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가 TV 대담에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나루세 미키오는 거의 말이 없었고 배우들에게 별다른 연출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나루세 미키오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그들의 연기를 무척 신뢰했던 모양이다. 아역 배우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던 연기 천재 타카미네 히데코였지만, 이 배우에게도 버겁게 느껴진 작품이 있었다. 영화 '야성의 여인(Untamed, Arakure, 1957)'이었다. 고민 끝에 타카미네 히데코는 나루세 미키오에게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요?'하고 물었다. 감독의 대답은 이러했다. "아, 그거? 어렵지 않아. 금방 끝날 거야."

  영화 '야성의 여인'은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토쿠다 슈세이(徳田秋声)가 191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あらくれ)이 그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오시마(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여느 여성 캐릭터들과 확실히 다르다. 이 여성은 매우 강단있고 주체성이 강한 인물이다. 오시마는 자신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남자들에게 과감히 맞선다. 작가 토쿠다 슈세이가 살았던 시대 뿐만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진 1950년대에도 이런 여성은 보기 드물었다. 그 시대의 여성은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갇혀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 '오시마'라는 여성의 존재는 더욱 유별나고 특이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오시마를 연기하면서 느꼈던 어려움도 거기에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게의 창문을 열심히 닦는 여자가 보인다. 오시마는 부유한 상인 츠루(우에하라 켄 분)의 후처로 들어왔다. 츠루는 전처를 병으로 잃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새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은 영 마뜩잖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그는 낡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아내에게 옷도 사주지 않는다. 술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데다 바람까지 피운다. 오시마가 임신하자, 아이 아빠가 자신이 아닌 것 같다고 대놓고 모욕을 준다. 결국 불행하게 끝난 첫 결혼, 오시마는 어디고 몸을 의탁할 데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친정 오빠가 소개해준 산골 온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다 온천장의 주인집 아들과 눈이 맞는다. 그런데 이 남자 하마야(모리 마사유키 분)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그의 병든 아내는 요양을 떠난 상태이다. 가정을 버릴 생각이 없는 하마야에게 시간이 갈수록 오시마의 존재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유부남의 내연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오시마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무작정 도쿄로 상경, 재봉일을 배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오시마는 일하면서 알게된 상인 오노다(카토 다이스케 분)와 가정을 꾸리고 의상실을 연다. 잘 되던 의상실이 불황에 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인생의 시련과 마주한 오시마. 오시마의 인생에 해뜰 날이 있을까...

  이 영화에서 오시마의 남자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매우 폭력적이다. 첫 번째 남편 츠루는 오시마와 몸싸움을 벌이다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든다. 그 일로 오시마는 유산한다. 두 번째 남편 오노다는 어떠한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뺨을 때리는 일은 다반사다. 이 남자도 무능함과 뻔뻔스러움으로 치자면 첫 남편 츠루와 막상막하. 틈만 나면 바람 피울 생각에 가게일은 뒷전이다. 또한 술고래 아버지 봉양까지 오시마에게 강요한다. 오시마라고 참고만 있지 않다. 급기야 오노다의 손찌검에 물건을 내던지며, 빗자루로 남자를 후드러팬다.

  이 영화 속에서 좀 괜찮은 남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형적인 구시대 인물인 오시마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딸을 남자에 묶어둘 생각만 할 뿐이다. 유부남 하마야는 온화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그가 오시마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다. 그는 아내가 돌아온 이후에도 오시마와 계속 관계를 유지한다. 오시마는 오직 하마야에게만 마음을 준다. 그는 오시마의 불같은 성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사람이다.

