해낸다. '베이비 페이스'란 별칭으로 불리는 그는 어머니와 여자친구를 만나러 그곳에 왔다. 그러나 마틴의 어머니는 보고 싶지 않다며 저주를 퍼붓고, 여자친구는 병든 매춘부로 나타난다. 마틴은 상심하고, 떠나기 전에 부잣집 아이를 납치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그 와중에 토미는 아이들과 함께 부잣집 아이의 옷을 빼앗고 때린다. 아이의 아버지가 나서서 토미를 경찰에 고발하면서 일은 커져가는데...

  빈민가와 바로 인접한 고급 주택이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겠지만, '데드 엔드'에서는 그것을 거대하고 정교한 세트로 구현해 낸다. 멋진 외관의 주택 출입구는 바로 슬럼가와 마주하고 있으며, 그곳의 출입구는 더운 여름인데도 긴팔의 정장 외투를 걸친 경비원이 지킨다. 개인 풀장이 있는 집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부잣집 아이는 칼쓰는 법에 익숙해진 더러운 빈민가 아이들과 대비된다. 생계를 이어가느라 허덕이는 데이브와 드리나의 삶과는 달리, 주택 테라스에서는 파티가 한창이다. 헬만은 아이들의 대사를 통해 경제 공황 시기에도 흥청망청 먹고 노는 부자들을 비판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그것은 삶의 여건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도 판이하게 가른다. 토미를 비롯해 그곳 아이들의 모습은 갱스터 마틴의 어린 시절을 연상하게 만든다. 마틴이 마주하는 비극적 현실은 이미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의 거리에서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무도하기 짝이 없으며, 범죄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서있다.

  그나마 나쁜 길에 빠지지 않고 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드리나와 데이브의 현실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다. 데이브는 고급 주택에 살고 있는 케이를 연모하지만, 케이는 데이브가 사는 곳에 갔다가 불결하고 비좁은 주거 환경에 경악한다. 헬만은 계급적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설정한다. 결국 데이브는 케이를 떠난다. 대신 그는 토미의 일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드리나 곁에 머물기로 한다. 가난한 자들의 연대, 마치 헬만은 그것만이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헬만의 이러한 좌파주의적 시각은 영화가 만들어진 1930년대 미국의 시대적 상황과 강하게 공명한다. '데드 엔드'는 존 포드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40)'의 대도시 뉴욕 버전 같다. 영화에 깔린 노골적인 좌파주의에 불편해할 관객들도 있겠지만, '경제 공황'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 볼 때 그것이 결코 과한 것만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빈곤에 시달렸으며,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드리나의 직업은 나오지 않지만, 드리나는 파업(picketing)하다 경찰의 곤봉에 맞았다며 이마에 난 상처를 보여준다. 

  마틴이 맞는 비극적 최후는 아마도 그 거리의 삶이 보여주는 최악의 경우일 것이다. 그럼에도 '데드 엔드'는 희미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드리나와 데이브는 경찰에 끌려가는 토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들이 슬럼가의 삶에서 벗어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함께 견디어낼 수 있다면 무거운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거리의 끝에서 그렇게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간다.



*사진 출처: tcm.com



**다음 글은 수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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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류하는 마을(Floating Village Asylum, 2020)

  태국과 미얀마 국경 사이에 위치한 수상 가옥촌에는 미얀마 난민들이 산다. 오랜 군부 독재와 여러 종족들 사이의 분쟁을 피해 태국으로 피신한 미얀마인들은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 보다 시급한 것이 있다. 모두 무국적자 신분인 그들은 아이들만이라도 나은 미래를 찾기를 바란다. 프리차 스리수완 감독은 4년의 시간을 두고 수상 가옥촌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물에 떠있는 난민들의 집처럼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금어기에도 생계를 위해 몰래 물고기를 잡다가 단속에 걸리는 일도 부지기수, 또한 남획으로 고갈되는 어족 자원은 소득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은 공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국적을 얻지 못하면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남자들은 태국인이 하지 않는 저임금의 고된 농장일을 하며 생존을 위해 애를 쓴다.

  "고생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진짜 고생이 뭔지 모르지."

