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영화 속 확장된 상상의 영토로서의 사막, 사막의 하얀 태양(Белое солнце пустыни, The White Sun of the Desert, 1970)



  이 영화의 대본은 3년 동안 소련 영화계를 떠돌아 다녔다.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연출을 제안받은 감독들마다 손사래를 쳤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미르 모틸(Vladimir Motyl) 감독에게 시나리오가 떨어졌다. 이래저래 잘 풀리지 않았던 이 감독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모틸 감독은 연출료로 받게 될 돈이 절실했다. 영화는 촬영 시작부터 불운의 연속이었다. 소품으로 대여한 물품들이 도난당하는가 하면, 내정된 주연 배우가 술 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바람에 교체해야만 했다. 뜻대로 나오지 않는 장면들 때문에 재촬영을 거듭하다 보니 예산이 초과되었고, 급기야 모틸 감독은 해고 통보를 받기도 했다. 어렵게 다시 현장으로 복귀한 그는 영화를 겨우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 국가 영화 위원회(Goskino)의 반응이 영 신통치가 않았다. 영화의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개봉하기 어렵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모틸 감독이 나중에 행운,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난다. 당시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서부 영화의 광팬이었다. 그는 이 영화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막의 하얀 태양'은 소련 관객들과 만나게 되었다.

  미국 영화에 서부극(Western)이 있다면, 소련에는 그것과 대비되는 Red Western인 Eastern이 있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소련은 촬영 장소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북부 시베리아부터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초원에 이르기까지 어떤 배경의 시나리오든 소화해낼 여력이 있었다. 다게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은 사막 지형을 품고 있어서 총잡이 활극을 찍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영화들은 새로운 것을 원하는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1960년대, 이국적인 배경의 영화들이 높은 흥행 실적을 기록하자 비슷한 영화들이 연달아 제작된다. 코미디 영화의 대가였던 레오니드 가이다이(Leonid Gaidai) 감독의 1967년작 '카프카스 납치(Kidnapping, Caucasian Style)'는 북 카프카스 지역을 배경으로 '신부 납치'라는 지역적 소재로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는 1967년 개봉작 가운데 최대 흥행 실적을 올렸다. 그 시기에 나온 소련 영화들은 내부적으로 개척해나간 상상의 영토들을 보여준다. 역시 가이다이 감독의 작품인 '이반 바실리예비치 씨, 직업을 바꾸다(Ivan Vasilievich: Back to the Future, 1973)'는 타임 슬립을 소재로 이반 뇌제가 다스리던 16세기와 현실을 오간다(제작사 Mosfilm에서는 한글 자막을 지원하는데, 자막의 수준은 상당히 실망스럽다).

  '사막의 하얀 태양'의 배경도 확장된 상상의 영토였다. 1920년대 카스피해 동부 해안, 적백 내전의 끝자락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적군(赤軍) 병사 수코프는 사막의 모래에 파묻힌 사이드를 구해준다. 지역 산적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재산을 빼앗긴 그는 절망한 상태. 살려준 수코프에게 왜 살렸냐며 원망하기도 하지만, 마음으로는 고마움을 느낀다. 사이드와 작별한 수코프는 적군 지휘관과 조우하고, 지휘관은 지역 갱단 두목 압둘라의 여러 부인들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떠맡긴다. 적군에 의해 쫓기는 압둘라는 무슬림의 법에 따라 함께 데려가지 못하는 부인들을 다 죽일 계획이었다. 그가 돌아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여자들을 수코프는 마지못해 호위한다. 그런데 탈출에 성공한 압둘라는 부하들과 함께 수코프를 추격한다. 과연 수코프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소련의 Eastern을 헐리우드 웨스턴과 비교하는 일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전반적으로 제작 품질의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도 보고 있노라면, 왜 국가 영화 위원회에서 개봉을 주저했는지 알게 된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그다지 개연성 없는 줄거리와 늘어지는 내러티브, 허술하기 짝이 없는 총격전에 실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해 개봉된 소련 영화들 가운데 관객 동원 5위를 기록했고,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인기를 더해갔다. 확실히 이 영화에는 러시아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유머 감각과 정서가 있다.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단번에 인기곡으로 등극했다. 소련 영화에서 노래는 무척 중요하다. 이 나라 국민들의 노래(러시아 로망스) 사랑은 정말이지 지극해서, 뭔 영화마다 노래들이 뮤지컬처럼 흘러나온다.

