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루카스의 1973년작 영화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는 루카스가 첫 영화를 보기좋게 말아먹은 후 찍은 작품이었다. 영화가 제작된 시점에서 정확히 10년 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그야말로 초대박을 쳤다. 흥행수익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제작비 대비 180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American Graffiti'는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당시 미국인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베트남전의 패배에 뒤이어 오일 쇼크의 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루카스의 영화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잘 나가고 좋았던 시절, 1960년대를 추억하게 만들었다.

  Paul Thomas Anderson의 'Licorice Pizza(2021)'도 영화 '청춘 낙서'처럼 과거로 돌아간다. 그것도 무려 50년 전인 1973년이다. 루카스의 영화가 당시 청장년층들에게 소구했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2021년작 영화는 어떤 관객층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을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대적인 정서와 이야기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청춘이었던 이들의 나이는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에 들어선다. 분명 그들을 대상으로 만든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의외로 이 영화의 주 관객층은 20대와 30대 초반에 걸쳐 있었다. 지금 시대의 젊은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새삼 궁금해졌다. 자, 그렇다면 '감초 피자'는 어떤 영화인지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1973년, 15살 게리(쿠퍼 호프만 분)는 학교 졸업 사진을 담당하는 보조 사진가 알라나(알라나 하임 분)에게 마음을 뺏긴다. 대뜸 사귀자고 말하는 게리. 알라나에게 그 상황은 웃기지도 않는다. 뭐야, 이제 15살 짜리가 25살인 나에게 수작을 걸다니. 일단 퇴짜는 놓았는데 알라나의 마음은 흔들린다. 10살 차이가 나는 커플, 그것도 한 쪽은 미성년자이다. 이 영화가 생뚱맞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게리는 물침대 세일즈맨으로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15살 짜리가 사업을 한다고? 저게 말이 되나 싶어서 실소가 터져 나온다.

  'Licorice Pizza'에는 기상천외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 폭죽처럼 터진다. 게리는 살인범으로 몰려 갑자기 경찰에게 수갑이 채워져 끌려간다. 알라나는 배우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유명 배우(숀 펜 분)와 자리를 함께 하는데, 술 취한 그가 오토바이 타고 객기 부리는 통에 뒤에 앉았던 알라나가 나자빠진다. 물침대 배달하는 길에서 미친 인간 하나 잘못 태웠다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이 영화의 괴상한 유머 포인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뿐이리라.

  이 영화는 결코 1970년대를 잘 아는 이들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물론 영화는 철저한 시대 고증을 거쳤다. 영화 제목 'Licorice Pizza'는 1969년에 James Greenwood가 Long Beach에 문을 연 LA의 레코드 매장 체인에서 따왔다. 이 레코드 체인점은 1985년에 매각될 때까지 존속했다. 영화에서 게리가 사업 구상에 착수하는 우스꽝스러운 박람회는 실제로 1973년에 Hollywood Palladium에서 열렸던 '십 대 박람회(Teen-Age Fair)'였다. 게리와 알라나가 만나는 영화관은 El Portal 극장으로 1926년에 개관한 이곳은 아직도 영업 중이다. 게리의 엄마가 운영하는 사무실의 손님 제리는 일본식 레스토랑 'Mikado'를 여는데, 이 또한 실제 LA의 명소였다. 게리가 즐겨찾았던 'Tail O' Cock' 레스토랑도 1985년까지 영업하던 곳이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그렇게 1970년대 San Fernando Valley를 'Licorice Pizza'에 통째로 옮겨다 놓는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는 15살 게리와 25살 알라나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그 시공간을 선택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를 통과한 관객층에게 소구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청춘의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젊은 관객들을 불러 모은다. 게리는 엉뚱한 유머 감각을 가진 괴짜 십 대 사업가이며, 알라나는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 없는 불만족스러운 25살 아가씨이다. 이 둘이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는지. 그들은 서로에게서 무엇을 원하며 또 그 관계에서 어떻게 좌절하게 되는지. 연애하는 커플이라면 그러한 과정을 한 번쯤 겪는다. 'Licorice Pizza'는 청춘 로맨스를 낯선 시공간에 비틀린 방식으로 구겨서 집어 넣는다. 그것은 지금의 청춘 세대들에게는 호기심을 가지고 탐색을 하도록 만드는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의도는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영화의 수익은 제작비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대부분의 젊은 관객들은 궁금해서 집어든 '감초맛 피자'를 한 입 먹고 그냥 내던져 버린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랬다. 조지 루카스가 '청춘 낙서'에서 자신이 지나온 바로 직전의 시대를 보편적 감성으로 그려냈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특이한 이야기를 독창적인 것이라며 우긴다. '1970년대 미국'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걷어낸다 하더라도, 과연 영화 속 게리와 알라나의 사랑 이야기에 공감할 관객이 얼마나 될까?

