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다큐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2-hertz whale'이라는 별명이 붙은 고래가 있다. 고래는 종에 따라 특정 주파수 대역의 소리로 서로 소통한다. 대부분의 고래들이 내는 소리의 주파수 대역은 40헤르츠 이하인데, 그에 비해 52헤르츠 고래는 상당히 높은 소리를 내었다. 이 고래가 어느 종에 속하는지, 이동하는 경로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1989년 이후로 52헤르츠 고래의 존재는 계속해서 감지되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 Joshua Zeman은 이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그는 '52'를 찾아나서기로 결심했다. 2021년작 다큐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는 바로 그 52헤르츠 고래를 찾는 지난한 여정을 담고 있다.

  다큐는 표면적으로는 '52'의 행방을 찾아나선 연구팀의 여정을 그리면서, 그와 함께 고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훑어 나간다. 19세기에는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고래 사냥이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석유의 발견으로 더이상 고래를 사냥할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포경 산업은 번성했다. 고래 고기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950년대 들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966년에 해양 생물학자가 녹음한 고래의 소리는 음반으로 제작되어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사람들은 고래를 먹을거리가 아닌 함께 공존해야할 해양 생명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환경 운동과 함께 국제적인 NGO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의 활동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래 무리가 자신들만의 소리로 서로 소통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고래 소리를 가장 전문적으로 연구한 곳은 미 해군이었다. 냉전시대에 소련 잠수함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다양한 정밀 탐사 장비가 사용되었다. 고래가 내는 노랫소리는 가장 많이 탐지되었다. '52'의 존재도 그렇게 알려졌다. Blue Whale 종이라고만 추측되는 이 고래는 마치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계속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주파수로 소리를 내는 이 생명체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고래는 왜 혼자서, 그토록 높은 주파수의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Joshua Zeman은 52 헤르츠 고래를 찾는 여정을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처럼 풀어나간다. 대양의 무수한 고래들 가운데 특정한 한 마리를 찾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와 같았다. 그 고래가 이미 죽어버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52'에 매혹된 남자는 탐사를 위한 제작비를 모으러 다녔고, 마침내 해양 생물학자들로 이루어진 탐사팀이 꾸려진다. 그즈음 '52'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고래가 캘리포니아 해안가에서 탐지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52'의 존재를 추적하는 이 다큐는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자연 다큐멘터리에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투영되어있다. 최근작 다큐 'My Octopus Teacher(2020)'의 경우에는 다큐 제작자가 특별한 교감을 나누게 된 문어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직업적 경력과 가족 관계의 어려움에 처한 남자는 어느 문어와의 만남을 통해서 내면의 치유를 경험한다. 사적 다큐멘터리와 자연 다큐멘터리의 이 기묘한 조합은 지나치게 감성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도 그런 면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52'는 소통할 대상이 없이 홀로 높은 소리를 낸다는 사실만으로 가장 외롭고 특별한 고래가 되어버린다. 그 고래가 진짜 외로운지 우리 인간이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이유로 '52'를 찾아 나서는 이 다큐의 관점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이다.

  결국 탐사팀은 '52'를 찾지 못하고 추적을 끝마친다. 하지만 이 다큐의 마지막에는 작은 반전이 들어있다. '52'가 내었던 소리로 응답하는 두 마리의 고래가 탐지되었다. 고래들은 무리마다 특유의 지역 방언(dialect)을 쓰는데, '52 헤르츠'는 그러한 고래 방언들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생긴 셈이다. 그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다소 허망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여정에는 무언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진다. 다큐는 거대한 해양 생명체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들의 평화로운 삶을 지켜주어야할 책임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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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결심한듯 마침내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키요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찻집에는 그들 말고 다른 손님은 없다. 그때, 주인이 카운터로 나온다. 주인을 보더니 그 남자 켄키치(미후네 토시로 분)는 다시 침묵을 지킨다. 무더운 여름날, 두 사람은 잠시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왔다. 그들은 서로의 감정을 잘 알고 있지만, 이제까지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본 적은 없었다. 곧 비가 그치고 그들은 찻집을 나선다. 영화 '아내의 마음(妻の心, A Wife's Heart, 1956)'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그 남자 켄키치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인물의 감정을 자연 현상과 결합시킨다. '야성의 여인(あらくれ, Untamed, 1957)'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욕망에 끌린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갈 때,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나루세 미키오는 그들 사이에 일어난 격한 감정의 떨림을 나뭇가지에 쌓인 두터운 눈이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것으로 대신한다.