  초기 단계의 시나리오에서 무슬림 압둘라와 그의 여러 아내들의 이야기는 검열 당국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 결과 적군 병사 수코프의 활약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압둘라의 아내들에게 해방을 선언하는 수코프, 그런 그에게는 적군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에서 특이한 점이 엿보이는데, 중간 중간 수코프가 고향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내레이션으로 들어간다. 수코프는 수구적 잔재가 존재하는 그 땅에 혁명이 가져올 자유를 꿈꾼다고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들에게 말한다. 헐리우드 웨스턴이 돈과 욕망, 복수와 정의에 대해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소련의 이 사막 활극은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을 부르짖는다. 결국 소련에서 제작된 모든 영화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대원칙에서 '사막의 하얀 태양'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압둘라와 그 잔당들은 소탕의 대상이며, 압둘라의 아내들에게는 자유가 선물처럼 주어진다. 물론 수코프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없다. 사이드를 비롯해 마을 주민, 무기를 소유한 전직 세관 직원 파벨이 그를 돕는다. 중립적 위치에 있었던 파벨이 수코프의 편에 서는 계기가 흥미로운데, 그는 수코프의 어린 부하 페트루카의 죽음을 보고 마음을 돌린다. 2년 전에 죽은 아들로 상심한 파벨은 페트루카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런 페트루카를 압둘라가 죽이자 파벨은 복수를 결심한다. 파벨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이런 인간적인 모습 또한 소련 관객들에게 정서적인 호소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시대와 이국적 공간 속 이야기에서도 가족이라는 근원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이 가진 영향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수코프가 압둘라의 아내들을 적군 지휘관에게 인계하고 고향땅을 향해 가는 것으로 끝맺는다. 수코프가 나중에 아내를 만났는지, 아니면 어떤 불운에 의해 집에 돌아가지 못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이 열린 결말은 한편으로는 기나긴 혁명의 여정에 놓여있던 소련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적군 병사 수코프가 꿈꾸던 혁명의 이상은 오랜 역사적 실험 끝에 좌절되었다. 소련 영화의 확장된 영화적 영토인 '사막'은 그렇게 모험과 방랑, 표류의 공간으로 남았다.     



*사진 출처: eg.ru   수코프 역의 아나톨리 쿠즈네초프(
Anatoly Kuznets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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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짙은 분장을 한 남자는 카바레의 무대에서 강렬한 음률에 따라 노래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들을 늘어놓고 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면서 묻는다. '여기 대체 왜 온 거야?' 그리고는 말을 이어간다. '지금부터 난 말이지, 댁들을 신나게 놀려먹을 생각이거든!' 어째 영화가 첫 장면부터 심상치가 않다. 휴일, 느긋한 마음으로 영화 한 편 보려는 사람은 이 영화를 피하는 것이 낫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100분 동안 분노와 광기의 홍수를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고의 감독 고란 파스칼리예비치(Goran Paskaljević)의 '화약고(Bure baruta, 1998)'는 마케도니아의 극작가 데얀 두코프스키의 희곡 'Powder Keg'를 영화로 펼쳐놓았다. 원작의 제목 대신에 'Cabaret Balkan'이라는 영문 제목을 쓴 것은 이미 'Powder Keg'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발칸 카바레'는 뭔가 급조된 제목 같지만,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카바레 가수가 중간 중간 목놓아 부르는 절규 같은 노래의 가사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1990년대 중반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배경으로 촘촘히 짜나간다. 그 시기 발칸은 보스니아 내전으로 불타고 있었다.

  베오그라드의 밤 거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긴장시킨다. 등장 인물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양상은 다양하다. 부수고 때리는 물리적인 폭력부터 대부분의 대사에서 드러나는 언어적인 폭력, 신체적인 위협과 살인, 강간 시도에 이르기까지 영화 내내 폭력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애송이 젊은이는 길에서 차 사고를 내고 도망쳤다가 집을 찾아온 차주의 복수를 경험한다. 그 아파트 지하에는 보스니아 난민 가족이 겨우 연명해가고 있다. 늙은 가장은 버스 기사로, 그 아들은 마약상의 똘마니로 살아간다. 전직 교수가 모는 버스는 늦은 출발에 분노한 사이코 청년에 의해 탈취당한다. 그 버스 속 승객들은 잠시 동안 지옥행 특급을 경험하고, 거기서 겨우 빠져나온 젊은 여자는 애인과 다투다가 둘은 마약상의 인질이 된다. 버스 기사의 아들은 그 인질극의 조연을 담당한다. 마치 작은 지류들이 흐르다 급류를 만나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지듯 이 모자이크 직조화는 무차별적인 폭력과 광기를 담아낸다.