  'Licorice Pizza'에는 현실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게리와 알라나가 보게 되는 TV 화면 속 당시 대통령 닉슨의 모습, 오일 쇼크로 주유소에 사람이 몰리는 장면을 비롯해 잘 재현된 1970년대 세트들은 별 의미도 없는 배경일 뿐이다. 제멋대로인 10대 청소년과 이도 저도 안되어서 좌절할 뿐인 20대 아가씨의 만남과 사랑 이야기에는 감독이 지인에게서 주워들은 일화들이 짜깁기 되어 있다. 아마도 이 영화의 유일한 미덕이라면 그 모든 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엮어낸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야기 솜씨일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 '감초맛 피자'를 맛보라고 권할 마음이 선뜻 나지 않는다. 분명 이 영화는 잘 만든, 좋은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이 요리해서 내놓은 'Licorice Pizza'에는 비주류적 감성의, 진짜 기이한 맛이 난다. 글쎄, 이걸 무슨 맛이라고 표현해야할까? '쇠의 맛', 독자 여러분은 '쇠맛'을 아는가? 커피맛에 극도로 예민한 이들은 스테인리스 보온병에 담는 것을 저어한다. 그 보온병에서는 '쇠맛'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질 수도 있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유리 보온병에 담는 것을 선호한다. 대체 '쇠맛'이 어떤 것이냐고요, 라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주 가끔은 나도 스테인리스 보온병에서 그 '쇠맛'을 느낄 때가 있다. 영화 'Licorice Pizza'에서는 쇠맛이 느껴진다. 그 맛이 궁금한 이라면 한 번 도전해 보아도 괜찮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조지 루카스의 영화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 197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american-graffiti-19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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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까지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여긴 좀 메스꺼운 냄새가 난다."
  (Never seen the sea before. It’s got a funny smell to it.)


  아이는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을 그렇게 말한다. 영국의 영화 제작자이며 교육자였던 존 크리쉬(John Krish, 1923-2016)의 단편 다큐 'They Took Us to the Sea(1961)'는 빈민가 아이들의 바닷가 소풍을 담는다. 다큐는 버밍엄(Birmingham)의 전형적인 하층민 주거지를 비춰주면서 시작한다. 아이들은 허물어진 건물이 있는 황량한 공터를 놀이터로 삼는다. 구태여 '가난'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행색에서는 그 단어가 빗물처럼 뚝뚝 흘러내린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어있는 옷, 흙먼지로 얼룩이 진 신발, 위축되고 생기 없는 얼굴 표정. 이 아이들에게 어느 날 자선 단체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말한다. 너희들을 바닷가에 데리고 갈 거란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버밍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안고 기차역에 모인 아이들에게 단체의 인솔 감독자들은 이름표를 달아준다. 기차에 올라탄 아이들은 창밖의 가족들과 짧은 이별 인사를 나눈다. 마침내 기차가 출발하고 그렇게 선물과도 같은 하루가 주어진다. 꼬마의 내레이션은 신나거나 흥분으로 가득차 있지 않다. 조심스럽고 담담하게 들린다. 아이들은 수줍음이 많고 쭈빗거린다. 농장과 소가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면서 간식도 먹는다. 조금은 긴장이 누그러지는 것 같다. 마침내 기차는 Weston-super-Mare의 바닷가에 도착한다.

  조금은 이상한, 메스꺼운 냄새가 나는 곳. 하지만 그곳은 곧 즐거운 추억을 선사하는 장소가 된다. 즐거운 식사 시간, 볼이 미어져라 음식을 입에 넣는다. 피시 앤드 칩스(fish and chips)에 여유있게 식초를 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먹음직스러운 푸딩도 나온다. 배를 채웠으면 구경을 해야겠지. 당나귀를 타고 바닷가를 산책하고, 모래성도 쌓는다. 롤러코스터와 전동차는 또 얼마나 재밌는가. 다시 배가 고파온다. 데리고 온 어른들은 아이스크림과 솜사탕을 사준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갈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 떠나는 아이들은 촬영하는 제작진을 향해 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힘차게 손을 흔든다.