  키요코와 신지는 결혼한지 5년이 되었다. 부부는 작은 잡화상을 하고 있지만 가게는 잘 되지 않는다. 궁리 끝에 가게 옆의 공터에 음식점을 내기로 한다. 키요코의 시어머니는 괜한 일을 벌인다며 못마땅해 한다. 어떻게든 삶의 활로를 찾아보려는 부부. 키요코의 친구 유미코에게는 은행원 오빠 켄키치가 있다. 켄키치의 도움을 받아 대출을 받은 키요코는 가게를 낼 꿈에 부푼다. 그즈음, 키요코의 큰동서가 어린 딸을 데리고 온다. 곧이어 실직한 시아주버니까지 집에 들어앉는다. 시아주버니는 자신도 가게를 내겠다며 키요코에게 대출을 받아달라고 부탁한다. 시어머니와 큰동서는 은근히 키요코를 압박한다. 키요코는 곤란한 지경에 처했는데, 남편이란 작자는 게이샤와 온천 여행을 갔다온다. 아내는 열불이 난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돈'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인물들의 갈등은 돈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 영화 '아내의 마음'에서도 키요코 부부와 시댁은 돈에 쪼들린다. 시어머니는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낸다며 혼수로 많은 돈을 썼다. 키요코에게 새 가게는 부부의 꿈이 담긴 곳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어렵게 빌린 대출금은 시아주버니 차지가 된다. 돈 때문에 상심한 부부의 사이에는 틈이 생긴다. 남편이 밖으로 나도는 동안, 키요코는 친절한 켄키치에게 마음이 기운다.

  나루세 미키오는 서서히 엉클어지는 키요코의 일상을 작은 소품으로 드러낸다. 손톱깎이를 찾던 키요코는 그것을 큰동서가 전혀 엉뚱한 곳에 두었음을 알게 된다. 고루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도 버거운데, 시아주버니 내외와 그 딸까지 들어앉았다. 꿈꾸던 가게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람난 남편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키요코의 무심함은 떨어진 단추를 달아달라는 남편의 요구를 일축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키요코가 빨래를 하지 않아서 남편은 입었던 셔츠를 또 입어야할 판이다.

  아직 아이가 없는 이 부부를 이어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불명확해 보인다. 이 부부의 시작을 추측해볼 수 있는 대사가 나오기는 한다. 유미코는 오빠 켄키치에게 키요코가 별다른 애정없이 결혼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키요코의 말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유미코의 결혼이 늦어지는 것을 켄키치가 걱정하자, 키요코는 자조적으로 말한다. '유미코가 현명한 거에요. 생각없이 한 결혼은 나중에 두통거리가 될 뿐이니까요.' 그러한 것을 볼 때 키요코의 결혼은 낭만적인 사랑으로 지탱되는 것은 아니다.

  부부에게 있어 애정은 결혼 생활의 절대적인 조건인가? 그렇다면 키요코는 남편을 떠나는 것이 맞다. 남편은 함께 온천 여행을 갔던 게이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그는 상심한 키요코에게 자신을 떠나 켄키치와 새로운 출발을 해도 좋다고 말한다. 신지가 키요코에게 그 말을 하는 장소는 그들 부부가 새로 음식점을 내기로 한 공터이다. 부부의 꿈이 깃든 그곳에서 키요코는 이제 고통스런 결별을 떠올리게 된다. 비록 켄키치가 말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키요코는 자신을 좋아하는 켄키치의 마음을 안다.

  키요코는 결국 남편의 곁에 머무르기로 결심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아내(妻, Wife, 1953)''안즈코(杏っ子, Little Peach, 1958)'의 여주인공들은 가부장제적 인습에 스스로를 가두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키요코의 결심은 그 여성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키요코는 새로 개업한 가게를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편을 발견한다. 키요코는 부부가 함께 꾸었던 미래를 떠올린다. 아내는 이제 남편을 애정의 대상이 아니라 인생을 함께 헤쳐나갈 동반자, 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다. 부부는 다시 한번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영화 '아내의 마음'은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결혼의 초상으로는 드물게 희망의 빛을 드리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mifuneproductions.co.jp



***나루세 미키오 영화 리뷰

아내(妻, Wife,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ife-1953.html

야성의 여인(あらくれ, Untamed,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untamed-1957.html

