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학교 마치면 어디 딴 데 가 있고 싶어. 이 영화판 사람들 정상인 사람들 아무도 없어. 다 또라이야."

  이제 막 자신의 영화를 찍은 대학원생 문수(이선균 분)는 전 여자친구 선희(정유미 분)에게 그렇게 말한다. 홍상수의 2013년작 '우리 선희'에는 문수가 말한 그 '또라이' 천지인 영화판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맞아, 거긴 또라이들이 가득했어. 결국 그래서 '어디 딴 데'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과 학생 선희는 한동안 학교를 떠나 있었다. 그러다 유학을 앞두고 추천서를 받기 위해 최교수(김상중 분)를 찾는다. 헤어진 남자 친구 문수, 가깝게 지냈던 선배 재학(정재영 분)은 다시 보게 된 선희가 너무나도 반갑다. 그들 모두는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세 남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선희에 대한 마음을 토로한다. 문수는 선희의 마음을 다시 얻고 싶어하고, 재학은 숨겨왔던 연심을 내비치고, 최교수 또한 제자가 아닌 여자로 선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는 언제나 그러하듯 홍상수의 '소주'가 함께 한다. 

  절친한 사이인 세 남자는 한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 여자가 '선희'라는 사실은 서로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희는 세 남자에게 각각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확실히 문수와는 끝났고, 최교수에 대해서는 모호하며, 재학에 대해서는 진심인 것처럼 보인다. 이 사각 관계의 오묘한 퍼즐을 풀 수 있는 단서는 오로지 '소주'에 있다. 술이 들어가고 나서야 그들은 본심을 말하고, 솔직해지며, 자신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에 근접한다. '소주'는 홍의 영화적 각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게 영화쪽 사람들에게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다. 술과 담배는 인간 관계, 영화 작업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에서 계속 변주해서 보여주는 영화계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신랄하고 풍자로 가득 차 있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우리 선희'는 로맨스 영화라기보다는, 그가 가장 잘 아는 영화판,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기 돈 들여 영화를 찍어서 어쨌든 감독 '입봉'을 한 문수, 선희에게 '감독님'으로 불리지만 써지지 않는 차기작 시나리오 붙잡고 씨름하는 재학, '교수' 직함 달고 지루하지만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진입한 최교수. 그들은 서로에게 모두 과거, 현재, 미래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 세 명의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마주친 곤경은 '선희'가 아니다. 생의 활력 내지는 창의력의 고갈이다.

  관객은 세 남자가 바라보는 선희에 대한 평가가 모두 같은 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최교수의 추천서에서부터 시작된 이 언어의 여정은 세 남자가 창경궁에서 우연히 모이게 되는 자리에서 정점을 이루며 끝난다. 내성적이지만, 똑똑하고, 안목이 있으며, 때론 또라이 같지만, 용감하다. 마치 감염이 되듯 그들은 술자리에서 서로 나눈 대화들을 머릿속에 '입력(input)'해 두었다가, 다른 사람과의 술자리에서 '인출(output)'한다. 이건 선희에 대한 평가뿐만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닌 개똥철학과 같은 신념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문수가 투정처럼 영화판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자, 선희는 한 우물 파듯 끝까지 해봐야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다고 젠체하며 충고한다. 그런데 그건 선희가 문수를 만나기 직전에 추천서 문제로 만난 최교수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문수는 선희에게 들었던 그 말을 선배 재학과의 술자리에서 열정적으로 강변한다. 재학은 나중에 선희와의 술자리에서 그 '한 우물' 타령을 앵무새처럼 읊조린다. 이 우스꽝스러운 언어의 유랑을 보는 일은 허허로우면서도 통렬하다.