  등장 인물들은 화가 나 있고, 이성은 마비되어 있으며, 절망과 고통에 몸부림친다. 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이 영화를 인종 청소의 광기에 휩싸인 보스니아 내전의 참혹함과 연결지어 보는 관점은 일면 타당하다. 원작자 데얀 두코프스키(Dejan Dukovski)는 인터뷰에서 작가의 의무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굴절된 부분을 올바로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 데에 있다고 밝혔다(출처: critical-stages.org). 잘못된 정치 행태, 예를 들면 파시즘을 태동하게 만드는 집단적 무의식에 대한 감지와 기록이 작가의 본분이라고 그는 말한다. 두코프스키는 '광기'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발칸 내전의 끔찍한 양상들을 개별 인물들의 행동으로 재현한다. 특이한 점은 거기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애지중지하는 폭스바겐이 망가진 것을 본 차주는 가해자 청년의 집을 찾아가 모든 것을 다 깨부순다. 커피 마시며 좀 쉬고 있다 버스를 탈취당한 기사는 필사적으로 버스를 쫓아가 사이코 탈취범에게 죽음의 응징을 가한다. 단속에 걸렸다가 나쁜 경찰에 의해 고자가 되어버린 남자는 경관을 급습해 거의 산송장처럼 만들어 버린다. 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폭력의 발화는 그칠 줄 모르며 불길을 더해간다. 관객은 영화 내내 넘실거리는 분노와 광기를 목도한다.

  "발칸은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폭력이 흘러서 모이는 곳이지. 그래서 과다출혈처럼 전쟁이 터지는 거야."

  카바레 가수는 그렇게 읊는다. 그 피터지는 살육의 현장과 그 근방에 있는 이들은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 누군가의 폭력에 망가진 이는 어떤 식으로든 그 상흔을 또 다른 구성원에게 남기는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위협받는 생존에 대한 압박감은 모두를 광기의 레이스로 몰아넣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것을 형상화시켜서 보여준다. 차 휘발유 도둑으로 몰린 남자는 몰려나온 아파트 주민들에 의해 쫓기다 높은 철망을 오른다. 그가 마치 십자가의 예수처럼 양팔을 벌리며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가운데, 새어나온 휘발유에 붙은 불로 폭발이 이어진다. '화약고'는 결국 발칸 수난극을 완성하며 그렇게 막을 내린다.

  이 무지막지한 폭력의 서사시는 너무나도 어둡고 끔찍하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보스니아 내전을 치뤘던 유고 국민들의 내적 외상과 죄의식에 대한 심리적 보고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잔혹한 정치 지도자가 감행한 피의 내전, '화약고'는 그것이 드리운 길고 고통스러운 그림자를 여러 등장 인물들의 망가진 삶으로 재현한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이 영화가 건조하게 늘어놓는 폭력과 광기에는 그 어떤 탈출구도 찾을 수 없다. 고란 파스칼리예비치 감독은 발칸 지역의 특수성과 복잡한 역사로 얽힌 분쟁의 숙명을 '화약고'로 처절하게 그려낸다.



*사진 출처: sr.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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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KBS에서 방영된 자연 다큐멘터리 '완벽한 행성, 지구'를 보는데, 내레이션이 감성적이면서도 편안하게 들렸다. 다큐 중간에 해설자의 이름이 떠서 보니 배우 김승우였다. 대개 그런 자연 다큐멘터리들의 해설은 성우나 아나운서들의 몫이지만, 가끔은 배우들이 할 때가 있다. EBS에서 했던 3부작 자연 다큐 '천국의 새'에서는 배우 이혜영이 내레이션을 했다. 정말로 멋지고 완벽한 내레이션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걸 보면 배우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 '발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무성 영화 시절의 배우들은 그런 발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었다. 자막과 음악으로 처리되는 화면에서 배우들은 무성 영화에 특화된 표정과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은 무성 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 배우였다. 스완슨은 자신의 영화사까지 차려서 영화를 찍을 정도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유성 영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전 시기 배우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천하의 스완슨도 마찬가지였다. 1930년대 이후로 잠정 은퇴 상태였던 스완슨을 다시 불러낸 것은 빌리 와일더였다.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1950)'는 잊혀진 배우 스완슨을 완벽하게 복귀시켰다. 빌리 와일더는 이 영화에서 헐리우드 영화 산업에 대한 자신만의 음울하고 통렬한 성찰을 보여준다.