  러닝타임 28분 가량의 이 다큐를 보는 것은 충만한 기쁨을 선사한다. 굳은 아이들의 얼굴이 조금씩 누그러지면서 순전한 즐거움으로 채워지는 것은 마치 마법과도 같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 그곳에서 보낸 짧은 시간은 아이들을 바꾸어 놓는다. 정말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소품이라고 나는 느꼈다. 하지만, 다큐의 제작자 존 크리쉬에게 이 작품은 꽤 무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 다큐에는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2014년, 'birminghammail.co.uk'는 아흔의 존 크리쉬를 인터뷰했다. 크리쉬에게 다큐를 의뢰한 곳은 영국의 자선 단체 'NSPCC(Nation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Children)'였다. 그곳에서는 재단의 기금 마련을 위해 후원자들에게 보여줄 영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TV로 보는 자선 단체 광고의 영화 버전인 셈이었다. 후원자들의 주머니에서 큰 돈이 나오게 하려면 가난한 아이들을 최대한 불쌍하고 비참하게 찍어야만 했다. 제작자 존 크리쉬의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고민을 하던 그는 단체에서 아이들의 바닷가 소풍을 기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걸 찍기로 했다. 'They Took Us to the Sea'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는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신경쓰지 말라고 부탁했고, 자신도 아이들에게 행복한 하루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아이들이 다 즐겁고 좋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고 크리쉬는 회고한다. 더러는 외톨이처럼 겉도는 아이도 있었고, 불안한 표정으로 헤매는 아이도 있었다. 짧은 바닷가 소풍이 끝나고, 아이들이 촬영팀에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면서도 크리쉬는 자신이 찍은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나중에 인화된 필름을 보았을 때 그는 비로소 감동을 느꼈다.

  크리쉬가 느꼈던 감동은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다큐는 아이들이 느꼈던 '순전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이 단편은 아마도 화려한 파티장에서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상영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이름은 단체의 요청에 따라 식별할 수 없도록 처리되었다. 그럼에도 아흔의 제작자는 아이들에 대한 마음의 부채감을 오랜 세월 동안 떨치지 못했다.

  다큐의 마지막 장면은 아이들이 사는 그 가난한 동네 풍경이다. 외롭게 집 벽돌담에 기댄 아이. 바다 한 번 보고 왔다고 무어 그리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 짧은 소풍을 아이들은 잊지 못하리라. 바닷가에서 느꼈던 흥분과 기쁨은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며,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크리쉬는 아이들이 떠난 텅 빈 선착장과 바닷가를 보여준다. 인생에서 좋은 순간은 짧고 강렬하다. 다시 외로움과 고단함으로 채워질 일상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선물처럼 기쁨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 다큐를 보는 이들은 빈민가 아이들의 한 나절 소풍에서 그렇게 인생의 한 단면을 마주하게 된다.  



*사진 출처: birminghammail.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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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무라이로 기억될 배우, 미후네 토시로
 


  "뭐랄까, 그는 바다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동료 여배우는 그를 그렇게 회고했다. Steven Okazaki의 2015년작 다큐 'Mifune: The Last Samurai'는 일본의 명배우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 1920-1997)의 영화 인생을 돌아본다. 어떤 사람을 '바다' 같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일까? 여배우는 로케이션 촬영할 때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미후네 토시로가 요리를 해주었던 이야기를 한다. 대스타이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소탈했던 한 인간, 배우로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했던 사람. '바다'라는 단어야말로 그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후네 토시로의 영화 인생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黒澤明, 1910-1998)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다큐는 영화를 구도자적인 엄격함으로 만들었던 한 감독의 이야기 또한 비중있게 다룬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배우들에게 매우 철저하고 치밀하게 연출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이들은 촬영 현장이 훈련소 같은 분위기였다고 말한다. 완벽주의자 감독의 지시를 따라가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그런 감독이 아무런 연출 지시를 하지 않는 유일한 배우가 바로 미후네 토시로였다.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미후네 토시로는 예술적 동반자였다.

  다큐는 일본 시대극을 대표하는 배우로서 미후네 토시로를 부각하면서 시작한다. 사무라이들이 나오는 시대극은 '찬바라(チャンバラ)'로 불린다. 그 단어는 칼들이 부딪히며 내는 '찬찬, 챙챙'하는 소리에서 따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Seven Samurai, 1954)''요짐보(Yojimbo, 1961)', 이나가키 히로시(稲垣浩) 감독의 '미야모토 무사시(Samurai I : Musashi Miyamoto, 1954) 같은 작품은 미후네 토시로를 사무라이의 원형적 캐릭터로 각인시켰다. 스티븐 오카자키는 그런 이유로 다큐의 제목을 '미후네: 마지막 사무라이'로 정했다. 확실히 이 배우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은 시대극으로 채워져 있다.