안즈코(杏っ子, Little Peach,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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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대통령의 시간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그날 저녁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대국민 담화를 준비한다. 중계 방송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대통령은 책상 위를 세차게 내려친다. 파리 한마리를 잽싸게 죽인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얼른 평정심을 되찾는다. 이 장면은 백주 대낮에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테러 사건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기이하게 비춰진다. 이날 TV 화면에 비친 대통령은 확신에 차있으며 미국민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9월 11일 당일 대통령 부시의 행적은 그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Adam Wishart의 다큐 '9/11: Inside the President's War Room(2021)'은 바로 그날,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복기한다. 부시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당시 부통령 체니, 국가 안보 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보좌진들의 생생한 증언, 사진과 영상 자료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건 발생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9/11 테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인터넷으로도 충분히 검색 가능하다. 이 다큐는 이제까지 알려진 9/11의 세부적인 항목에 무언가를 더하는 대신에, 대통령 부시의 관점에서 그날의 일을 재구성한다. 9월 11일 새벽, 대통령은 여느 때처럼 새벽 조깅을 했다. 오전에는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참관하는 행사가 기획되어 있었다. 참관 수업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보좌진은 믿기지 않은 테러 소식을 접한다. 어떻게든 대통령에게 알려야만 했다. 수업중 귀엣말로 보고받은 대통령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마디로 그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대통령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소식을 접한 보좌진들도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한가지였다. 대통령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부시와 참모진들의 행적은 처절한 도피 같았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뉴욕은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는데, 대통령을 비롯해 백악관의 그 누구도 사건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TV 방송사들이 그 모든 상황을 발빠르게 보도하고 사건 현장을 지켰다. 대통령과 보좌진조차 TV 중계 화면을 무엇보다 의지했다. 대통령 전용기의 전파 수신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도 한몫했다. 전용기의 부시와 그 참모들은 백악관과 연락이 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모든 상황을 지휘해야할 대통령은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지 못했다. 부시는 백악관에 가야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보좌진들은 위험하다며 말렸다. 그들이 안전한 장소를 찾는다며 군사 기지를 전전하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TV 방송국의 앵커는 도대체 대통령이 어디에 있는 거냐며 비꼬았다.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전용기 안의 부시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제대로 된 정보는 차단되어 있었고, 보좌진은 대통령의 안전이 담보되는 곳을 찾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것은 백악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들은 백악관 지하 벙커에서 회의를 한다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갑자기 많이 몰린 사람들 때문에 지하 벙커의 공기가 희박해져서 나중에는 모두들 졸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그것은 총체적인 무능과 혼란, 그 자체였다. 압도하는 공포에 휩싸인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은 어떤 결정이 올바른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제한된 정보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소통 과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난 부시가 어떻게 정책 결정권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가는가를 흥미롭게 부각시킨다. 그는 백악관에 돌아오고 나서야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체니, 럼스펠드, 라이스, 그가 의지하고 믿는 최측근 참모들이 그에게 투사로서의 기운을 불어넣어주었음이 분명하다. 부시의 주변은 전형적 주전론자인 매파 관료들이 득시글거렸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 선포는 그런 가운데에서 나왔다.

  오직 국무부 장관 콜린 파웰만이 외교적 해결 방법을 강구해야한다고 직언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부시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부시는 부친이 감행했던 이라크전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버지 부시는 전쟁을 통해 강한 미국, 전쟁을 이끄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그 아버지처럼 아들 부시는 이제 새로운 전쟁으로 미국을 이끌어갈 참이었다. 부시는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대국민 담화와 테러 현장 방문은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신중하게 계획되었다.

  그러나 부시가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거대한 수렁으로 발을 들여놓는 일이었다. 그 전쟁은 무려 20년이나 이어질 터였다. 미국은 힘겹게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을 뺐고, 그곳의 상황은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기 이전보다 악화되었다. 많은 미군과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죽어나갔다. 오직 거대 군산 복합체 기업들만이 득을 보았을 뿐이다. 다큐의 인터뷰에서 부시는 그 결단의 순간을 자랑스럽게 회고한다. 그는 그것만이 미국민을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강변한다. 