  헐리우드의 B급 시나리오 작가인 조(윌리엄 홀덴 분)는 살던 집의 집세가 밀리고 차까지 압류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어떻게든 글을 써서 먹고 살 방도를 찾으려 하지만, 정글같은 헐리우드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압류 회사 직원을 피해 차를 몰다가 우연히 막다른 길에 들어선 그는 황량한 외관의 대저택을 발견한다. 차만 숨기고 나오려던 그는 얼떨결에 집사(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분)의 안내로 주인과 만나게 된다. 조는 키우던 원숭이의 죽음으로 애통해하는 중년의 여자가 은퇴한 무성 영화 배우 노마 데스먼드임을 알아차린다. 여주인은 조가 시나리오 작가라는 말을 듣고 복귀작으로 집필중인 시나리오 원고를 맡긴다. 마지못해 일을 시작한 조는 점차 노마가 제공하는 돈과 안락한 삶에 익숙해진다. 현실과 담을 쌓고 과거의 영광에 도취해 살아가는 노마는 조에게 구애하고, 조는 그런 당혹스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시나리오 집필에 착수한다. 영화사 시나리오 담당인 베티와 함께 시나리오를 써나가는 조, 노마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조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영화는 풀장에 뜬 시신과 함께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조는 이미 죽었고, 영화는 죽은 자인 조의 시점에서 회고하는 6개월 전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 영화는 흔히 필름 느와르로 분류되는데, 과연 그렇게 보는 것은 타당할까? 확실히 영화의 분위기는 으스스하고 기괴하다. 노마가 살고 있는 대저택의 외관은 거의 버려진 폐가처럼 보인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격리된 장소, 그곳의 주인은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를 박제해놓은 집에서 살고 있다. 거실은 배우 시절의 사진 액자가 잔뜩 들어차 있고, 그곳에서 노마는 무성 영화 시절의 영화계 친구들과 가끔씩 카드놀이를 한다. 자신이 주연한 영화를 틀어놓고 보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이 은퇴한 여배우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단 한 가지, 젊음만이 없을 뿐이다. 자신이 늙었고, 다시는 영화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노마는 마치 화석처럼 살아가고 있다.

  빌리 와일더가 글로리아 스완슨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노마 역에 스완슨이 아닌 다른 배우를 쓸 수 있었을까?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후, 단절된 경력 속에서 잊혀진 배우 스완슨, 그리고 그의 집사 맥스로 나온 이는 무성 영화 시절을 대표하는 감독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이다. 대표작 'Greed(1924)'로 잘 알려진 이 감독은 실제로 스완슨이 만든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기도 했다. 노마가 집에서 감상하는 자신의 영화 'Queen Kelly(1932)'는 스트로하임이 연출한 작품이다. 스트로하임은 그 영화를 찍다가 제작비를 너무 많이 써서 스완슨에게 해고 통보를 받은 일이 있다. 빌리 와일더는 이전 무성 영화 시대의 쟁쟁한 인물들을 한데 그러모은다. 노마의 카드 놀이 친구로 등장하는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은 무성 영화 시절의 감독 겸 배우였고, 노마가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를 방문할 때 만나는 세실 B. 드밀(Cecil B. DeMille)은 무성 영화 시절에 스완슨과 함께 했고 유성 영화시절에도 명성을 날렸던 감독이었다.