  시대극의 사무라이 연기는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더욱 치우치게 된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와의 협업 관계가 끝나고서부터였다. 'Red Beard(赤ひげ, 1965)', 그 작품은 두 사람이 함께 한 마지막 작품이었다. 무려 제작 기간이 2년이나 걸린 이 영화를 찍는 동안 미후네 토시로는 배역을 위해 수염을 깎지 않고 지내야만 했다. 다큐는 그 영화가 두 사람의 결별에 원인을 제공해 주었음을 내비친다. 수염 때문에 다른 영화 작업을 할 수 없었던 미후네 토시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

  아마도 '거미집의 성(Throne of Blood, 1957)'도 그 원인들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관객은 다큐에서 놀랍고도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미후네 토시로는 주군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영주 와시즈로 나온다. 와시즈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결투 장면에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궁사들에게 '진짜 화살'을 쏘도록 했다. 당시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는 이렇게 회고한다.

  "바로 옆으로 화살이 팍팍 꽂히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물론 미리 언질을 받기는 했죠. 위험할 거라는 걸 모두들 알고는 있었지만 누구 하나 반대 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가장 오금이 저렸을 사람은 바로 미후네 토시로였다. 그 장면에서 미후네 토시로의 얼굴은 자신에게 미친듯이 쏟아지는 화살을 바라보며 공포와 두려움으로 일그러진다. 그 진짜 화살을 쏘는 이들은 게다가 아마추어인 대학 양궁부 부원들이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에는 그 뒷이야기가 나와있다. 촬영이 끝나고 분을 이기지 못한 미후네 토시로는 술에 취해 산탄총을 들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집에 찾아가서 행패를 부렸다. '어이, 좀 나와보라구(こら! 出て来い)!' 영화의 그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면, 그렇게 악다구니를 쓸만도 하겠다 싶다.

  미후네 토시로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은인으로 여겼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하면서 그는 일본의 배우에서 세계적인 배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 하고 둘은 'Red Beard'를 끝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다큐는 그 이유에 대해 명확한 답을 들려주지는 않는다. 그들의 가족과 동료들의 증언은 매우 조심스럽게 들린다. 일본 영화사의 두 거목에 대한 언급이 꽤나 부담스럽기도 할 것이다. 심지어 미후네 토시로의 아들도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며 말을 아낀다. 1948년작 '술 취한 천사(Drunken Angel)'에서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미후네 토시로는 시대극에 치우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미국을 비롯해 해외에서의 영화 작업도 병행했다. 그런 그와는 달리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력은 쇠락해 갔다. 외국에서 그의 명성은 높아가고 있었지만, 정작 그는 일본에서 활동 기반을 잃은 상태였다. 그들에게 좋은 날은 다시 오지 않았다. 미후네 토시로는 그저 그런, 비슷한 시대극을 찍으며 연기 역량을 소모해 버렸다. 외국에서 제작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 또한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 다큐에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일본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들이 나온다. 'The Bad Sleep Well(1960)'에서 미후네 토시로와 공연했던 배우 카가와 교코(香川 京子)는 너무나도 곱게 나이든 얼굴로 나온다. 할머니 스크립터는 짱짱한 목소리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함께 했던 시간을 증언한다. 백발이 성성한 단신의 영감님은 아직도 찬바라 연기 지도를 하며 미후네 토시로와의 무술 연기를 떠올린다. 다큐는 일본 영화 속 마지막 사무라이로 기억될 한 배우의 인생을 돌아보며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조망도 빼놓지 않는다. 강제 징집되어 공군에 복무했던 미후네 토시로는 카미카제 대원들의 교관이었다. 미후네 토시로는 무고한 젊은이들을 사지로 떠나보냈던 참혹한 기억을 잊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그가 연기한 체제 반항적 이미지의 캐릭터들은 어쩌면 연기가 아니라 그의 내면적 본질과 맞닿아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미후네 토시로와 구로사와 아키라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미후네 토시로 주연의 영화 '신선조(新選組, Shinsengumi, 196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shinsengumi-1969.html


미후네 토시로가 단역으로 출연한 후기작 '윈터 킬(Winter Kills, 197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winter-kills-19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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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d Times(1975)
The Driver(1978)
The Warriors(1979)   
48 Hrs.(1982)
Last Man Standing(1996)



3. 여성: 월터 힐 영화의 하위 주체(subaltern)