  비록 결혼 생활은 삐걱거리지만, 오시마는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오시마가 서툴게 넘어지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중에 화려한 양장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는 오시마에게서는 진정한 자유가 느껴진다. 대단한 사업 수완을 보이며 의상실을 꾸려나가는 오시마의 모습은 독립적인 근대 여성의 초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주체적인 여성이 남편의 불륜에 대처하는 방식도 남다른 데가 있다. 오시마는 남편의 뒤를 밟아 내연녀의 집을 알아낸다. 내연녀와 드잡이질을 하고 나오는 길, 예기치 않게 비까지 쏟아진다. 우산을 하나 사고, 오시마는 의상실에 전화를 건다. 오시마는 유능한 재단사와 일꾼을 데리고 나와 자신만의 의상실을 차릴 생각이다. 그깟 바람난 남자는 알아서 살게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오시마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진다. 비오는 거리를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오시마의 뒷모습은 당당하다. 

  영화의 일본어 제목 'あらくれ'는 '거친, 폭력적인'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주로 '사나운 남자'를 묘사할 때 쓰인다. 영화 속에서 오시마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자답지 않다고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견고한 가부장적 사회 체제하에서 이 여성이 보여주는 담대한 모습은 결코 폄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루세 미키오는 원작 소설이 지닌 힘과 아름다움을 영화 속에 그대로 재현한다. 후대의 관객은 시대의 인습에 저항하는 강인한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발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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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기차를 당장 세워라!
  (Stop that train!)"


  풍채 좋은 중년의 배우는 기차역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친다. 때는 2차 대전 시기의 영국. 순회 극단의 단장 Sir(Albert Finney 분)는 배우들과 함께 다른 도시로 이동중이다. 그런데 그들은 기차 시간에 늦었고, 기차는 이제 막 출발하려는 참이다. Sir의 말 한마디에 기차가 멈춘다. 의상 담당 노먼(Tom Courtenay 분)이 역장 붙잡고 아무리 애원해도 안되던 것을 배우는 단번에 해낸다.

  피터 예이츠(Peter Yates) 감독의 'The Dresser(1983)'는 영국 극작가 Ronald Harwood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한때 작가는 영국 연극계의 전설적 배우였던 Sir Donald Wolfit의 의상 담당을 했던 적이 있다. 할우드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The Dresser'를 썼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대배우와 무대 뒤 사람들의 삶을 엿볼 기회를 얻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연극 오셀로의 막이 내리고 배우들은 커튼콜을 하고 있다. 그 커튼 뒤, Sir는 배우들을 향해 불호령을 쏟아낸다. 그는 자신이 연기할 때 방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배우들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경'으로 불리는 이 남자의 오만불손함과 자기 중심주의는 하늘을 찌른다. 극단의 재능있는 중견 배우 옥센비는 그를 '폭군'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노먼은 그 폭군 Sir의 충실한 의상담당이다. 말이 의상담당이지, 실제로 그는 Sir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는 하인이나 다름없다. 그의 주인은 주체하기 힘든 변덕에다 폭언과 모욕 또한 일상적이다. 그런데도 노먼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한다. 그것도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마치 어린 아이를 보살피듯 한다.

  노먼이 매혹된 것이 Sir이라는 인물과 그 재능인지, 아니면 연극이라는 예술 세계에 대한 동경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다. 분장에 필요한 밀가루를 구하기 위해 시장을 찾은 그는 가게 주인으로부터 '아가씨'라는 소리를 듣는다. 노먼의 말투와 행동은 매우 여성스럽고 다정다감하다. '동성애자'라는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한 암시는 노먼과 Sir의 관계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든다. 노먼이 Sir에게 보여주는 모든 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연극 예술'에 대한 헌신처럼 보인다. 노먼의 목표는 Sir의 불안과 고통을 달래어 어떻게든 무대에 오르도록 만드는 일이다. 무대 위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해 보이는 대배우는 시시때때로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가 도심 한복판에서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릴 때, 이 광인 배우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노먼이다.