  비극은 노마가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에 안주하지 못하고 현실로 틈입하려고 끈질기게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돈으로 굴복시킨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의 젊음과 사랑은 결코 노마의 것이 될 수 없다. 영화사에서는 늙어버린 여배우가 아닌 소품으로 쓰려는 노마의 비싼 클래식 자동차에 관심을 둘 뿐이다. 시들고 낡은 것은 버림받는다. 빌리 와일더는 영화 산업이 어떻게 자신의 영역 속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소모시키며 그것을 바탕으로 번영하는지를 노마와 그 주변인물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선셋 대로'는 빌리 와일더가 바라보는 헐리우드의 냉혹한 속성, 은막 뒤의 감춰진 것들에 대한 처절한 초상이며 성찰인 셈이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MGM의 제작자 메이어는 와일더가 영화 산업과 그 종사자들을 모독했다며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노마의 애완 동물로 살다가 죽은 원숭이가 비싼 관에 감싸여 정원에 매장된 것처럼, 원숭이를 대체하는 노리개감인 조 또한 풀장에 엎어진 시신으로 발견된다. 과거의 영광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여배우의 병적인 집착은 스스로를 살인범으로 만들며, 체포의 순간조차도 복귀 영화 '살로메'의 한 장면을 촬영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노마가 보여주는 과장된 표정과 손짓, 연기는 이 여배우가 새로운 시대에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 자체로 입증한다. 썩은 고기를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이 몰려들고, 영화계 가십을 전문으로 쓰는 칼럼니스트는 넋나간 여배우의 옆에서 신나게 기사를 전송한다. 그 칼럼니스트는 영화 '트럼보(Trumbo, 2015)'의 헬렌 미렌이 연기한 헤다 호퍼(Hedda Hopper) 본인이 맞다. 호퍼 자신도 무성 영화 시절에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배우였다. 호퍼는 무성 영화 경력을 마감하면서 영화계 주변에 떠도는 온갖 소문과 잡담을 쓰는 칼럼니스트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다.

  빌리 와일더가 그려낸 이 메타 영화(Meta-cinema)는 느와르와 로맨스, 심리 스릴러를 넘나들며 영화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인생을 재현(retrospection)하고 모방하는 영화는 결코 시들고 추한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마치 늘 새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흡혈귀처럼 끊임없이 먹어치우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생물체처럼 보인다. 글로리아 스완슨이 연기한 퇴락한 배우 노마와 영화 속 과거의 무성 영화 배우들, 영화계의 작은 소모 부품으로 존재하다 사라지는 조와 베티 같은 인물들은 거대한 영화 산업에서 생기는 부산물과도 같다. 이러한 영화 속 영화 이야기는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The Player, 1992)'와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 2001)' 같은 영화들에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빌리 와일더는 자신이 직접 겪은 영화계와 그 경험담을 토대로 무성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전환한 헐리우드 격변기에 대한 탐구를 '선셋 대로'로 풀어냈다. 결국 그가 파내어 팔아먹은 영화계 이야기는 빌리 와일더에게 경력의 전성기를 이어가게 했고, 자신만의 색깔을 찾지 못하고 주춤했던 윌리엄 홀덴에게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 영화로 눈부신 연기를 보여준 글로리아 스완슨에게 성공은 이어지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 영화는 스완슨에게 비춰지던 낙조(落照)였던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부와 명성을 가진 이 여배우에게 아쉬움은 없었을 것이다. '선셋 대로'에는 그렇게 영화와 그것과 함께한 이들의 인생, 스러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비탄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사진 출처: framerated.co.uk



** 연휴 잘 보내고, 수요일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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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신-정전자(God of Gamblers, 1989)'를 보고 나서 주윤발이라는 배우를 아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도박의 신'과 머리를 다쳐 아이처럼 되어버린 '초콜릿'을 오가는 그의 연기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정말이지 '천상 배우'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영화 '용호풍운(City on Fire, 1987)'은 그보다 2년 전 작품인데, 여기에서 주윤발은 좀 더 풋풋한 느낌의, 나중에 그가 대표할 홍콩 느와르 캐릭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흔히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2)'에 주요한 영감을 준 작품으로 좀 가볍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윤발과 홍콩 영화 팬들에게 이 작품은 뭔가 시금석처럼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제목만 검색창에 입력해 봐도 주르르 뜨는 '용호풍운'리뷰들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과연 무엇이 그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만들었을까?

  영화는 번화한 홍콩의 상점가에서 한 남자가 칼에 찔려 죽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범죄 조직에 잠입한 비밀 경찰로 정체가 탄로나면서 살해당했다. 유 경위는 잠정 은퇴한 경찰 가오추(주윤발 분)에게 임무를 주려고 하지만 가오추는 거부한다. 이전의 작전에서 친했던 조직원이 자신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유 경위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일을 시작하게 된 가오추, 그는 보석 강도단에 잠입해서 조직원 아후(이수현 분)와 친형제처럼 가까워진다. 그러나 가오추의 정체를 모르는 신임 경위 존은 가오추를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유 경위와 존은 사사건건 대립한다. 크리스마스에 크게 한탕을 하려는 조직과 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경찰, 가오추는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까...