  다큐 '9/11: Inside the President's War Room(2021)'이 9/11에 대한 최고의 다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다큐는 당시 미국의 통수권자였던 부시의 입장과 그 정책 결정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다. 2001년 9월 11일, 그날 대통령 부시의 여정은 국가 비상 사태에서 지도자가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 다큐의 관객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통령 부시의 리더십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리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내게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통치 체제가 가진 투명성이 새롭게 다가왔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의 모든 행적과 결정 과정이 명확한 기록과 증언으로 남았다. 다큐에 담긴 그러한 사실은 미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킨다.
 

*사진 출처: telegraph.co.uk



**이 다큐는 documentarymania.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룬 다큐

Father Soldier Son(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ther-soldier-son2020.html

Hell and Back Again(201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hell-and-back-again2011.html

Restrepo(201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1-restrepo20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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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무섭다. 영화 '뺑소니(ひき逃げ, 1966)'의 주인공 쿠니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하나뿐인 어린 아들을 잃었다. 그 비극은 남편이 불운하게 세상을 뜬지 얼마되지 않아 일어났다. 쿠니코의 아들은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 사고를 낸 사람은 부잣집 운전기사로 재판에서 약소한 벌금형을 받았다. 쿠니코는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런 쿠니코에게 사건을 목격한 동네 주민이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본 뺑소니 운전자는 줄무늬 스카프를 두른 '여자'였다는 것. 쿠니코는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하지만, 경찰은 이미 끝난 사건이라는 말만을 할 뿐이다. 쿠니코는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다.

  이 영화에는 서로 다른 계층적 배경을 지닌 두 명의 엄마가 등장한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쿠니코는 전형적인 하층 계급의 여성이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쿠니코의 과거는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매춘부였던 쿠니코는 착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그 결혼 생활은 불행했던 이 여자의 인생에서 선물처럼 주어진 행운이었다. 비록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쿠니코에게 아들은 삶의 버팀목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다. 그것도 아주 억울하게. 자식잃은 어미의 가슴은 복수심에 불탄다.

  쿠니코의 아들을 사고로 죽게 만든 키누코는 부잣집 사모님이다. 남편 카키누마는 자동차 회사의 중역으로 키누코와는 정략 결혼으로 맺어졌다. 애정없는 결혼 생활, 키누코는 바람을 피운다. 여자가 아이를 치고도 그대로 달아난 것은 동석한 애인의 존재를 들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편의 운전기사가 죄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키누코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키누코의 삶. 하지만 키누코의 집에 가정부로 취직한 쿠니코는 곧 그 집안에 흐르는 냉기와 불행의 기운을 감지한다. '이상한(変な, 영어의 strange에 해당하는 뜻) 집구석이야.' 쿠니코는 야쿠자 남동생에게 그 집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키누코의 집은 진공 청소기를 비롯해 당시로서는 최신식 가전 제품과 세련된 서양식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키누코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이 여자가 느끼는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한다. 키누코는 애인이 결별을 선언하자 큰 충격을 받는다. 부잣집 마나님 키누코의 불행한 삶은 자식 잃은 가난한 여자 쿠니코의 눈을 통해 관찰된다.  