  관객들은 무대 위 Sir의 리어왕 연기에 찬사를 보내며 감탄한다. 하지만 그 무대 뒷편에서 Sir가 보여주는 행태는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다. Sir는 극단을 이끄는 권력자로서 배우들 위에 군림한다. 이 지독한 이기주의자인 대배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입힌다. 그는 또한 단원들의 예술에 대한 열망을 자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으로 교묘하게 이용할 줄도 안다. 그에게 하인처럼 매여 있는 노먼, 오랫동안 Sir를 흠모하며 노처녀로 늙어버린 무대 감독 매지, 배역을 얻기 위해 Sir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신인 여배우, Sir의 한마디 칭찬에 기뻐하는 나이든 조역 배우... Sir가 지배하는 무대 뒤의 세계는 서글픔과 함께 추악함이 존재한다.

  노먼은 늘 바지 뒷주머니에 브랜디 병을 넣어두고 수시로 홀짝거린다. Dresser의 대배우에 대한 헌신은 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만은 아니다. Sir와 함께 하면서 느끼는 모멸감과 자괴감을 견디기 위해 노먼은 알콜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점은 노먼과 Sir의 관계에 내재된 착취적이고 병적인 일면을 드러낸다. 노먼은 Sir이 쓴 자서전의 감사 서문에 자신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음을 알고 분노한다. Sir에게 노먼은 Dresser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을 Sir의 예술적 동반자로 믿고 싶었던 노먼의 바람은 그렇게 산산조각난다. 영화 'The Dresser'는 무대 뒤의 숨겨진 삶을 찬찬히 펼쳐서 보여준다. 예술이 아름답고 위대하게 빛나기 위해, 때로 거기에 몸담은 이들의 삶은 파괴적으로 소모된다. 그것은 노먼 뿐만 아니라, 그가 Dresser로 헌신한 대배우에게도 적용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Peter Bogdanovich 'Noises Off(1992)' 리뷰
영화 'Noises Off(1992)'도 무대 뒤의 만화경 같은 인생을 그린다. 이 영화의 원작을 쓴 이는 영국의 극작가 Michael Frayn. 감독 Peter Bogdanovich는 이 영화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은 처참히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예술과 삶의 경계에 대한 흥미로운 탐구가 들어있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noises-off-1992.html

***앨버트 피니 주연 '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196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saturday-night-and-sunday-morning-1960.html

****피터 예이츠 감독의 'The Friends of Eddie Coyle(197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friends-of-eddie-coy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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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아카풀코 해변에 있던 남자는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여동생 엘리스는 그를 만나고 가는 길에 갱단의 습격을 받고 죽었다. 그는 여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있다. 교도소 샤워장에서 남자는 거대한 돼지가 바닥에 드러누운 것을 본다. 그의 변호사는 곧 그를 교도소에서 빼내어 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현지에서 사귄 젊은 애인과 재회한다. 여자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피범벅이 된 돼지 사체가 현관 입구에서 그를 맞이한다. 그걸 본 남자는 놀란 나머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교도소 샤워장의 살아있는 돼지라니, 뭔가 초현실주의적인 설정같다. 그런데 그건 그 남자 닐에게만 보인 환시였다. 닐에게 돼지가 전혀 뜬금없는 대상은 아니다. 그는 대형 육가공업체를 소유한 사업가이다. 애인의 집에서 본 죽은 돼지는 그에게 닥칠 불운을 암시한다. 병원의 의사는 닐의 머리에 종양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에게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멕시코 감독 미셸 프랑코(Michel Franco)'Sundown(2021)'은 관객에게 매우 불친절한 영화이다. 러닝타임 83분, 그리 길지 않은 이 영화는 제대로 된 대사도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관객은 닐의 삶에 대한 아주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아카풀코의 특급 호텔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중년의 남녀와 두 명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닐과 엘리스는 남매, 젊은 남녀는 엘리스의 자녀이다. 여동생 가족이 휴양지에서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과는 달리 닐은 무료해 보인다. 그런데 엘리스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평화로운 휴가는 끝이 난다. 엘리스는 모친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일행은 공항에서 급하게 귀국 비행기편을 알아보는데, 닐은 여권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카풀코로 돌아온 그는 싸구려 모텔에 짐을 풀고 무작정 해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귀국을 독촉하는 엘리스의 전화도 차단해 버린다.