  그렇게 홍상수는 '영화판'이라는 비좁은 생태계의 폐쇄성을 선희와 세 남자의 관계를 통해 드러낸다. 그의 이러한 묘사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적확하며 사실적이다. '선희'는 세 남자에게 '연인'이라기보다는 정체된 삶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줄 영감(靈感), 뮤즈(Muse)로 여겨진다. 최교수는 선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마음의 울렁거림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재학에게 토로한다(그는 선희의 존재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차기작은 언제 할지도 모르는 재학에게 선희는 신선한 열정의 통풍구이다. 문수는 또 어떤가. 돈 천만 원 들여 찍은 영화는 관객이 거의 들지도 않은 영화이다. 선희는 그 영화가 둘의 연애 관계를 그대로 베껴서 써먹었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문수가 선희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것은 바닥난 창작력에 물을 붓고 싶어하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우리 선희'는 예술이라는 그럴듯한 허명(虛名)에 얽매인 인간군상들의 적나라하고도 서글픈 초상을 보여준다. 나는 영화 내내 계속 웃었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는 가슴 한켠이 꽤나 쓰라렸다. 문수, 재학, 최교수, 선희...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은 한 번쯤 만났을 법한 인물들이고, 그들의 술자리와 대화는 나에게 결코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반복해서 쓰는 말이 있다. 시간 되면 전화할게, 꼭 보고 싶었어, 너 예뻐(이건 남자들이 선희에게만 하는 건 아니다. 선희도 재학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예쁘다고 말한다). 모두다 거짓부렁이야... 아름답게 빛나는 예술은 저 멀리에 있고, 삶은 구질구질하며, 인생은 짧다. '우리 선희'의 주인공들은 모두 그 예술의 진창길에서 몸부림친다. 나는 홍상수가 보여준 이 처절한 자기 성찰에 진심으로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 싶어졌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들 리뷰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on-beach-at-night-alone-2017.html


도망친 여자(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woman-who-ran-2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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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시골 사냥꾼들의 담소에서부터 시작된다. 선술집에 둘러앉은 그들은 오래전 이 마을에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게 영화의 1부에서 루치아노라는 이름의 광인이 등장한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Tuscia, 마을 의사의 아들 루치아노는 늘 술에 절은채 폐인같은 삶을 살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가난한 양치기의 딸 엠마가 눈에 들어온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연인과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도 잠시, 반항적인 루치아노는 마을의 절대적 권력자 영주와 충돌한다. 그로 인해 고향땅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그 과정에서 연인 엠마도 목숨을 잃는다.

  1부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그저 그런 로맨스 영화 같다. 좀 싱겁네, 하고 심드렁해지려는 순간, 갑자기 2부가 시작된다. 이탈리아 시골의 수려한 풍광은 이제 남미 대륙의 최남단, 황량한 Tierra del Fuego로 바뀐다. 루치아노는 사제의 복장을 하고 있다. 그는 숨겨진 황금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보물 사냥꾼들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바뀐 것은 풍경뿐만이 아니다. 장르도 바뀐다. 고통스럽게 끝난 루치아노의 로맨스는 어느새 처절한 서부극으로 이어진다.

  이 하이브리드 장르의 이탈리아 영화는 나름 매력이 있다. 특히 Tierra del Fuego의 원시적 풍광은 압도적이다. 끝없이 이어진 거친 자갈 언덕과 호수, 독특한 화산 지형을 배경으로 황금 사냥꾼들은 욕망과 배신의 서사를 짜나간다. 한마디로 그냥 '풍경'이 다 해 먹는 영화. 조그만 태블릿 PC 화면으로 보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거기에다 여인들의 구음과 민속 악기가 어우러진 배경 음악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Greek chorus) 같다.

  루치아노 역을 맡은 Gabriele Silli는 미술가로 비전문 배우임에도 좋은 연기를 펼친다. 현지 주민들을 기용해 자연스러운 연출을 보여준 점도 괜찮다. 두 명의 감독은 우연히 시골에 갔다가 농부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거기에서 영화의 구상을 발전시켜나갔다. 1부의 로맨스가 지역 민담에 기초했다면, 2부의 웨스턴은 캐릭터에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의 독특한 탈주였다.

  하지만 두 개의 전혀 다른 장르를 결합하는 과정에서 캐릭터 구축에는 헛점이 생겼다. 광인에 주정뱅이였던 루치아노가 남미의 땅에서 어떻게 물질적 욕망에 자신을 내던지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에 대해 2명의 감독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루치아노가 고향에서 경험한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다른 형태의 보상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59회 NYFF에서 이루어진 두 감독의 인터뷰 참조, 출처 유튜브). 그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The Tale of King Crab'은 설정의 비약과 모호함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실패한 영화인가?