  영화는 전후 일본 사회의 심화된 계층적 격차를 보여주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키누코의 죄를 뒤집어쓰기로 한 운전기사는 고용주 카키누마에게 돈을 요구한다. 징집으로 전쟁에 끌려갔던 그는 포로로 잡혔다가 늦게 풀려나는 바람에 마흔이 넘어서 취직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그가 부양해야할 처자식의 미래는 불안정해졌다. 그가 진범이 아니라고 의심한 쿠니코는 그의 집을 찾아가 진실을 말해달라고 애원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전경에는 운전기사와 쿠니코를, 뒷배경에는 두 아이와 병으로 누워있는 그의 아내를 보여준다. 그 장면은 전쟁이 드리운 어두운 그늘과 함께 돈 때문에 부유층의 윤리적 과오를 뒤집어쓰는 하층 계급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쿠니코는 키누코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복수극을 끊임없이 떠올린다. 나루세 미키오는 쿠니코가 그러한 상상을 떠올릴 때, 과다노출 처리함으로써 인물을 빛 속에 가둔다. 이러한 영화적 시도는 이전의 그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분이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쿠니코의 내면은 점차 강박적이고 황폐하게 변해간다. 영화 '뺑소니'는 이 감독이 정교한 멜로 드라마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스릴러 장르의 연출에서도 나름의 역량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마지막 연출작은 '흐트러진 구름(Scattered Clouds, 1967)'이었다. 그러니까 영화 '뺑소니(Hit and Run, 1966)'는 그가 영화 경력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찍은 작품이 된다. 나루세 미키오의 잘 정돈된 전성기 멜로 드라마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가 병마로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감독의 다양한 영화 세계를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영화 '뺑소니'에서 동시대 일본 사회에 대한 깊이있는 관찰을 스릴러 장르에 녹여낸다. 아이의 비극적 죽음으로 얽히게 된 두 여성의 삶은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쿠니코 역을 연기한 타카미네 히데코의 열연은 오랫동안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이 영화는 타카미네 히데코와 나루세 미키오가 함께 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allcinem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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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강변 호텔(2018)'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시인 영환(기주봉 분)은 오랜만에 두 아들과 만난다. 그가 자식들을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영환은 죽음의 예감을 느끼고 있다. 밤에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는 자식들에게 사진관에 가서 영정 사진까지 찍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시인은 지금 강변 호텔에 머물고 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난 호텔 주인이 시인의 팬이었다. 주인은 영환에게 아무 부담없이 호텔에 와서 지내라고 초대했다. 그 호텔에는 손을 다친 젊은 여자 아름(김민희 분)이 머물고 있다. 아름은 연인과 결별한 후유증에 시달리는듯 하다. 그런 아름을 위로하기 위해 아는 언니(송선미 분)가 찾아온다. 그저 평화로워 보이는 겨울 강변의 풍경, 시인의 불길한 예감은 괜한 것일까?

  근래에 들어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최근작인 '당신 얼굴 앞에서(2021)'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중년의 여배우가 등장한다. '강변 호텔(Hotel by the River, 2018)'은 죽음의 예감에 사로잡힌 노시인이 주인공이다. 홍상수의 영화들도 감독 자신처럼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강이 보이는 호텔방에서 몸을 일으키는 영환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두 아들 경수와 병수를 만날 생각이다. 도착을 알리는 큰아들 경수의 전화, 영환은 객실로 올라오겠다며 방번호를 알려달라는 경수의 청을 완곡히 거절한다. 부모 자식간이지만 자신의 공간을 개방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의지가 보이는 장면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영환과 두 아들 사이의 정서적 거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환은 사랑 때문에 젊어서 처자식을 내친 인물이다.

  "미안한 것 때문에 인생을 같이 할 수는 없는 거야"

  늙은 시인은 가족을 나 몰라라 했던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옹호한다. 영환의 모습에서 홍상수 본인의 현실이 겹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감독은 젊은 여배우와 함께 하기 위해서 가정을 떠났다. '강변 호텔'의 영환은 홍상수의 영화적 자아이기도 하다. 현실의 여배우는 그대로 영화 속 '아름'으로 걸어 들어간다. 영환과 같은 호텔에 투숙중인 아름은 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객실에서 상처를 드레싱하는 모습을 보니, 손등에 화상 자국이 나있다. 이 여자는 손뿐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유부남과의 불행한 사랑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로하려고 찾아온 선배 언니는 그 남자를 맹비난한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아름은 담담하다. 오히려 남자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처럼 말한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여자의 사랑은 어떤 면에서 진짜로 끝난 것이 아니다.

  사랑과 죽음. 홍상수는 '강변 호텔'에서 두 개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갑작스런 죽음의 예감에 영환은 당황하지 않는다. 그간 소원했던 자식들을 불러 모으며 영정사진도 찍는다. 죽을 때가 되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도 보인다. 카페에 있는 커다란 화초를 보며 잎이 말랐으니 물을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남자는 이제까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아왔다. 여자 때문에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내팽개치고 살아온 것을 보면 그렇다. 이제 곧 죽을 것 같다고 말을 하는 그가 유일하게 마음에 걸려하는 존재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한 마리이다.

  홍상수는 언젠가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앞당겨서 복기(復棋)하는 것일까? 영환은 아들들 앞에서 당당하다. 차남 병수의 이름에 담긴 뜻을 주욱 풀어서 알려주는가 하면, 두 아들의 인생에 대한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큰아들 경수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혼 소식을 숨긴다. 여자 친구가 없는 작은 아들 병수는 아버지에게 여자가 무섭다고 말한다. 정작 자신도 여자 문제로 젊은 날을 부산스럽게 보냈던 아버지는 한탄한다. 두 아들은 이상하게도 그 원인을 호랑이 같은 '엄마'의 탓으로 돌린다. 사실 시인의 아내가 무서운 호랑이처럼 되어버린 것은 남편의 변심때문이며,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강해질 수 밖에 없었는 데도 말이다. 이 기형적인 가족의 이야기에서는 뭔가 서글픔이 베어져 나온다.

