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에 아사야스(Olivier Assayas)가 만들어낸 매혹적인 영화의 미로:

Les Vampires(1915-1916)에서 Irma Vep(1996)에 이르는 길
 


1. 진정한 팬심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Irma Vep(1996)

  예전에 배우 장만옥이 프랑스 감독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둘의 인연이 이어졌었는지 궁금하기는 했었다. 그들이 'Clean(2004)'을 찍었을 때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결혼 생활이 끝난 뒤였다. 영화 'Irma Vep(1996)'는 배우 장만옥과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를 이어준 오작교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를 만들고 2년 뒤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래서 그런지 'Irma Vep'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에 대한 감독의 팬심이 느껴진다. 그것도 아주 절절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정신없이 돌아가는 영화사 사무실. 홍콩 배우 매기 청(장만옥의 영어식 이름)은 이제 막 공항에서 오는 길이다. 매기는 르네 비달 감독의 영화 'Irma Vep' 출연이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영화사 사람들은 이 배우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저마다 꼬여버린 일정, 일거리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느라 바쁘다. 매기는 빡빡한 촬영 일정 속에서 외국인 스탭들과 작업해야만 한다. 거기에다 매기가 맡은 Irma Vep역은 매기에게도 너무 낯설고 이상하다. 몸에 꽉 끼는 검정 라텍스 의상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감독은 어디가 아픈지 기운이 없어 보인다. 촬영 스탭들 사이에 쌓인 갈등은 고성이 오가는 싸움으로 번진다. 과연 매기는 이 괴상한 프랑스 영화를 무사히 찍을 수 있을까?

  매기가 찍기로 한 영화는 무성 영화 시절의 Louis Feuillade가 내놓은 'Les Vampires(1915-1916)'를 원작으로 한다. 그 무성 영화의 여주인공 이름이 바로 Irma Vep. 르네 감독은 자신이 매혹된 무성 영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싶어한다. 매기는 그의 꿈을 실현시켜줄 동방의 뮤즈인 셈이다. 하지만 촬영은 엉키기만 하고 급기야 르네는 신경과민으로 더이상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 와중에 매기는 영화 속 캐릭터에 빙의되는 심리적 혼란을 겪는다. 여배우는 Irma Vep 의상을 입고 다른 사람의 호텔방에 침입해서 목걸이를 훔친다. 그리고는 옥상에서 비를 맞으며 자신이 연기하는 Irma Vep처럼 내달린다.

  영화 'Irma Vep'는 영화 속의 영화를 보여주며,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감독의 정서적 붕괴, 여배우의 내적 혼란, 스텝들 사이의 해묵은 감정 싸움... 그들이 일하는 현장은 갈등과 긴장, 혼란이 뒤엉킨 일터이다. 이 영화는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들, 창작과 현실 사이의 모호한 간극을 드러낸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 장만옥을 내세워 그 여정을 이끌어 나간다. 그러니까 영화 속의 르네 감독은 아사야스의 영화적 분신인 셈이다.

  그 여정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찍다 말은 몇 분짜리 영상이다. 르네가 직접 편집한 영상 속의 장만옥, 아니 Irma Vep의 모습은 기괴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엉망진창으로 마구 스크래치가 난 필름 속에서 매기는 무시무시한 독기를 내뿜는 특촬물의 여전사처럼 되어버렸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그 마지막 장면에서 황당한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배우 장만옥도 웃지 않았을까? 그 지점에서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저 영화의 원작이 된 무성 영화는 과연 어떤 작품인가? Irma Vep는 누구인가?


2. Irma Vep의 탄생, Les Vampires(1915-1916)

  장만옥을 파리로 오게 만든 'Les Vampires(1915-1916)'는 10부작으로 이루어진, 러닝타임이 무려 7시간에 가까운 영화이다. 그래도 영화 'Irma Vep'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 무성영화를 조금이라도 봐야할 것 같았다. 우선 1편만 봐야지. 그렇게 보기 시작한 것이 10편까지 주욱 내달리게 되었다. 마치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100년도 더 된 무성영화는 2022년의 관객을 무지막지한 속도로 끌어당겼다. 투박하고 촌스러운데도 이 영화는 정말 재미있다. 당시의 관객들이 이 영화에 열광했던 이유를 대충은 알 것도 같다. 