  앞의 글에서 월터 힐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이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른바 '외로운 늑대'임을 언급했다. 그들은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에 별 다른 관심이 없거나, 그것을 갈구하더라도 결국 그 소망은 좌절된다. 그보다 더 안좋은 경우는 타자를 학대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다. 월터 힐의 영화들에서 특히 여성 캐릭터들이 일관되게 열등하고 부수적인 위치에 놓여있음을 보게 된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은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주변부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여성에 대해서는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48시간'에서 형사 잭(닉 놀테 분)의 여자 친구는 잭과 안정적 관계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잭은 그러한 요구를 회피한다. 여자 친구는 잭의 직업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지 못하며, 전화로 잭에게 투정이나 부릴 뿐이다. 'The Warriors'에서 지역 갱단 리더의 연인인 머시는 워리어스 갱단의 스완에게 마음을 뺏긴다. 머시는 스완의 애정을 갈망하지만, 스완은 그런 머시를 조심스럽게 밀어낸다. 스완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지 사랑이 아니다. 'The Driver'에서 이자벨 아자니가 연기한 '플레이어'는 좀 예외적인 경우이다. '드라이버'와 약간의 인간적 교감을 나누기는 하지만, 둘 사이에는 명백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플레이어가 드라이버에게 감정적으로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것이 플레이어를 드라이버의 조력자이면서 동등한 사업 파트너로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월터 힐의 영화에서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 'The Driver'에서 드라이버에게 일감을 소개해주는 커넥션(The Connection) 역의 여성은 거친 남성의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커넥션이 살해당하는 방식은 꽤 충격적이다. 살인범은 베개로 얼굴을 누르고 총을 쏜다. 여성의 얼굴은 지워지고, 목소리는 제거된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로서만 여성의 생존이 보장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스트 맨 스탠딩'에서 악당 도일이 집착하는 멕시코 여성 펠리나는 영어를 하지 못한다. 이 여자가 유일하게 말하고 믿는 대상은 '신'이다. 결국 펠리나는 스미스에 의해 구출되어 목숨을 건진다. 펠리나와는 달리 도일의 정부(情婦)로 스미스의 유혹에 넘어간 루시는 도일에 의해 귀가 잘린다. 자신의 일, 욕망, 목소리를 지닌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위협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안전을 위해 제거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덧붙여 '48시간'의 여성 캐릭터들에게 투사되는 관음증적 욕망은 매우 노골적이다. 성인 전용 클럽에서 무대 위 반라의 여성은 선정적인 춤을 춘다. 형사 잭은 살인범을 잡기 위해 감옥에서 범인의 동료 레지(에디 머피 분)를 잠시 빼내온다. 함께 임무를 완수한 레지가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돈을 줘서 레지가 원하는 대로 매춘부와 보내게 해준다. 그것은 인간미 넘치는 잭의 배려인가? 그도 그럴 것이 잭과 레지 사이에는 48시간 동안의 특수 임무 동안 기묘한 동지 의식이 생겼다. 미국 사회에서 하위 주체라고 할 수 있는 흑인 죄수 캐릭터가 결국은 백인 경찰과 연대하고 유대감을 쌓는 것. 그 또한 남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영화는 크게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월터 힐에게 감독으로서의 활로를 열어주었다.

 
4. 긴 여정의 시작, Red Harvest

  '라스트 맨 스탠딩'이 '요짐보'의 금주법 시대 버전임은 이미 기술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요짐보'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독자적 창작물인가? 그는 자신의 영화가 1942년작 필름 느와르 'The Glass Key(1942)'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대실 해밋(Dashiell Hammett)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갱단과 정치인이 얽힌 복마전과 같은 도시의 어둠을 그린다. 주인공 에드는 뒷골목 건달로 예기치 못한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 그는 살인 사건의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이 영화보다 '요짐보'의 원형을 제공하는 대실 해밋의 소설은 따로 있다. '붉은 수확(Red Harvest)', 1929년에 해밋이 발표한 첫 탐정소설이었다. 매우 건조하고 명료한 문체를 특징으로 하는 하드보일드(Hardboiled) 스타일이 무엇인지 이 소설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작업(지문을 지우는 일)을 반복했다. 죽은 여자의 옆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구부리고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얼음 송곳에 내 지문에 조금도 남아있지 않도록 꼼꼼히 닦아냈다. 유리잔들, 술병들, 방 안의 모든 문들, 전등 스위치, 내 손이 닿은 가구 전부, 어쩌면 닿았을 지도 모르는 모든 물건들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했다. 그런 다음에 손을 닦았다. 내 옷에 혹시 핏자국이 남아있지 않은지 살펴 보았다. 그 어떤 내 소지품도 그곳에 남아있으면 안되었다. 나는 현관문 앞에 섰다. 문을 연 다음 안쪽 손잡이를 닦고, 바깥쪽도 그렇게 했다. 마침내 나는 그 방에서 떠났다.' Red Harvest, 21장  
 
  In the dining room again, I knelt beside the dead girl and used my handkerchief to wipe the ice pick handle clean of any prints my fingers had left on it. I did the same to glasses, bottles, doors, light buttons, and the pieces of furniture I had touched, or was likely to have touched. Then I washed my hands, examined my clothes for blood, made sure I was leaving none of my property behind, and went to the front door. I opened it, wiped the inner knob, closed it behind me, wiped the outer knob, and went away.

