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19세기 미국 서부에는 Gold rush뿐만 아니라 Silver Rush도 있었다. 1859년, 'Comstock Lode'로 불리는 은광맥이 네바다주 버지니아 시티에서 발견되었다. 아주 짧은 기간 융성했던 골드 러시의 끝물에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인생역전을 꿈꾸며 네바다로 몰려들었다. 엄청나게 몰려든 사람들로 네바다에는 여러 광산 도시들이 생겨났다. 열기는 18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잦아들었다. 광맥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이제 네바다 사람들은 광산업이 아닌 목축업으로 전향해서 삶의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영화 '옥스 보우 사건'은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원작자 Walter Van Tilburg Clark(1909-1971)는 네바다에 위치한 가상의 마을 Bridger's Wells에서 일어난 린치 사건을 그려낸다. William Wellman 감독은 이 소설을 무척 좋아해서 영화까지 만들게 되었다. 

  1885년, 겨울에서 이제 막 봄으로 넘어갈 무렵의 네바다 시골 마을 Bridger's Wells. 친구 사이인 방랑자 카우보이 길 카터(헨리 폰다 분)와 아트 크로프트는 마을에 도착해 선술집을 찾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은 최근 소도둑들의 출몰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길과 카터는 외부인인 자신들이 괜한 의심을 받을까봐 저어한다. 그런 가운데 마을에서 존경받는 목장주 킨케이드의 살해 소식이 술집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소도둑들의 소행이라고 여긴 마을 사람들은 보안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급하게 자경단을 꾸린다. 길과 카터는 마을 사람들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경단에 합류한다. 자경단은 마을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옥스 보우(소의 목에 거는 멍에와 닮은 구릉 지대에 붙인 이름)에 도착한다. 그들은 곧 그곳에서 도둑 패거리로 의심되는 세 명의 남자를 보게 된다. 자경단을 이끄는 목장주 테틀리는 그 세 명이 범인이니 교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영화 속 마을 자경단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캐릭터는 '마 그리어(Ma Grier)'로 불리는 여성이다. 나이든 여장부처럼 보이는 마는 거친 말투에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낸다. 원작 소설에서도 마 그리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다. '키가 작고 뚱뚱하고 못생긴' 이 여자를 마을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 모두가 다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한마디로 비호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이 캐릭터를 작가는 자신이 실제로 시골 선술집에서 본 인물을 떠올리며 만들어 냈다. 그런 마 그리어의 모습은 이 여성이 거친 서부의 삶에서 자신의 성 역할(gender role)을 지배적 남성성으로 대체했음을 보여준다.

  이 황량한 서부의 마을에는 젊은 여자들이 없다. 길은 전 여자친구 로즈 메이펀을 찾아 마을에 왔다. 그런데 그는 로즈가 마을의 나이든 기혼 여성들에게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술집 주인은 이 마을에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은 82세의 장님과 인디언 뿐이라고 말한다. 로즈와 같은 젊은 여성은 서부를 떠나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 옥스 보우로 가는 도중에 길은 도시 남자와 결혼한 로즈와 마주친다. 독하고 늙은, 자신의 여성성을 힘을 휘두르는 남성성으로 대체한 마 그리어 같은 여성만이 그곳의 삶에 적합하다. 마 그리어는 테틀리가 주도한 린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이런 마 그리어와는 대립되는 지점에 전복된 젠더 역할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또 있다. 테틀리의 아들 제랄드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자경단을 따라나선다. 테틀리는 유약한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터였다. 소설에서 제랄드는 여자 아이 같다고 묘사된다. 그런 제랄드에게 테틀리는 남자다움을 강조하고 그것을 습득하도록 밀어붙인다. 어떤 면에서 테틀리에게 이 자경단의 여정은 아들을 그가 생각하는 '진짜 남자'로 만드는 훈육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는 아들에게 린치의 실행을 지시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과연 마을 자경단에 의해 교수형 당할 위기에 처한 세 명의 남자들은 정말로 목장주 킨케이드를 죽이고 그의 소를 훔쳤을까? 그들을 둘러싼 정황 증거들은 매우 불리하다. 젊은 남자 마틴은 킨케이드로부터 샀다는 소들에 대한 매매 영수증이 없다. 멕시코인 후안이 숨기고 있었던 총은 킨케이드의 것으로 판명된다. 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힘없는 영감은 강도로 몰린다. 세 남자에 대한 심문을 주도한 테틀리는 정의의 실현를 내세우며 린치를 결정한다. 길은 그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당하지 못하다고 느낀 그는 테틀리에게 반기를 들지만, 곧 다른 자경단원들에게 총을 빼앗기고 제압당한다.