  영화의 마지막, 루치아노는 쓰러지고 구르면서 사력을 다해 산에 오른다. 거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눈발이 날린다. 이 외롭고 상처입은 남자는 산 정상에 위치한 호수를 발견한다. 호수에는 황금의 위치를 알려준다는 붉은 대게가 헤엄치고 있다. 남자가 찾고 싶은 건 어쩌면 황금이 아니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연인 엠마이리라. 금빛 물살을 헤치며 천천히 걸어 들어간 루치아노는 환상 속에서 엠마와 만난다. 그렇게 Alessio Rigo de Righi와 Matteo Zoppis는 민담에서 건져올린 광인 남자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내가 이 어설프고 기이한 전설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The Tale of King Crab'에서 풍경은 내러티브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이며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압도적 '풍경의 서사'가 어떤 것인지 궁금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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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다니던 아들 녀석이 갑자기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선언했다. 뭔가 대단한 계획이 있나 했더니 푸드 트럭을 하겠다고. 하고 있는 세탁소는 임대인이 바뀐 뒤로 비워줘야할 상황이다. 뉴욕 플러싱에서 17년 동안 세탁소를 해온 이민자 최씨 부부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모아놓은 돈은 없고, 아메리칸 드림은 저 멀리 사라지고 있다. 이 가족,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 Julian Kim, Peter S. Lee의 2019년작 'Happy Cleaners'는 한인 이민자 가정의 고군분투기를 담는다.

  영화는 고성이 오가는 엄마와 아들의 언쟁으로 시작한다. 엄마는 한국말로 야단을 치고, 아들은 영어로 응수한다. 이민자 가정의 이러한 이중 언어 사용은 매우 일반적인 모습이다. 생존을 위해 영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한국말이 편한 1세대, Asian American의 정체성에 영어가 모국어인 2세대. 구사하는 언어만큼이나 부모와 자녀 세대의 사고방식도 전혀 다르다. 드라이클리닝 컴플레인으로 찾아온 백인 여성은 터무니없는 액수의 보상을 요구한다. 엄마는 여자가 원하는 대로 보상금을 내어준다. 케빈이 화를 내며 그 이유를 묻자, 엄마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 편이 아니니 조심하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미국이 'my country'라고 말하는 케빈은 불이익을 감수하며 몸을 사리는 부모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이민자 가정에서 일어나는 세대 갈등과 간극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자신들은 뼈빠지게 고생하지만, 자녀는 좋은 대학을 나와서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성공하는 것. 그것이 이민자들이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이다. 하지만 최씨 부부의 현실은 혹독하다. 세탁소를 그만둔 부부는 생계를 위해 일용직을 전전한다. 아들은 공부 대신 음식 장사를 하겠다고 하고, 딸은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려고 한다.

  'Happy Cleaners'에는 한인 이민자들의 현실이 사실적인 풍경 속에 펼쳐진다. '세탁소'는 초창기 한인 이민자들이 선택한 주요한 업종이며, 교회는 인적 네트워크로 기능한다. 세탁소의 보일러가 고장나자 엄마는 딸에게 수리 업체를 알아보라고 말한다. 일하다 말고 전화를 받은 딸은 수리 기사인 교회 권사의 이름을 알려준다. 빠듯한 매상에도 감사 헌금을 떼어놓는 일은 잊지 않는다. 이민자들에게 있어 교회가 갖는 중요성은 영화 '미나리(Minari, 2020)'에서도 드러난다. 정이삭 감독은 1980년대 미국으로 간 한인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 속에서 젊은 부부는 교회를 정신적, 사회적 버팀목으로 여긴다.

  문장 부호 hyphen(-). 영화의 마지막에 흐르는 랩 음악의 가사는 이민 2세대를 문장 부호에 비유한다. 그들에게 자기 정체성이란 바로 그 hyphen처럼 앞단어(한국인)와 뒷단어(미국인)를 연결하는 지점에 있으며, 그 둘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케빈은 할머니가 해주는 '묵밥'을 가장 좋아한다. 이 가족의 식탁을 채우는 음식은 흰 쌀밥과 보쌈, 뚝배기, 매운탕, 삼겹살, 닭볶음탕과 같은 전형적인 한국 음식이다. 케빈의 엄마는 번거롭게 품이 드는 오이지에 집착한다. 친정 엄마를 기억하고픈 엄마에게 '오이지'는 그냥 반찬이 아니라 떠나온 고국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나에게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대사와 번역에 있었다. 영화 속에서 한국어 대사가 나올 때 영어 자막이 뜬다. 집앞에서 딸을 기다리던 대니와 마주친 엄마는 빵집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장면을 본 현이는 나중에 엄마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묻는다.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눙친다.

  "응, 내가 대니 잡아먹었어."
 