  소설의 주인공은 콘티넨탈 탐정 사무소의 요원 Op(operative, 사립 탐정을 의미하는 속어), 그는 이름이 없는 인물로 나온다. 'Personville'이라는 도시에 의뢰인을 만나기 위해서 온 그는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의뢰인 도널드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널드의 부친 엘리후는 유력한 거물로 도시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엘리후는 Op에게 도시를 장악한 갱단들을 쓸어버릴 것을 요구하며 사건 해결을 일임한다. 퍼슨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Poisonville'로 부른다. 폭력과 범죄가 공기처럼 스며든 악의 도시,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Op는 더러운 도시를 청소할 수 있을까?

  '붉은 수확'에서 Op는 악인들과 대적하는 동안 그들과 같은 괴물이 되어간다. 거짓말, 협박, 사기. 그는 도시의 악덕을 체화하고 그 공기를 들이키며 포이즌빌의 사람이 되어간다. 갱단들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부패한 경찰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 만든다. 계속해서 시체가 쌓이는 동안 Op는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다. 그는 그 죽음들에 일말의 부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퍼슨빌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낸 정보원이며 조력자인 디나가 살해당했을 때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난 그가 디나의 시신을 발견한 후 한 일은 현장에서 자신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었다. 대실 해미트가 묘사한 그 부분의 문장들을 한 번 보라. 마치 칼로 잘라낸 것처럼 군더더기도 없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선과 악, 그 어느 편에 속하지 않는 회색지대에서 배회하는 '붉은 수확'의 Op는 냉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한다. 대실 해미트가 창조한 이 인물이야말로 이후 등장한 '고독한 늑대'의 원형(archetype)이 되었다.    

  '붉은 수확'의 Op는 영화 'The Glass Key'의 에드, 그리고 '요짐보'의 산주로가 된다.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월터 힐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물을 재창조했다. 'Hard Times'의 채니에서부터 '라스트 맨 스탠딩'의 스미스까지, 힐이 만든 캐릭터들에는 모두 컨티넨털 탐정 사무소 요원 Op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다시, 이 글의 시작을 열었던 영화 '라스트 맨 스탠딩'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는 처참한 흥행 실패를 기록했다. 이미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던 월터 힐의 경력은 급격한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이후 그가 찍은 영화들은 혹평을 받으며 관객들에게도 외면당했다. 말 그대로 '죄다 말아먹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라스트 맨 스탠딩'을 두 번 보았다. 분명 좋은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 왜 이 영화는 망했는가? 때로 어떤 실패한 영화는 그 원인을 복기하기 위해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과했다. 영화가 관객에게 매혹을 선사하는 지점은 현실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럴듯한 핍진성(逼眞性)이 생겨날 때이다. 그런데 '라스트 맨 스탠딩'은 그 지점을 넘어선다. 과도한 폭력, 과도한 클리셰(cliche), 심지어 음악과 사운드 마저도 과도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며, 관객은 곧 이 영화의 모든 것이 가짜라는 사실과 직면한다. 물론 우리가 보는 영화는 재현된 가공의 현실일 뿐이다. 그것이 진짜 현실이 아님에도, 관객은 언제나 진짜라고 믿고 싶어 한다. 월터 힐의 이 영화는 그 믿음을 철저히 배반한다.

  나에게 '라스트 맨 스탠딩'은 마치 잘못 탄 기차처럼 여겨졌다. 때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고 느낀다. 엉뚱한 목적지에 내려서 풍경을 바라보는 일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그곳에서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을 발견했고, 월터 힐이 자신의 영화 여정을 시작한 곳이 어디인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여정을 복기하면서 비슷한 길을 걸어간 다른 감독들도 알게 된다. 홍콩 느와르를 이끌었던 오우삼 영화의 미학은 월터 힐과 닮아있다. 세르지오 레오네, 마틴 스콜세즈, 스티븐 스필버그, 코엔 형제, 그리고 타란티노까지 그들은 하나의 강에서 흘러나온 지류들이다. 월터 힐은 자신만의 감각으로 폭력과 고독의 서사를 써내려 갔다. 그의 영화적 지류를 탐험해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Red Harvest(1929)' 초판본 표지



**월터 힐의 영화 'The Driver(197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1970.html


***다큐멘터리 'Mifune: The Last Samurai(2015)'는 영화 'Yojimbo(1961)'의 배우 미후네 토시로의 영화 인생을 돌아본다. 일본 영화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다큐는 documentarymania.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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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d Times(1975)
The Driver(1978)
The Warriors(1979)   
48 Hrs.(1982)
Last Man Standing(1996)