  그들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다. 철모르고 마구 뛰어놀던 아이들은 다큐가 끝날 무렵에는 훌쩍 자라나 있다. 아이들은 마침내 태국 국적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희망의 시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딸에게 13살이 되면 큰 도시에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의 모습은 먹고 살아야 하는 삶의 냉엄한 명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미얀마인이 아닌 태국인으로, 태국 사회의 하부 구조를 이루는 구성원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큰 미래 세대 아이들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눈길을 끄는 특이한 장면 하나: 아이가 '뇌전증(간질)'으로 의심되는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이 있는데, 할머니가 아이에게 하는 주술 의식이 눈길을 끈다. 길다란 칼로 아이의 몸을 여러 번 쓸어내린다. 우리나라의 무속에서도 치병이나 잡귀를 내쫓을 때 그와 비슷한 방법을 쓴다. 동아시아권의 샤머니즘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 가운데 한 부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 링사이드(Ringside, 2019)

  시카고, 그 도시에서 특히 거친 곳으로도 유명한 사우스사이드에서 권투로 남다른 미래를 꿈꾸는 아이들이 있다. 독일 감독 안드레 회어만은 두 어린 소년 복서의 성장기를 8년에 걸쳐 기록한다. 케네스 주니어는 엄격한 코치인 아버지의 지도 아래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경력을 쌓아간다. 또 다른 유망주 데스틴 주니어는 놀라운 재능을 가졌으나 잘못된 범죄의 길에 들어서는 바람에 4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다. 다큐는 가난과 폭력이 지배하는 주변 환경 속에서 하층 계급의 흑인 소년이 복싱을 통해 어떻게 인생을 바꾸어가는지 영상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보여준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여러 번 다루어진 익숙한 주제이다. 이미 이전에 사회학자 로익 바캉(Loïc Wacquant)은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의 흑인 사회와 복싱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저서 'Body and Soul(2004)'로 내놓은 바 있다.

  케네스 주니어는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자신의 방이 있는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한다. 복싱에서 보여준 그의 가능성은 그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한다. 아버지 케네스는 자신의 훈련과 교육이 아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자부심을 피력한다. 전직 마약상인 또 다른 아버지 데스틴은 아들의 4년 옥바라지를 하며 재기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복싱 말고는 그들에게 다른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큐는 그들이 사는 사우스사이드가 어떤 곳인지 두 번의 장례식을 통해 보여준다. 체육관에서 훈련하고 나오다 총에 맞아 죽은 흑인 복서들은 사우스사이드에 만연한 폭력이 어떤 것인가 입증한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링사이드'는 시카고 빈민가 복싱 클럽을 통해 인종과 빈곤, 스포츠가 가지는 의미를 성찰하게 만든다.
 

3. 요양원 비밀요원(The Mole Agent, 2020)

  비밀 임무를 띄고 요양원에 잠입한 스파이가 있다. 그의 나이는 무려 83세. 세르지오 할아버지는 탐정 사무소의 구인 광고를 보고 갔다가 면접에 합격한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요양원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딸의 의문을 해소해 주는 일이다. 여느 입소자들처럼 들어간 그는 요양원 할머니들을 관찰해서 매일 탐정 로물로에서 보고한다. 이 특별한 비밀 요원은 타고난 친화력과 이해심, 분별력으로 곧 요양원 할머니들의 좋은 친구가 된다.

  세르지오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할머니들이 대부분 가족들의 외면으로 외로움과 슬픔 속에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매일 엄마를 애타게 찾는 치매 할머니,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우는 할머니, 자신이 지은 아름다운 시를 읽어주는 할머니, 세르지오에게 남자 친구가 되어줄 수 있냐고 정중하게 묻는 할머니... 다큐는 젊은 세대들에게 아직 가보지 않은 노년의 풍경을 비감하지만, 나름의 따뜻함이 있는 수채화 풍경처럼 펼쳐놓는다. 무엇보다 비밀 요원 세르지오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인간적 매력은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타인에 대한 남다른 배려심과 존중의 자세, 뛰어난 공감 능력, 분별력과 지혜는 좋은 노년이 무엇인가를 그 자체로 보여준다. 극영화적 설정을 도입한 이 독특한 다큐는 초반의 지루함을 견딜 수만 있다면 훈훈한 감동을 선사한다.


4. 그들이 부른 내 이름(They Call Me Babu, 2019)

  '바부(babu)'라고 불리던 여성들이 있었다. 다큐는 1940년대,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받던 시기에 네덜란드인들의 가정부로 일했던 여성들의 삶을 돌아본다.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을 '바부'라고 불렀다. 당시에 촬영된 자료 화면에 '알리마'라는 바부 여성의 삶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아들만 위하던 아버지로부터 엄마와 함께 떨어져 나와 살던 소녀 알리마는 네덜란드 가정의 보모로 들어간다. 알리마는 주인의 어린 아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보살피며 그들이 네덜란드로 잠시 이주했을 때 그곳까지 따라가서 노예의 삶을 살았다.