  그 장면에서의 자막은 'I give him a hard time'이다.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 존재하는 이 미묘하고도 놀라운 차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문화의 간극이기도 하다. 이민자의 삶이란 그 비어있는 틈 사이를 끊임없이 메꾸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Korean American에서 Asian American으로 변모하는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들려준다. 결국 창작자에게 있어 창작의 출발점은 언제나 그 '자신'이다. 'Spa Night(2016)' 앤드류 안(Andrew Ahn)은 한인 이민자 2세대, 동성애자인 주인공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나의 문제에서 나아가 사회와의 접점을 찾아내는 것. 그런 면에서 'Happy Cleaners'는 공동 감독 줄리언 김과 피터 리가 좋은 출발을 했음을 알려준다. 그들의 차기작을 기대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미국 한인 2세 감독들의 영화

앤드류 안(Andrew Ahn)의 영화들, Spa Night(2016)와 Driveways(201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andrew-ahn-spa-night2016-driveways2019.html

영화 미나리(Minari, 202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minari-2020.html

영화 Gook(201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la-justin-chon-gook2017.html

영화 Seoul Searching(2015)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1986-benson-lee-seoul-searching20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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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살 노라는 오빠와 함께 이제 막 새로운 학교에 들어서는 참이다. 아빠의 품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 눈물이 계속 난다. 그래도 오빠가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점심 시간에 급식실에서 오빠와 같이 앉으려는데, 선생님이 그러지 말라고 한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보란다. 다행히 말을 걸어오는 애들이 있다. 운동장에서 함께 놀면서 조금씩 친해진다. 저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오빠가 있다. 뭔가 분위기가 안좋은 것 같다. 오빠는 가까이 오지 말라며 막아선다. 키 큰 남자애가 오빠를 괴롭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이걸 어쩌지...

  불안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어린 노라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듯 하다. 학교는 노라와 아벨 남매가 적응해야할 정글이다. 노라가 또래 아이들의 무리에 순조롭게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아벨은 어려움을 겪는다. 신체적 위협과 욕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아벨은 맨 아래로 금새 밀려난다. 어떻게든 오빠를 돕고 싶은 노라는 선생님을 부르고 아빠에게 이야기 한다. 괴롭히는 녀석을 어른들이 혼내주면 오빠가 편해질 거야... 그런데 노라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이 흘러간다.

  벨기에의 신인 감독 Laura Wandel의 데뷔작 'Playground(2021)'는 어린 남매의 괴로운 학교 생활을 따라간다. 영화는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괴롭힘과 따돌림 문제를 사실적으로 직시한다. 물론 교사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다. 교사는 얻어맞는 아벨을 떼어놓고,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는 주의를 준다. 문제는 교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이다. 괴롭히는 녀석들은 영악하고 교활하다. 적당히 신경을 긁고 수치심을 줄 수 있는 지점을 파악해서 행동에 옮긴다. 아벨은 전보다 더 안좋은 처지에 놓인다.

  이 영화의 원제는 'Un monde', '세계'라는 뜻이다. 완델은 인간 관계의 심리적 역동성을 아이들의 놀이터에서 완벽하게 구현한다. 강자와 약자, 또래 집단과 인정의 문제. 그것은 어린 아이들의 학교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직장 내 괴롭힘 문제는 법률의 영역에까지 들어왔다. 어른들의 사회는 또 다른 의미의 'Playground', '세계'이다. 우리는 이미 어린 시절에 그곳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나름대로 체득했다. 마치 거푸집 같은, 어쩌면 평생을 두고 반복해서 써먹을 생존 전략, 대인 관계의 틀이기도 하다. 영화 속 노라와 아벨 남매는 힘겹게 그것을 배우는 중이다.