  신문사 기자 필립은 파리를 뒤흔든 일련의 범죄 사건에 '뱀파이어단(흡혈귀와는 상관이 없고 이름만 그렇다)'이 있다고 의심한다. Irma Vep는 뱀파이어단을 대표하는 여성 범죄자로 강도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필립은 동료 마자멧과 함께 범죄 조직을 추적한다. 필립은 약혼녀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지만 굴하지 않고 뱀파이어단을 쫓는다. 한편 또 다른 거물 강도 모레노는 Irma Vep와 힘을 합쳐 파리의 밤을 지배하려고 한다. 필립과 마자멧의 대활약으로 모레노와 Irma Vep는 검거된다. 하지만 재빨리 조직을 수습한 뱀파이어 잔당들은 필립에게 복수를 다짐하는데...

  영화 'Irma Vep'에서 장만옥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검은 라텍스 의상은 'Les Vampires'의 주연 배우 Musidora가 입은 검정색의 전신 타이즈에서 나왔다. 그것을 입은 여배우의 육감적 몸매와 날렵한 움직임은 Irma Vep의 치명적 매력을 드러낸다. 강도와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이 악녀는 팜 파탈(femme fatale)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Irma Vep는 비록 두목 Grand Vampire의 지시를 받기는 하지만 수동적인 부하는 아니다. 실질적으로 조직의 범죄 전과정에 개입하며 주도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은 Irma Vep가 나중에 강도 모레노와 결탁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모레노는 Irma Vep를 최면술로 조종하지만, 곧 그 미모에 매혹된다. 포로로 잡혔던 여자는 강도의 연인이 되며 범죄를 공모한다.

  'Les Vampires'의 매력은 여주인공 Irma Vep를 연기한 배우 Musidora의 놀라운 재능에만 있지않다. 이 영화를 당대 최고의 흥행작으로 만든 요인은 탄탄한 내러티브에 있다. 악의 화신과도 같은 잔혹한 범죄단과 그들의 뒤를 캐는 기자는 쫓고 쫓기는 게임을 이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비운의 희생자들이 나오고, 극의 긴장은 고조된다. 최면술을 비롯해 독약, 폭탄과 같은 소재도 등장한다. 거기에다 배우들은 모든 스턴트 연기를 직접 해낸다. 높은 건물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고, 차에서 뛰어내린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추격하는 장면도 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견고하게 확장되는 이야기의 벽돌이 된다. Grand Vampire의 죽음으로 궤멸된 줄 알았던 조직은 최종 보스 Satanas의 등장으로 건재를 과시한다. 이 악의 세력은 결코 쉽게 붕괴하지 않는다. Satanas의 죽음에도 Irma Vep가 후계자와 함께 조직을 재건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 영화의 감독 루이 푀이야드는 정말이지 뛰어난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10부작에 이르는 이 무성 영화 시리즈물은 파리를 배경으로 악이 지배하는 거대한 세계를 그려낸다. 거기에 Irma Vep라는 팜 파탈 캐릭터를 비롯해 '뱀파이어단'이라는 범죄 집단의 설정 또한 흥미롭다. 영화 속에서 이들은 주로 귀족과 부자들의 재산을 강탈한다. 이들이 처단하는 대상에는 대법관과 경찰의 수뇌부 인사도 있다. 한마디로 뱀파이어단은 지배 계급과 자본가들의 대척점에 서있는 반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영화 'Irma Vep'에서 중도하차한 르네 대신에 대체 투입된 감독이 매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일리가 있다.

  "Irma Vep는 파리 밑바닥 출신으로 막장 인생이라고. 그런 역을 홍콩 여배우가 하다니 말도 안돼. 그 여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배역과 아무런 개연성도 없다구."

  그렇다고 해서 'Les Vampires'가 계층 갈등을 중심에 둔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산업혁명으로 일찌기 자본주의에 눈을 뜬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의 경제 발전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당시 프랑스의 경제 체제는 소상공인 중심이었다. 거대 자본가의 출현이나 극심한 빈부격차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에 내재된 계층 갈등적 요소는 1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끝나버린 '벨 에포크(Belle Époque)' 이후의 시대에 대한 암울한 예언이다. 그런 영화를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장만옥에 대한 팬심으로 80년의 시간을 거슬러 끌어 올려낸다. 이 독특한 영화 작가가 만들어낸 'Les Vampires'에서 'Irma Vep'에 이르는 영화의 미로에는 떨칠 수 없는 매혹이 자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 리뷰


Clouds of Sils Maria(201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clouds-of-sils-maria2014.html

Personal Shopper(201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personal-shopper20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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