  다시 돌아온 고국에서의 삶,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격변을 거치면서 네덜란드인들은 물러나고 그 자리에 일본인들이 들어온다. 자료 화면 속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본어와 일본 노래를 부르는 인도네시아 아이들을 보면서 한국 관객들은 더 착잡한 심정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 일본의 폭압적 행태는 모든 식민지에서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다큐는 일본의 패망과 인도네시아 독립을 아우르는 역사적 사건까지 개관한다. 영화적 설정이기는 하나, 감독 산드라 베렌즈는 학술 연구와 함께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인도네시아 바부 여성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에 공을 들였다. 식민지 백인들의 노예로 살아야했던 하층민 바부 여성의 삶을 통해 관객들은 제국주의의 그늘을 돌아보게 된다.


**EIDF 2021에 대한 개인적인 총평:


  그다지 새로운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영화제였다. 나로서는 초창기의 참신하고 활기있었던 EIDF, 그 중간의 침체기를 떠올려 보면 그나마 중박은 쳤다는 느낌이다. EIDF는 이제 해외에서 화제가 된 신작 다큐들을 소개하는 대표적 통로로서는 안착했다. 하지만 과연 EIDF 자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프로그램이 뭐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든다.


  무엇보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전에는 페스티발 기간 동안 무료로 볼 수 있었던 D-BOX가 올해는 유료로 전환되었다. 공지에는 그 이유가 EBS '내부사정(이라고 읽고 돈 문제로 나는 해석한다)'이라고 되어 있다. 영화제의 수익성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공영방송의 다큐 영화제라는 취지에 걸맞게 영화제 기간 동안에는 무료 상영이 맞다고 본다. 재방송으로 관객들이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오직 유료의 D-BOX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상당한 아쉬움을 남긴다.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다큐 제작자들이 다양한 주제와 접근 방식으로 다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점은 좋았다.



***사진 출처: fotogramas.es  '요양원 비밀요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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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슈하드 동물원의 호랑이 '마야'는 출산 직후 3마리의 새끼 가운데 2마리를 죽였다. 부상을 입은 한 마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마야를 새끼 때부터 사육해왔던 조련사 모센은 왜 마야가 새끼들을 죽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세상이 새끼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마야를 촬영하던 감독의 말이었다. 잠시드 모자데디와 앤슨 하트포드의 다큐 '마야(Maya, 2020)'는 동물원 호랑이 마야를 통해 인간과 야생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란 북부 지방에 서식하던 카스피 호랑이들은 서식지 파괴와 사냥으로 멸종되었다. 동물원은 멸종된 카스피 호랑이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사육사 모센은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호랑이 마야와의 특별한 관계로 이란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맹수임에도 사람에 의해 길들여진 마야를 보기 위해 이란 전역에서 관람객들이 몰려들었고, 마야는 그야말로 마슈하드 동물원의 스타였다.

  모센만을 따르던 마야는 영화 촬영을 위해 카스피 연안 지역으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소련이 점령 당시 지어놓은 야생 사육장이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이란 왕실은 독일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영국과 소련 연합군은 그것에 불만을 품고 이란을 침공한다. 영국은 이란 남부를, 소련은 이란 북부에 주둔한다. 다큐에서 마야가 머물게 된 사육장은 바로 그 소련군이 지어놓은 곳이었다. 다큐는 카스피해 호랑이 멸종의 비극적 역사를 들려준다. 감독이 인터뷰한 그곳의 노인은 소련군들이 호랑이를 많이 잡아갔고, 주민들도 호랑이를 많이 사냥했다고 말한다.

  마야가 처음으로 동물원을 떠나 진짜 자연과 마주하게 되면서 모센과 마야의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비좁은 동물원의 우리에 있다가 드넓은 대지에 지어진 사육장에서 마야는 야생의 본성에 눈을 뜬다. 인근 마을의 말과 소떼를 쫓아가기도 하고, 숲속을 헤매기도 한다. 마침내 영화 촬영이 끝나고 동물원으로 돌아왔을 때의 마야는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그즈음, 동물원에는 불미스런 사건이 터진다. 개인 소유의 동물원이었던 그곳에서 호랑이 사체와 가죽을 불법적으로 판매했다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고발당한 동물원 소유주는 재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모센을 해고한다. 모센은 원래의 자신의 직업으로 돌아간다. 그는 실력이 좋은 '박제사'였다.

