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을 잃은 여성: 밤의 여인들(夜の女たち, Women of the Night, 1948)

  전쟁은 전장터의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가혹하다. 미조구치 켄지(溝口健二)의 영화 '밤의 여인들(Women of the Night, 1948)'에는 전후 밑바닥 삶을 사는 여성이 그려진다. 그것은 별다른 상상의 여지없이 '매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후사코(타나카 키누요 분)는 전쟁에 끌려간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다. 아픈 어린 아들을 보살피는 데에 온 힘을 쏟는 후사코. 하지만 여자는 남편의 전사 소식에 이어 아이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후사코에게 호감을 가진 쿠리야마는 후사코를 비서로 채용한다. 한편 후사코는 전쟁통에 소식이 끊겼던 여동생 나츠코를 우연히 만난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후사코는 쿠리야마가 나츠코에게 흑심을 품고 접근했음을 알게 된다. 그 일로 쿠리야마를 떠난 후사코는 생계가 막막해지자 거리의 여자가 되는데...

  미조구치 켄지를 '시대극(時代劇,  じだいげき)'을 주로 만든 감독으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밤의 여자들'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흑백 필름으로 촬영된 이 강렬한 사회 고발 영화에는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neorealism)'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후사코는 패전의 후폭풍 속에 내던져진다. 남편과 아이의 죽음에 이어 가난은 이 여자를 옥죈다. 돈푼깨나 있는 후리야마의 내연녀에서 매춘 여성으로 급전직하하는 후사코의 삶. 추락하는 것은 후사코뿐만이 아니다. 댄스홀의 여급으로 살던 나츠코는 언니의 남자를 빼앗더니, 매독에 걸린 상태로 임신까지 하게 된다. 후사코의 어린 시누이 쿠미코는 가난한 집을 뛰쳐나왔다가, 건달에게 겁탈당한다. 이후에 쿠미코는 거리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올케 언니 후사코와 만난다. 미조구치 켄지는 세 여성들의 처절한 추락의 여정을 매우 건조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밤의 여인들'은 전쟁이 여성, 특히 하층 계급의 여성에게 미친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전사와 질병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를 겪은 가난한 여성들은 성을 파는 노동자가 된다. 그럼에도 미조구치 켄지는 영화 속 여성들의 선택을 사회구조적인 악순환의 틀에서 파악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으로 바라본다. 후사코는 자신과 여동생을 유린한 쿠리야마에 대한 원한을 간직하고 있다. 후사코가 그것을 되갚는 방식은 매우 자기파괴적이다. 거리의 여자가 되어 '세상의 남자들에게 성병을 퍼뜨리는 것'이다. 후사코의 여동생 나츠코의 도덕적 타락은 강간에 의한 자포자기의 결과로 비춰진다. 이는 매춘을 하게 된 쿠미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조구치 켄지는 이 영화에서 매춘 여성들의 삶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로 당시 일본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부각시킨다. 그럼에도 그가 그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온정적이지 않다. 매춘부들은 어디까지나 구제와 치유가 필요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타락한 내면에 대한 절실한 자기 반성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후사코는 쿠미코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울부짖는다. 과연 그들에게 돌아갈 진정한 집이 있는가? 애처롭게 부둥켜 안은 두 여자가 기댄 곳은 무너져 내린 성당의 외벽이다. 크레인 쇼트로 촬영된 이 장면에서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비춰진다. 성녀(聖女)와 창녀(娼女). 여성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인 접근은 미조구치 켄지를 결코 페미니스트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2. 몰락하는 유곽의 풍경: 수치의 거리(赤線地帯, Street of Shame, 1956)

  미조구치 켄지는 유작이 된 '수치의 거리(Street of Shame, 1956)'에서 다시 한번 매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영화가 개봉된 1956년은 이 영화의 일본어 제목 '적선지대(赤線地帯)'의 운명이 결정된 해였다. 전후 일본에 주둔하게 된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일본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 개혁 조치들 가운데 큰 부분이 바로 성 매매 산업이었다. 1946년에 공창제(公娼制)가 폐지된다. 그 이후에 기존의 사창가는 '적선 지대'라는 명칭으로 경찰 관할 구역이 된다. 그러던 것이 1956년에는 의회에서 성 매매 금지법이 통과되기에 이른다. 그 역사적 사건 직전에 개봉된 '수치의 거리'는 소멸 위기에 처한 유곽의 풍경을 담는다.