  닐은 현지 여인 베레니스와 연애도 시작한다. 둘은 따뜻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맥주를 들이킨다. 가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태양을 바라본다. 휴양지 해변의 평화가 마냥 이어지지는 않는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갱단은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고 사라진다. 닐은 그것을 보고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다. 죽은 이의 피는 바닷물에 물감처럼 퍼진다. 그 장면의 불길한 기운은 닐의 피부 반점을 극도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기이한 쇼트에서도 감지된다.

  미셸 프랑코는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에 대한 정보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닐이 보여주는 극도의 무관심과 냉정함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관객은 그저 추측할 뿐이다. 그가 매우 부유한 사람이며, 생에 대한 그 어떤 열망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닐이 쌓은 부는 무수한 가축의 핏빛 죽음에서 나왔다. 닐과 엘리스, 두 명의 조카 콜린과 알렉사. 휴양지에서 그들의 모습은 그곳 대다수 가난한 주민들의 삶과 대비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인종과 계층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도시의 삶과 사업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가? 마침내 닐을 찾아낸 엘리스는 분을 터뜨린다. 어머니 장례식에도 오지 않고, 닐은 내내 여자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닐의 패륜적 행태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도대체 왜?', 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관객이 혼란스러워할 무렵에 닐에게 급박한 시한부 질병이 통고된다. 이제 이 불행한 남자의 마지막을 따라가야만 한다. 영화의 마지막, 테라스의 비어있는 의자에 그의 옷과 소지품만이 덩그라니 남아있다.

  "아니, 이게 정말 다인가?" 그렇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누군가 나에게 그래서 이 영화가 좋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나는 잠시 주저할 것이다.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분명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Sundown'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것들을 오랫동안 곱씹게 만든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내러티브의 간극을 메꾸는 일등공신은 주연 배우 팀 로스(Tim Roth)이다. 그가 연기한 닐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생에 대한 깊은 절망과 허무가 감지된다. 그 삶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며, 우리는 언젠가 불현듯 찾아올 죽음의 순간을 떠올린다. 미셸 프랑코의 이 소품같은 영화에는 서늘한 매혹이 존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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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적 공포 영화에 구현된 미국의 인종 문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흑인 남자 배우는 백인 여자 배우의 뺨을 때리라는 감독의 연출 지시에 무척 당황했다. 그는 감독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그 장면을 넣은 영화가 개봉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말 모르는 겁니까?"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에 출연했던 여배우 Judith O’Dea는 당시의 일을 그렇게 회고했다(출처: atlantamagazine.com과의 인터뷰). 감독 조지 로메로(George A. Romero)는 자신의 첫 장편 영화에 신인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배우의 이름은 Duane Jones. 그는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로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전에 잠시 연기 생활을 했다(후에 그는 영문학과 교수가 된다). 로메로가 존스를 캐스팅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존스는 오디션했던 배우들 가운데 연기력이 가장 좋았다. 그렇게 듀웨인 존스는 기념비적인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영화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대본도 없었다. 영화는 최소한의 예산으로 매우 경제적으로 제작되었다. 감독의 지인들이 스태프로, 촬영 장소 지역 주민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했다. 비싼 컬러 필름 대신에 흑백으로 찍은 것도 다행이었다. 허술한 분장과 현장 세트의 결점을 무난하게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인 감독의 패기 넘치는 첫 장편은 좀비 영화(zombie movie)의 기원이 되었다. 잔혹하고 폭력적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제작비의 무려 250배에 달하는 엄청난 수익을 냈다.