  2대째 동물원을 운영해온 소유주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모센 또한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관객들은 그들이 포장해서 보여준 동물에 대한 애정 뒤에는 더러운 돈과 추악한 비리가 있었음을 직감한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를 외치는 동물원 소유주와 모센의 모습은 탐욕으로 일그러져 있다. 마야의 출산은 그런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두 마리의 새끼를 죽인 마야의 심정에 대한 감독의 추측을 이 다큐를 본 이들이라면 모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마야는 평생 우리에 갇혀 사람들의 놀잇감으로 살아야하는 삶은 자신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카스피해에서 영화 촬영이 끝날 무렵, 마야가 회복한 야생성은 급기야 촬영을 하던 감독에게 덤벼들어 목에 상처를 내는 데에까지 이른다. 모센은 팔뚝의 이곳저곳에 난 상처와 흉터를 보여준다. 야생동물로서 마야의 공격성은 평소에도 그렇게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을 부인한 채 사람을 잘 따르고 친근하게 구는 호랑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길을 들인 이유는 오직 '돈벌이' 때문이었다. 박제사 모센이 마야에게 보여준 애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동물원을 떠난 그는 백화점에 코너를 임대해서 자신의 박제 박물관을 성대하게 개장한다.

  베르너 헤어초크가 '그리즐리 맨(Grizzly Man, 2005)에서 이미 보여준 바와 같이, 야생을 자신의 방식대로 길들일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은 비극을 초래한다. 인간이 야생 동물들의 삶을 존중하지 않고 거리를 두지 않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파국을 우리는 지금 겪고 있다. COVID-19 바이러스는 야생동물과 인간, 가축 산업의 무너진 경계선에서 발생했다. 감독은 살아남은 한 마리 새끼에게 마야의 젖을 물리기 위해 애를 쓰던 모센에게 묻는다. 마야에게 당신은 어떤 의미냐고. 모센은 아마도 공동 양육을 하는 남편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냐고 대답한다. 모센의 그 대답은 서늘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인간에게 길들여져서, 자신의 새끼 또한 인간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마야의 모습은 도돌이표 같은 의문을 낳는다. 인간은 자연에서 살아갈 수 없는 동물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마야'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생물 다양성(Biodiversity)의 최후의 수호자로서 인류에게 부여된 책무를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동물과의 더 나은 공존의 미래를 찾아가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일 것이다.



*사진 출처: mayafilm.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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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시절 제작된 영화들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고 환영받는 영화 장르는 코미디였다. 국가가 영화 산업을 총괄하는 소련 당국의 입장에서도 코미디는 수익률이 높은 장르였기 때문에 제작과 검열에서도 비교적 관대했다. 엘다 라쟈노프(Eldar Ryazanov) 감독은 코미디 영화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었다. '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1973)', 'Office Romance(1977)'는 그의 대표작으로 소련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라쟈노프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도 대부분 자신이 했다. 1966년작인 '차 조심!(Beware of the Car)'도 그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영화의 첫 부분, 어두운 밤, 서류 가방에 모자, 트렌치 코트를 입은 남자가 복잡한 계단을 오르내리며 조심스럽게 차고에 접근한다. 소련 느와르인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남자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전지적 시점의 이 해설자는 사건의 국면마다 설명을 덧붙이며 영화에 독특한 색채를 덧입힌다.

  겸손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자동자 보험 설계사 유리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는 고객들 가운데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의 차를 훔친다. 수사관 막심은 연이은 차량 도난 사건의 범인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난다. 연극을 좋아하는 유리와 막심은 지역 극장의 배우로도 활약하는데, 그들은 새로 상연될 '햄릿'을 함께 준비하고 있다. 차량 절도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들을 조사하던 막심은 유리가 범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연극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로서 막심은 유리를 체포하는 일을 주저한다. 범인과 경찰, 이 두 사람의 브로맨스는 어떻게 끝날까...