  아벨이 겪는 시련은 노라의 세계를 뒤흔든다. 다정했던 오빠와는 사이가 멀어지고, 친구들은 노라를 따돌린다. 노라에게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따로 있다. 오빠가 또래 집단에서의 생존을 위해 더 약한 아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확고한 감각,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노라에게 학교의 운동장은 혹독한 시험장이 된다. 노라가 평균대에서 흔들거리며 균형을 찾듯, 수영 강습 시간에 물에 뜨는 법을 배우듯, 그렇게 노라가 놀이터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Playground'는 결코 아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지나온 어린 시절의 놀이터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햇빛이 쏟아지는 한가운데가 아니라 그늘지고 구석진, 남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운동장의 담벼락에 가만히 기대어 선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아니,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 영화가 던지는 근원적인 물음은 '학교'라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그곳은 아이들이 삶의 규칙을 배우기에 적합한 곳인가? 영민하고 통찰력 있는 여성 신인 감독은 7살 노라의 등 뒤에서 어른들의 서늘한 세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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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irgacheffe. 에티오피아를 대표하는 이 고유한 풍미의 커피가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바로 기후 변화(climate change)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의 커피 농부들은 맛이 없어진 커피 대신에 다른 작물을 심고 있다. Khat는 커피를 갈아엎은 땅을 빠르게 채워가는 중이다. 환각 물질을 함유한 이 나뭇잎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애용된다. 커피보다 물이 적게 들고(커피 생산에는 엄청난 물이 필요하다), 재배와 가공 과정도 간소하다. 감독 Jessica Beshir는 어린 시절, 에티오피아 내전을 피해 가족이 멕시코로 이주했고 그 뒤에 미국에 정착했다. 나중에 고국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베시르는 커피 농장이 카트로 가득찬 벌판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Faya Dayi(2021)는 카트와 에티오피아 사회의 심리 사회적 연관성을 다룬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 소설 작법에 나오는 비법 가운데 하나이다. 베시르는 에피오피아 내전과 그 후유증, 카트 산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10년에 걸쳐 촬영된 이 다큐는 어떤 면에서 감독이 바라본 고국에 대한 성찰의 편린들을 묶은 것이기도 하다. 흑백의 화면 속에 펼쳐지는 이 나라의 풍광에서 폭력과 갈등의 그림자를 찾기는 어렵다. 카트 작업장 인부들의 떠들썩한 말소리, 느긋하게 카트를 씹는 나이든 남자들, 강물에서 평화롭게 노는 아이들... 하지만 젊은이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절망이 묻어난다.

  오랜 내전(Ethiopian Civil War, 1974-1991)은 에티오피아 곳곳에 생채기를 남겼다. 2020년에 발생한 북부 티그라이 지역에서의 내전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무려 80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의 복잡한 민족 구성은 정치적 불안정과 연결되어 있다. 청년들이 나누는 대화에서는 내전에서의 폭력과 살상의 기억이 소환된다. 베시르는 내전이 할퀴고 간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내면을 시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담아낸다. 주요한 내러티브가 없지는 않다. 14살 모하메드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모하메드의 아버지는 하루종일 집안에서 카트를 씹으며 코란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카트가 떨어지면 모하메드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카트를 구해오라고 때리며 닥달을 한다. 그 모습은 여느 약물 중독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하메드는 괴로운 그곳을 떠나고 싶다. 유럽은 꿈의 땅이다. 하지만 유럽으로 향하는 길은 막대한 밀입국 비용과 목숨을 담보로 한다. 그나마 현실적인 것은 카트 밀무역상이 되어 아라비아 반도로 향하는 것이다. 고향에서 카트 중독자가 되어 절망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 아니면 밀입국을 하다가 객지에서 비명횡사하는 것. 그 모든 선택에는 불운과 고통이 수반된다.

  이슬람의 수피(Sufi) 성직자들에게 카트는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축복의 잎사귀이다. 종교 의식의 카트 연기는 신성함에 수렴되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무기력과 절망으로 귀결된다. 이미 카트에 중독된 남자는 젊은이들에게 카트를 멀리하라고 충고한다. 남자들 뿐만이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카트는 일상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필수품이 되었다.

  "모두가 카트를 씹으면서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해요."
  (Everyone chews to get away.)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모하메드는 황량한 들판을 걸으며 그렇게 읊조린다. 흑백 화면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처럼 떨어지는 모하메드의 굵은 눈물은 에티오피아가 처한 총체적 어려움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무기력과 절망이 스며든 일상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보이는 곳은 카트 가공 공장과 수매 현장이다. 베시르는 카트가 이 나라에서 커피를 밀어내고 차지한 경제적 위상을 건조한 화면 속에 담는다. 돈이 되는 신의 잎사귀는 역설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을 서서히 마비시키고 있다.

  다큐의 제목 'Faya Dayi'는 건강을 기원하는 Oromo 말이다. Amhara어를 구사하는 베시르는 Oromo 농민들이 부르는 노동요에서 제목을 따왔다. 제작비의 압박 때문에 10년에 걸쳐 드문 드문 촬영했고, 그 시간 동안 다른 언어를 쓰는 주민들과 신뢰와 친분을 쌓아나갔다. 이 다큐는 에티오피아 밖의 관객들에게 그 나라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조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좁고 구불구불한 흙담벽 골목을 지나는 여인의 베일처럼 'Faya Dayi'는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미지들이 드리워져 있다. 내전이 에티오피아인들의 내면에 남긴 심리적 상흔은 '카트'와 결합하면서 사회 전체가 환각과 무기력에 잠식되어가는 중이다. 베시르는 'Faya Dayi'를 통해 오늘날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처한 심각한 사회 심리적 위기를 고요하고 밀도있는 영상 속에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fayaday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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