  부모의 묘를 참배하러 왔다가 좀비에게 오빠를 잃은 바바라(주디스 오디아 분)는 인근 농가로 황급히 숨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좀비를 피해 벤(듀웨인 존스 분)이 집으로 들어온다. 벤은 매우 차분하고 침착하게 좀비 무리와 맞설 준비를 한다. 그런데 그 집에는 벤과 바바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하실에는 아픈 딸과 그 부모, 두 명의 남녀가 숨어있었다. 시골 농가에 갇힌 사람들은 습격해 오는 좀비들과 일대 결전을 벌인다. 어떻게 좀비들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TV와 라디오에서는 그저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으라고만 전할 뿐이다. 정부도 속수무책이다. 각자도생. 그런 가운데 흑인 벤은 좀비와 적극적으로 맞서려 하고, 백인 가장 해리는 구조될 때까지 지하실에 있을 것을 주장한다. 과연 이들은 좀비와의 대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이 영화에서 단연코 눈길을 끄는 캐릭터는 좀비와 용감히 맞서는 흑인 캐릭터 벤이다. 그는 매우 침착하고 용의주도하게 좀비의 습격에 대비한다. 침입을 막기 위해 집안 곳곳을 나무로 덧대며, 무기로 쓸 총기를 찾아내어 손질한다. 패닉 상태에 빠진 바바라를 진정시키는 것도 그의 몫이다. 벤은 해리와 헬렌 부부의 딸이 아픈 것을 보고 의약품을 구해올 계획을 짠다. 하지만 해리는 벤의 그 모든 것이 못마땅하다. 그는 외부의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지하실에 숨어있으려고만 할 뿐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배우 시드니 포이티에(Sidney Poitier)가 보여주었던 캐릭터는 선하고 정의로운 흑인이었다. 포이티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 1967)'에서의 흑인 엘리트 청년, '밤의 열기 속으로(In the Heat of the Night, 1967)'의 열혈 형사,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 1967)'의 인간적인 교사를 연기했다. 그는 기존 사회 질서에 결코 위협이 되지 않는 순응적 흑인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그와는 달리,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듀웨인 존스가 연기한 '벤'은 매우 전복적인 캐릭터이다. 벤은 공포에 질려서 이성을 잃은 백인 여자 바바라의 뺨을 후려친다. 그는 또한 자신과 대립하는 백인 가장 해리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비합리적이고 독단적인 해리와는 달리, 벤은 매우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이 영화에서 벤이 농가에 갇힌 사람들 중에 최후의 1인이 된다는 점은 그가 가진 탁월한 생존력을 입증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은 벤은 정부 구조대의 백인이 쏜 총알에 맞아 죽는다. 이러한 결말은 1960년대 미국내 인종적 갈등에 대한 영화적 반영이다. 백인에게 도전하는 흑인 캐릭터는 결코 영웅으로 남아있어서는 안되며, 안전하게 제거되어야만 했다. 이 영화 속 벤에게 닥친 비극은 현실과 분명히 닮아있었다. 듀웨인 존스는 당시 영화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겪었던 일을 회상한다. 차에 탄 백인 십 대 청소년들은 존스의 차를 위협적으로 추격했다. 존스는 영화 속 좀비와의 끔찍한 사투보다 흑인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인종차별의 현실에 몸서리를 쳤다(출처: thetwingeeks.com).

  조지 로메로의 선구자적 위치는 '좀비'라는 가상의 존재를 영화로 끌어들였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그는 비판적 관찰자로서 공포 영화 장르에 현실의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구현한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인종 문제의 정치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로메로는 자신의 또 다른 대표작 '새벽의 저주(Dawn of the Dead, 1978)'에서는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판한다. 무차별적인 좀비의 습격은 현대인의 내면을 잠식하는 과도한 물질적 욕망과 등치된다. 로메로 영화의 분장과 특수효과는 오늘날 관객의 시각에서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독창성은 공포 영화 장르에 동시대 사회 문제를 성공적으로 이식했다는 점에 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보는 관객들은 비좁은 시골 농가가 당시 미국 사회의 축소판임을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영화 속 벤에게 닥친 비극은 임계점에 이른 인종 문제의 선명한 예시로 각인된다.   