  사실 소련 코미디 영화가 빵빵 터지는 웃음을 주는 일은 별로 없다. 이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 느와르로 시작했던 영화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유리의 캐릭터는 정말로 특이한데, 차를 훔칠 때 보여주는 계획성과 명민함과는 달리 일상에서는 순진하고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준다. 라쟈노프 감독은 유리라는 인물을 '돈키호테와 미슈킨(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주인공), 로빈 후드'의 특성을 조합해 설정했다. 유리는 자신의 물욕 때문에 차를 훔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일을 한다. 그가 훔친 차의 고객들은 부정한 이득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이다. 백화점에서 외제 물건을 빼돌려 비싼 가격에 파는 소매상,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저지른 이들이 유리의 표적이다. 유리는 차를 팔아 그 돈을 고아원에 기부한다.    

  영화 '차 조심!'은 당시 소련 사회가 가진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공산주의 정권이라고 해서 부정부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 그것이 순박하고 착실한 유리가 차량 절도범으로 변모하는 이유이다. 어쨌든 '소련 영화 촬영 위원회(Goskino)'는 차량 절도범이 주인공인 이 영화에 난색을 표했다.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차량 절도를 모방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에 따라 인민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은 배격되었다. 라쟈노프는 시나리오를 수정해서 잡지에 실었고, 독자들의 반응이 좋자 비로소 영화로 만들 기회를 얻는다.

  이 영화를 본 어느 러시아의 관객은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비현실적인 내용이었고, 지금의 관객들은 더 이해못할 구식 영화라고 평했다. 일정부분, 그 관객의 말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영화 '차 조심!'은 여러 흥미로운 지점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값비싼 자동차'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주인공 유리는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훔치는 차들의 주인들은 '돈', 그것도 부정하게 축재하고 소비하는 비도덕적인 인물들로 제시된다. 백화점 소매상으로 나오는 디마(안드레이 미로노프 분, 그는 라쟈노프 영화의 단골 출연 배우이다)의 장인은 은퇴한 군 장교로 교외에 화려한 다챠(dacha, 교외 별장)를 짓는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사유재산을 전적으로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근로소득을 비롯해 개인 소유의 주택이 인정되었고, 상속도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디마는 재판정에서 소련의 법은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고 소리치며, 유리의 처벌을 요구한다. 물론 유리는 당연히 죗값을 치루는 것으로 나온다.

  '연극'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인 유리와 막심이 보여주는 연대의식 또한 눈길을 끈다. 막심은 유리의 체포영장을 찢어버리려고까지 한다. 그는 유리가 차를 훔치는 이유, 그리고 유리의 자선 행위에 감화를 받는다. 이 두 사람이 보여주는 우정은 극중극으로 공연되는 '햄릿'의 장면들과 함께 제시된다. 유리 역을 맡은 이노켄티 스목투노프스키(Innokenty Smoktunovsky)는 미묘하고 복합적인 캐릭터를 잘 소화해낸다. 라쟈노프는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다루면서도 코미디의 본질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는 밋밋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차 조심!'은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흐루시초프의 실각으로 '해빙기'는 끝나가고 있었지만, 영화 속 모스크바의 모습은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소련 영화 음악의 간판스타였던 안드레이 페트로프의 정겨운 음악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 소련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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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데뷔작 '로저와 나(Roger and Me, 1989)'는 여러모로 흥미있는 작품이다.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다 백수로 고향에 돌아온 무어는 GM(제너럴 모터스)의 공장 폐쇄와 인력 감축으로 고향 플린트가 경제적으로 몰락한 것을 보게 된다. 그는 GM의 최고 경영자 로저 스미스를 만나서 이야기라도 들어보자, 하고 카메라 하나 들고 길을 나선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다큐는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서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처럼 작용했다. 이전까지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를 중시했던 다큐멘터리 제작 경향은 무어가 보여준 참여적이고 적극적인 인터뷰, 영화적 재구성과 같은 방법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경멸적 의미로 'Moore Kids'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대의 다큐 제작자들이 비슷한 다큐들을 쏟아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모건 스펄록의 '슈퍼 사이즈 미(Super Size Me, 2004)'일 것이다.

  2021년 EIDF 상영작인 사카하라 아츠시 감독의 '옴 진리교: 지하철 사린 사건과 나(Me and the Cult Leader, 2020)'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이었다. 영문 제목도 '나와 사이비 교주'이며, 사카하라 감독은 마이클 무어가 '로저와 나'에서 썼던 야구 모자 비슷한 모자를 쓰고 나온다. 1995년, 일본 도쿄에서 옴 진리교의 지하철 독가스 테러 사건으로 13명이 사망하고 6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감독 사카하라 아츠시는 당시 그 지하철을 타고 있다가 사린 가스에 노출되어 회복할 수 없는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알레프(Aleph)로 이름을 바꾸고 여전히 활동 중인 옴 진리교의 실체에 접근해 보기로 결심한다. 2015년, 1년여의 노력 끝에 알레프의 중요 인사인 홍보 담당자 아라키와의 만남이 성사된다. 감독은 아라키와의 짧은 여행을 계획한다. 이 다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두 사람의 여행 기록을 담았다.