1. 월터 힐의 영화 속 방랑자들

 
남자는 황량한 사막을 가로지르며 차를 운전 중이다. 낮게 깔리는 남자의 내레이션이 이 영화가 그의 시점에서 진행될 것임을 알려준다. 운전을 하며 술을 들이키다 내린 그는 술병을 땅바닥에 놓고 돌려 본다. 술병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다시 차를 모는 남자. 그렇게 존 스미스(브루스 윌리스 분)는 멕시코 국경 근처 제리코 마을에 도착한다. 그런데 어째 이 마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한 무리의 갱단원들이 몰려와서 스미스의 차를 망가뜨린다. 근처 술집으로 들어간 그는 술집 주인으로부터 대강 이 마을의 돌아가는 꼬라지를 알게 된다. 밀주업을 하는 두 개의 갱단이 서로 물어뜯으면서 마을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 보통 사람 같으면 오금이 저려서 떠나련만 스미스는 자신의 차를 망가뜨린 갱단의 사무실을 찾아간다. 존 스미스, 그는 제리코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Last Man Standing(1996)'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Yojimbo, 1961)'에서 거의 대부분의 설정을 따왔다. '요짐보'에서 미후네 토시로가 연기한 낭인(浪人, ろうにん) 산주로는 긴 막대기로 자신의 갈 길을 정한다. 그렇게 도착한 마을의 초입에서 그는 비쩍 마른 개가 사람의 손목을 들고 있는 것을 본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 월터 힐은 산주로의 막대기를 스미스의 술병으로, 개는 백마의 사체로 대체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한 월터 힐의 경배에 가까운 모방은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다. 'The Warriors(1979)'에서 워리어스 갱단의 스완이 자신의 적대자와 대결할 때, 그는 총을 든 상대방의 손목에 단검을 던진다. 이 장면 역시 '요짐보'의 마지막 결투 장면에서 차용한 것이다. '48시간(48 Hrs.,1982)에서 형사 잭(닉 놀테 분)은 흉악범에게 자신의 총을 뺏긴다. 이 설정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Stray Dog(1949)'에서 신참 형사(미후네 토시로 분)가 소매치기에게 총을 빼앗기고 고전하는 것에서 따왔다.

  월터 힐의 영화들을 보다 보면 그가 헐리우드 필름 느와르와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일본 시대극(時代劇,  じだいげき)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온갖 불의와 악이 횡행하는 세상을 홀로 떠도는 인물. '요짐보'의 떠돌이 무사는 'The Driver(1978)'의 '드라이버(이 영화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로, 'Hard Times(1975)'에서는 대공황 시대 길거리 복서 '채니(찰슨 브론슨 분)'가 된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거나 악인과 응징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월터 힐이 창조해낸 세계의 '고독한 늑대(Lone Wolf)'들은 오직 자신의 생존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들이 외부 세계의 타자와 관여하는 경우는 아주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사소한 감정적 유대가 얽혔을 때이다.

  'Hard Times'의 가난한 막노동꾼 채니는 그저 여비나 벌려고 길거리 복서로 나선다. 그런데 그의 매니저가 된 스피드는 허랑방탕한 인물로 도박빚 때문에 채니를 갱단에 넘기려 한다. 분노한 채니는 떠나려 하지만, 스피드가 갱단의 손에 죽을 위험에 처하자 마음을 바꾼다. '라스트 맨 스탠딩'의 스미스는 또 어떤가?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 구하려고 목숨을 내건다. 그들의 관심사는 돈도, 정의도 아니다. '요짐보'에서 산주로가 마을 악당에게 유린당한 불쌍한 아낙네를 구하기 위해 결투에 나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악의 구렁텅이 같은 세계, 고독한 방랑자. 법과 정의는 너무나 먼 곳에 있다. 믿을 것이라고는 자신 뿐이다. 'Hard Times'의 채니는 강한 맨주먹, 'The Driver'는 신기에 가까운 운전 솜씨, '라스트 맨 스탠딩'의 스미스는 자신의 총을 가지고 불의한 타자, 세상과 맞선다. 월터 힐은 자신이 만든 모든 영화는 '서부극'이라고 말한 바 있다. 대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Hard Times', 현대 대도시의 밤 풍경 속에 펼쳐지는 'The Driver', 금주법 시대의 '라스트 맨 스탠딩', 그 영화들의 주인공은 결국은 서부 시대의 방랑자들인 셈이다. 남북 전쟁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전설적 강도 제시 제임스가 나오는 'The Long Riders(1980)'야말로 힐의 진짜 서부극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월터 힐의 영화들 속의 방랑자 캐릭터들은 모두 방향성과 목적성을 상실했다. '라스트 맨 스탠딩'의 스미스는 무지막지한 피의 결투를 치룬 후, 악당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인 마을에서 최후의 1인이 된다. 그의 차가 지평선을 향해 가며 작은 점이 되듯, 스미스도 사라진다. 악당들이 죽어도 세상은 결코 변한 것이 없으며, 스미스는 황량한 풍경 속의 소실점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Hard Times'의 채니는 자신의 싸움에 판돈을 모두 걸어서 딴 돈을 스피드에게 던져 주고 떠난다. 'The Driver'의 드라이버는 받기로 한 돈을 사기당해 한 푼도 건지지 못한다. 그러한 필연적 소멸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에게 유랑은 그 자체로 삶이 된다.    