  '수치의 거리'에서 미조구치 켄지는 5명의 게이샤들을 내세워 각각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풀어낸다. 이는 매춘 여성의 삶을 거칠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그려낸 '밤의 여인들'과는 다소 차별화되는 점이다. 도쿄의 대표적인 적선지대 요시와라는 성 매매 금지법의 통과를 앞두고 혼란에 휩싸인다. 그곳에 자리한 '꿈의 나라'에는 5명의 게이샤들이 있다. 가장 잘 나가는 게이샤 야스미는 아버지의 보석금을 모으기 위해 애쓴다. 하나에는 어린 아기와 병든 남편을 건사하기 위해 고달픈 매춘의 삶을 이어간다. 중년의 요리에는 결혼할 남자가 있지만 빚 때문에 게이샤로 남아있다. 과부 유메코는 시골에 장성한 아들이 있다. 유메코는 아들이 언젠가 자신을 부양할 거라 믿으며 유곽에서의 삶을 견딘다. 제멋대로인 미키는 돈을 펑펑 써대며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영화는 5명의 게이샤들 못지않게 그들을 데리고 영업하는 '꿈의 나라'의 주인 내외가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들은 성 매매 금지법이 통과될까봐 전전긍긍한다. 안주인은 쓸모없는 일이라면 300년 동안 가업이 이어질 수 있었겠느냐며 경찰에게 항변한다. 그 남편인 사장은 자신들 덕분에 오갈 데 없는 게이샤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거라며 큰소리를 친다. 그들 내외가 꾸려나가는 '꿈의 나라'에는 착취와 사업의 이중적인 면모가 내재되어 있다. 이제 시대의 변화 속에 유구한 역사를 지닌 그들의 영업장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미조구치 켄지는 냉정한 관찰자로서 적선지대와 그곳의 사람들에게 호오(好惡)를 쉽사리 내비치지 않는다. 그가 성 매매 금지법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부분에 있어 감독 자신에게는 가슴 아픈 개인사가 있기는 하다.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한 미조구치 켄지는 누이가 게이샤로 팔려나가는 것을 목도해야만 했다. 그 또한 젊은 시절에는 여러 게이샤들과의 연애로 소란스럽게 보냈다. 빈곤과 매춘, 여성에 대한 감독 자신의 독특한 관점은 바로 그러한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는 유곽(遊廓)으로 대표되는 성 산업에 대한 비판 보다는, 그것이 작동하고 기능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인간의 욕망과 계급적 불평등이 내재해 있다. 미조구치 켄지는 성 매매 금지법이 그러한 현실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 게이샤들이 머무는 '꿈의 나라'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꿈을 바스러뜨리는 곳이다. 유메코는 아들로부터 연을 끊자는 말을 듣고 미쳐버린다. 결혼을 하기 위해 도망갔던 요리에는 노예처럼 일하는 삶을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돌아온다. 미키는 부잣집 딸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사창가에 내던진다. 하나에는 집세를 내지 못해 길바닥에 나앉을 남편과 아기를 두고 근심한다. 5명의 게이샤들 가운데 '꿈'을 이룬 이는 야스미 한 명뿐이다. 결혼을 핑계로 손님에게서 뜯어낸 엄청난 돈으로 야스미는 이불 가게를 차린다. 야스미의 그 꿈도 실은 손님이 횡령으로 마련한 부정한 돈에 의한 것이다.

  미쳐버린 유메코의 빈자리는 부모에 의해 팔린 시골 출신의 어린 게이샤로 메꿔진다. 희디흰 분칠에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가게 입구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신참 게이샤는 무얼 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가게 언니들이 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따라해볼 용기를 낸다. 문 기둥을 어색하게 잡고 거리를 지나가는 남자를 향해 작게 손짓을 한다. 웅얼거리는 입에서는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비감하고 서늘한 마지막 장면은 오랜 악습인 성 산업에 대한 통렬한 고발장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유작으로 남기고 미조구치 켄지는 세상을 떴다. 그리고 그 해에 의회에서는 마침내 성 매매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그것은 이전까지 국가가 묵인해주던 민간의 사업이 범죄 조직인 야쿠자들의 관할로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영화 '수치의 거리'에는 그 전환기의 암울한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criterion.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영화 '밤의 여인들'에서 주연을 맡은 타나카 키누요(가운데 인물). 배우 타나카 키누요(田中絹代)는 여성 감독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영화 '여자들만의 밤(女ばかりの夜, Girls of the Night, 1961)'은 매춘 여성의 재활 과정을 인본주의적인 시선으로 담아낸다. 어떤 면에서 그 영화는 미조구치 켄지의 '밤의 여인들'에 대한 타나카 키누요의 영화적 응답인 셈이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 타나카 키누요 주연의 영화

긴자 화장(Ginza Cosmetics, 195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ginza-cosmetics-1951.html

엄마(Mother, 195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mother-1952.html

흐르다(Flowing,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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