  천인공노할 테러를 저지른 종교 단체가 어떻게 이름을 바꾸고 여전히 신도를 끌어들이며 활동할 수 있는 것일까? 일본 정부는 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옴 진리교 단체를 감시해왔지만, 헌법에 명시된 '사상과 종교의 자유'는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으로 옴 진리교에도 해당된다. 사카하라 아츠시는 분노와 고통, 그리고 궁금증을 가지고 아라키와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우연의 일치로 그들은 같은 교토 출신으로 명문 교토 대학의 1년 선후배 사이였다. 그들의 고향 교토와 모교의 교정을 돌아 보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다큐에서 보여지는 사카하라 아츠시는 매우 활달하고 직설적인 인물이다. 그와는 달리 아라키는 내성적이며 거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카하라와 아라키는 같이 음악을 듣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기묘한 우정을 쌓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옹호하는 아라키를 보며 사카하라는 분노한다. 아라키에게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의 참회의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압박해가는 감독의 모습은 어떤 부분에서는 관객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아라키에게 과거의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테러 사건 1년 전에 출가(가족과 주변과의 연을 끊고 입회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아라키는 테러 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며, 단지 그의 잘못이 있다면 아직까지 잘못된 종교적 망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사카하라 감독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라키에게 사과를 요구한 이유는, 사과가 아라키의 내면적 각성을 이루고 아사하라의 망령에서 벗어나게 할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다큐에서도 엿볼 수 있듯, 감독은 완고하고 충실한 추종자인 아라키에게 연민과 우정의 감정을 갖고 있다. 사실 다큐는 '가해자/피해자'의 대립적 구도에 집중하기 보다는, 이들의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이비 교주'의 사악한 영향력을 통찰하게 만든다. 사카하라와 아라키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관객들은 그 두 사람의 순탄치 않았던 인생 역정을 듣게 된다. 사카하라는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아내될 사람이 옴 진리교 신자라는 고백을 듣는다. 결혼을 취소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 결혼은 1년 반만에 끝난다. 아라키는 어린 시절의 잦은 병치레, 극도로 예민하고 내성적인 성격,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탐구심을 가졌던 자신의 성장 과정을 들려준다. 교주 아사하라와의 만남은 아라키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어떤 면에서 아라키가 끈질기게 사카하라의 사과 요구를 거부하며 교주를 옹호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 전부가 부정당한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기에서부터 시작이었군요, 우리 두 사람은."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모교를 돌아보면서 교주 아사하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카하라는 리무진을 타고 교정에 들어온 아사하라에게 '날아봐, 날아보라구(아사하라는 공중부양 능력이 있다고 공언했다)!'고 외쳤던 일화를 들려준다. 그러자 아라키는 학교에서 교주를 만난 것은 그 1년 뒤였는데, 친구로부터 아사하라에게 날아보라고 소리질렀던 사람에 대해 들었다고 말한다. 아라키의 그 이야기를 듣고 사카하라는 기이한 인연의 시작을 되새겨본다.


  사카하라가 다큐를 찍은 것은 2015년이었지만, 편집 작업에는 5년이나 걸렸다. 과거의 상처와 마주하는 작업이 그토록 힘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제작사에서 추천한 와타나베 준코가 편집을 하게 되면서 다큐는 긴 기다림 끝에 관객과 만난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두 남자의 짧지만 내밀한 내적 여정이 잘 담겨진 데에는 편집의 공이 크다. 옴 진리교 교주와 테러의 핵심 관계자들의 사형이 이루어진 것은 2018년이었다. 사카하라 감독은 그 소식이 어느 정도는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했다. 아라키는 여전히 알레프에 몸담고 있으며, 사카하라 감독의 연락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한다. 'Me and the Cult Leader'는 그렇게 과거의 한 인물로 인해 인생의 비가역적인 변화를 겪은 두 남자의 현재를 고통스럽게 응시한다. 



*사진 출처: dbox.e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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