  길이 강력한 항의로 테틀리의 자의적 정의에 반대를 표시했다면, 침착하고 온화한 주민 데이비스는 유화적 방식으로 린치를 저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틴이 아내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를 자경단원들에게 읽어줌으로써 마틴이 진실된 사람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마틴은 그런 데이비스의 시도를 자신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하고 비겁한 행동이라고 여긴다. 편지를 먼저 읽어본 데이비스는 마틴이 무죄임을 직감한다. 그럼에도 직접적으로 테틀리와 일행을 저지하는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마틴은 데이비스를 이렇게 비난한다.

  "I thought there was one white man among you. But I was wrong."
  (나는 당신들 가운데 제정신 박힌 올바른 사람이 있는 줄 알았지. 근데 내 생각이 틀렸어.)

 
이 문장에서 'white man'은 온전한 양심을 가진 선인을 의미한다. 분명 데이비스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그런 그에게는 용기가 결여되어 있다. 린치를 막기 위해 데이비스가 취하는 소극적 행동들은 유약한 남성성을 보여준다.

  결국 세 남자는 죽음에 이른다. 돌아오는 길에 자경단원들은 보안관과 함께 있는 킨케이드를 본다. 킨케이드는 살아있었다. 마을로 돌아온 테틀리는 제랄드의 비난을 들은 직후,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테틀리의 최후는 영화와 소설이 동일하지만, 테틀리가 선택한 죽음의 의미는 그 결이 서로 좀 다르다. 소설에서 테틀리는 아들 제랄드의 자살 소식을 듣고 자신도 곧 그 뒤를 따른다. 테틀리의 자살은 제랄드가 자신이 바라는 남자가 되지 못했다는 점, 아들을 위해 시도했던 모든 것이 실패였음을 자인하는 데에서 오는 절망이다. 이는 자신이 주도한 잘못된 린치에 대한 부채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테틀리 부자(父子)에게 닥친 비극은 테틀리의 독단적이고 파괴적인 남성성이 가져온 귀결이다. 

  작가 Walter Van Tilburg Clark는 득세하고 있는 나치 세력을 보며 이 소설을 썼다. 그가 보기에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폭력에 유럽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그 거대한 불의와 폭력에 맞설 것인지 작가는 고민했다. 데이비스의 유화적인 방식(소설 속에서 데이비스는 총을 가져가라는 테틀리의 요청을 거절한다)으로는 불법적 폭력 행위인 린치를 막지 못한다. 클라크는 소설에서 린치를 주도한 테틀리보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데이비스에게 윤리적 책임의 무게를 더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야만과 폭력에 맞서야만 할까? 어떤 면에서 그 질문은 폭력의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남성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윌리엄 웰먼 감독의 '옥스 보우 사건'은 원작자의 의도를 충실히 드러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는 독선과 편견을 가진 지도자와 군중,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폭압적 사태를 인지하게 만든다. 정의는 실현되지 못했고,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만 있을 뿐이다. 방관자들의 좌절감으로 가득찬 이 뒤틀린 서부극에는 나치 독일과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사진 출처: tc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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