  노시인과 두 아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강변 호텔의 또 다른 투숙객 아름은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아름은 선배 언니 연주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호텔방에서 누워서 보낸다. 마치 다친 동물이 조용히 굴을 찾아 들어가 상처가 낫길 기다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강변을 은세계로 만들어버린 눈이 두 여자와 시인을 이어준다. 영환은 눈길에 산책을 나온 아름과 연주의 미모를 칭찬하며 말을 건넨다. 거리를 두려던 두 여자는 영환이 시인이라는 것을 알고 경계를 누그러뜨린다.

  홍상수에게 있어 '우연'은 그의 영화 세계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법칙이다. 영환과 두 여자의 만남 이전에 그들은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 연주는 호텔에 도착해서는 주차된 어떤 차를 보고 흠칫 놀란다. 아름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는 연주는 자신이 과거에 사고를 냈던 차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차는 경수 형제가 타고 온 차였다. 연주의 추측은 나중에 두 여자가 저녁을 먹기 위해 찾아간 순두부집 앞에서 경수의 차를 발견했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홍상수의 영화 안에서 모든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으며, '우연'의 구름은 그들을 단단하게 휘둘러 감는다.

  해외에서는 '소주 영화(Soju movie)'의 대가로 알려진 홍상수가 결코 술을 빠뜨리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소주 대신에 '막걸리'가 등장한다. 막걸리는 '소설가의 영화(2022)'에서도 등장한다. '당신 얼굴 앞에서(2021)'에서는 예외적으로 '배갈'이 나온 적이 있다. 영환이 두 아들과 막걸리를 들이키는 동안, 아름과 연주는 바로 그 뒷자리에서 저녁을 먹으며 남자들의 철없음을 토로한다. 그러면서도 연주는 영화 감독 병수의 싸인을 받을까 계속 고민한다. 자신이 보기에 대중적이지도, 그렇다고 작가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감독을 그저 인기있다는 이유로 싸인을 받고 싶어한다. 도대체 그 싸인은 받아서 뭐에다 쓸까? 호텔의 프런트 여직원도 병수를 알아보고 싸인을 받아갔었다. 유명인의 자필 이름이 적힌 종이 쪼가리 한장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타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 실재에 대한 감각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예술가의 작업만이 전혀 낯선 타자를 창조적 세계 안에서 만나게 할 수 있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관객은 영환이 아름과 연주 앞에서 자작시를 낭독하는 것을 본다. '이카'라는 가상의 공간과 그곳에 오게 된 두 여자, 덧니 소년이 등장하는 장문의 시는 기이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시 속의 두 여자는 아름과 연주의 상상적 변형이다. 또한 덧니 소년은 영환이 우연히 보게 된 근처 주유소 직원 청년의 모습과 다름없다. 영환의 시는 예술가가 자신이 마주하는 현실과 타자를 가공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렇게 시인은 강변 호텔에서 만난 두 여자, 낯선 청년을 자신의 시 속에서 기이한 방식으로 묶는다.

  그러한 영환의 시처럼 '강변 호텔'은 홍상수가 자신의 사랑,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영화적으로 변주한 작품이다. 영환은 호텔 사장으로부터 방을 비워달라는 말을 듣는다. 영환이 그 말을 들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영환의 팬이었던 주인은 더이상 영환을 보고 '설렘'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영환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둔다. 예술가에게 진정한 죽음은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가 아니라, 그 존재와 작품이 누군가에게 더이상 그 어떤 설렘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때이다. 영환의 죽음은 홍상수에게 있어 언젠가 다가올 그 순간에 대한 묵시적 체험인 셈이다. 영환의 삶이 지상에서 끝나버린 순간, 호텔방에서 안온히 잠든 아름과 연주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른다. 시인과 시인의 시가 머물렀던 시간은 타자의 내면으로 그렇게 흘러들어갔다. 홍상수의 이 영화 또한 누군가의 가슴에 그렇게 머물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 리뷰

당신 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10-in-front-of-your-face-2021.html

소설가의 영화(The Novelist's Film, 202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novelists-film-20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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