2. 반영웅의 서사와 결합한 폭력의 미학

  그렇다면 월터 힐의 영화는 사회 구조와 체제에 철저히 무관심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The Warriors'는 그에 대한 답을 제공해 준다. 솔 유릭(Sol Yurick)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The Warriors'에서는 뉴욕시를 배경으로 도시의 지하 세계를 장악한 청년 갱단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솔 유릭은 뉴욕시 복지 담당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10대 비행 청소년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접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65년에 발표한 소설이 'The Warriors'였다. 10대 청소년 갱단은 영화 속에서 20대 청년들로 바뀌었고, 폭력과 성에 대한 과도한 묘사도 수위가 낮춰졌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을 극단적으로 그려낸다. 지하철 화장실에서 갱단들끼리 맞붙은 싸움에는 야구 방망이에 뼈와 살이 쉴 새 없이 으스러진다.

  힐은 이 폭력의 서사에 불평등한 체제와 계급 갈등을 슬며시 끼워 넣는다. 워리어스 갱단원 스완은 자신을 따라온 빈민가 소녀 머시와 지하철에 탔다가 잘 차려입은 같은 또래와 마주친다. 아마도 흥청거리는 파티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그들은 스완과 머시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본다. 서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본질적으로 분리된 두 계층의 젊은이들은 심야 지하철에서 조우한다. 그들이 내리면서 떨어뜨린 꽃을 스완은 주워서 머시에게 건넨다. 그 장면은 'The Warriors'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프게 느껴진다. 월터 힐은 구조적인 빈곤 속에서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하층민 계급의 젊은이들에 대한 연민과 위로를 보여준다.

  체제에 대한 비판은 'The Long Riders'에서 다소 퇴행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강조된다. 재건 시대가 끝난 후, 남부는 북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조금씩 자신들의 이전 세계와 가치관을 복구해 나가기 시작한다. 제시 제임스(Jesse James)는 그 힘의 공백기를 휘젓고 다닌 악당이었다. 그는 남북 전쟁 이전에는 노예제 반대주의자들을 응징하는 잔혹한 민병대 부대에 몸담았다. 뼛속 깊이 남부인이었던 제임스는 자신의 강도 행각을 남부의 정치적 입장과 결부시켰다. 그는 남부인들에게는 패배한 전쟁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는 영웅으로 떠받들여졌다. 물론 연방정부 입장에서는 제거해야할 범죄자들이었다.

  월터 힐은 제시 제임스 갱단의 범죄 행각을 반영웅의 서사로 그려낸다. 무고한 인명을 뺏지 않으며, 서로 끈끈한 의리로 맺어진 의적 집단. 갱단이 은행과 열차를 무차별적으로 습격하는 장면은 반복적인 슬로 모션으로 재현된다. 그들이 입고 있는 긴 외투는 실질적으로는 불편한 것이 분명하지만, 질주하는 말 위에서는 너무나도 멋지게 휘날리며 인위적으로 의적의 이미지를 덧칠한다. 그들과 대립하는 핑커톤 탐정 사무소의 행각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부각된다. 사무소 직원들이 제임스의 본가에 불을 질러 어린 막내 동생을 죽게 만들었을 때, 갱단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위치에 놓인다. 이 전복적 대립의 구도는 갱단이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시대의 불운으로 돌리며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퇴행적이다.

  "만약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우린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겠죠."
  (If it weren't for the war, we might have been something else.)


  남북 전쟁이 자신들을 강도로 만들었다는 이러한 자의식은 남부인의 상처받은 자존감과 북부에 대한 반감을 내포한다. 영화는 무자비한 갱단의 강도 행각을 낭만적 남부 의적단의 신화로 은밀하게 포장한다. 이것은 프랭크가 형제 제시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루기 위해 자수를 하는 결말로 완성된다. 비극적인 막내 동생의 죽음에 이어 동료의 배신으로 인한 최후. 박해받는 반영웅의 서사에서 시대와 정치의 희생양이라는 그럴듯한 도금칠은 극대화된 폭력의 미학과 단단히 결합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월터 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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