*사진 출처: vox.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조지 로메로의 The Amusement Park(1975)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amusement-park19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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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루세 미키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은 좋지만, 거기엔 남자들이 없어요." 미조구치 겐지에게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만 주구장창 찍은 감독으로 각인된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 '권적운(鰯雲, Iwashigumo, 1958)'은 나루세 미키오의 필모그래피에서 특이한 작품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일본의 사회 변화와 세대 갈등을 중심 주제로 다룬다. 물론 나루세 미키오의 주된 관심사인 '여성의 삶'은 여기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전쟁 미망인인 야에는 농사를 지으며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신문기자 오카와는 농촌 기사를 쓰기 위해 야에를 인터뷰한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진다. 야에는 인색한 시어머니와 고된 농사일에 지쳐있다. 모처럼의 연애 감정은 야에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야에에게는 같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오빠 와스케가 있다. 와스케는 자신의 세 아들이 대를 이어 농사를 짓길 바란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 삶을 거부한다. 오빠네 집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운데, 야에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오카와는 도쿄로 발령을 받아 떠나기로 되어 있다. 야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권적운'에서 이야기의 중심축은 야에가 아니라, 오빠 와스케의 집안에 있다. 이 영화에서 농촌의 현실은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오카와가 야에와 만나게 된 계기는 농지개혁법 취재 때문이었다. 종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강도 높은 개혁으로 일본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농지개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52년농지법이 통과된다. 비로소 일본 농촌은 봉건적 농지 소유 제도가 철폐되고 자작농 중심의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대지주들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정부에 의해 강제로 헐값에 토지를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지주의 집안이었던 와스케는 이전보다 쪼그라든 땅에서 어렵게 농사를 짓고 있다.

  전형적인 구세대 농부로서 와스케의 사고방식은 자식들의 가치관과 여지없이 충돌한다. 그는 빚을 내서라도 아들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루고 싶어한다. 장남 하츠지는 그런 것을 허례허식으로 여긴다. 하츠지는 결혼 예식을 생략하고 도시에서 소박한 신혼 살림을 시작한다. 와스케의 막내 아들 준은 농부가 아닌 기술자가 되려고 한다. 기술학교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준은 아버지에게 논을 팔 것을 요구한다. 땅을 목숨처럼 여기는 와스케는 막내 아들의 청에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토지를 팔게 된다.  

  러닝타임 129분의, 컬러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영화 '권적운'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팬들에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영화가 농지법 도입 이후의 일본 농촌의 현실과 함께 신구 세대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야에와 오카와의 사랑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곁다리처럼 비춰진다. 그럼에도 나루세 미키오는 이 영화에 자신의 각인을 분명히 새겨넣는다. 전쟁미망인 야에는 농사로 독립적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오빠 와스케가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을 때, 야에는 경운기를 직접 운전하며 땅을 일군다. 오카와와의 관계에서 야에가 보여주는 주도적인 모습은 꽤 의미심장하다. 여관에서 야에는 오카와가 열어둔 창문을 닫아버리며, 그렇게 둘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야에는 유부남인 오카와와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마냥 억누르지는 않는다.

  야에를 바닷가에 데려간 오카와는 더 넓고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따라가서, 그가 보여주는 세상과 함께 할 것인가? 여전히 죽은 남편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전쟁미망인은 곧 자신의 현실을 깨닫는다. 야에에게는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들과 삶의 터전인 땅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오카와가 도쿄로 떠나는 날에 야에는 힘겹게 농사일을 하고 있다. 이 독립적인 여성의 삶은 외로울 수는 있지만, 비참하거나 서글프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권적운'에서 나루세 미키오는 전후 일본 농촌의 변화를 면밀하게 담아낸다. 거기에는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초상도 포개어져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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