  '저수지의 개들'을 본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내게는 영화의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하다. 사실 '용호풍운'을 보면서 떠오른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였다. 두 영화는 범죄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 비극적 죽음을 맞는 결말을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들이 맺는 유사 부자(父子) 관계도 동일하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가오추는 어떻게든 평범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연인과 결혼도 앞두고 있다. 그런 그가 다시 일을 시작한 이유는 유 경위와의 관계 때문이다. 유 경위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는 가오추는 자신의 아저씨가 신임 경위와 힘겨운 경쟁을 치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죽은 경찰의 장례식에서 울부짖는 유가족의 모습을 보게 된 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는 정의를 실현하려는 불타는 신념 때문이 아니라, '아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일을 떠맡는다. 가오추와 유 경위의 관계는 '디파티드'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빌리와 퀴넌 경감 사이와도 같다.

  유 경위의 '아들' 가오추는 조직에 들어가서는 아후와 새로운 '형제'가 된다. 아버지는 경찰, 형제는 강도인 가오추에게 조만간 결단의 순간이 오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이미 가오추는 이전의 임무에서 아버지를 위해 동고동락했던 조직원을 배신했다.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가오추는 보석상을 털다가 총에 맞은 아후를 위해 존의 부하 경찰을 쏜다. 그는 자신의 '형제'를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했다. '용호풍운'은 홍콩 느와르를 지탱하는 주된 정서가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관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리, 또는 신의로 포장된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가족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가오추가 잠입한 보석 강도단 내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조직의 신임을 얻은 가오추는 교외에 위치한 강도단의 아지트에 들어가는데, 그들은 같이 숙식을 하며 유사 가족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특히 내 눈길을 끌었던 흥미있는 장면은 유 경위가 존의 사무실에서 말다툼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이유는 사무실 한 쪽 면을 차지하고 있는 '관우' 상의 존재 때문이었다. 개인의 방이 아니라, 관공서인 경찰서에 어떻게 관우 상이 자리할 수 있을까? 관우는 중국 민간 신앙에서 신으로 추앙받지만, 특히 홍콩 사람들에게 관우는 더욱 각별하다. 경찰서와 파출소에 관우 상을 두는 이유는 무신 관우의 힘을 빌어 악한 범죄자들을 검거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다. 가족주의와 함께 도교 신앙의 큰 영향력이 미치는 '홍콩'이라는 지역색은 '용호풍운'을 다채롭게 만든다. 함께 숙식하는 보석 강도단의 주 무기는 식칼이며(그들은 총을 어렵게 구한다), 인구밀도가 조밀하기로 소문난 홍콩의 대로변에서 자동차를 이용한 제대로 된 추격신은 찍기 어려우니 파쿠르(parkour, 도시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이동 방법)가 등장한다. 가오추는 존의 부하들을 따돌리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난간을 타고 내려오는가 하면, 높은 건물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34년 전에 만든 이 홍콩 느와르 영화는 군데군데 헛점이 있으며, 거친 편집과 촬영이 촌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원작을 만든 임영동(林嶺東, Ringo Lam) 감독은 이후 제작될 비슷한 이야기의 영화들에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 강한 정서적 연대로 엮인 남자들의 세계, 서로에게 총을 겨눌 수 밖에 없는 경찰과 범죄자,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 등장인물들, 그 모든 것의 원형이 '용호풍운'에 날것으로 들어 있다. 2년 뒤에 만들어진 오우삼의 '첩혈속집(Hard-Boiled)'에서 주윤발은 범죄자로, 이수현은 경찰로 나와서 '용호풍운'의 배역을 서로 바꾸어 연기한다. 이 징한 느와르 변주곡은 그후로도 계속 이어질 참이었다. 결국에는 닳아진 국그릇 밑바닥처럼 되었지만, 그 영화들과 젊은 시절을 함께 한 관객들에게 '용호풍운'과 같은 영화들은 비평적 텍스트가 아니라 인생의 추억으로 자리한다. 절절한 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젊은 날, 그것이 많은 블로거들에게 홍콩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사진 출처: hk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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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가끔 영화를 본다는 것이 권투 선수가 링에 오르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상대편 선수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없이 무작정 링에 올라서 시합해야 하는 느낌. 어떨 때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경기를 끝내지만, 때론 상대방의 강타에 휘청거리다 링을 나오는 때도 있다. 나에게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 감독은 선수로 치자면 상대편을 무척 진이 빠지고 힘들게 만드는 무척 까다로운 대전 상대다. '피아니스트(The Piano Teacher, 2001)', 히든(Hidden, Caché, 2005)을 보면서 그 암울하고 출구 없는 세계관이 참 싫었더랬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 양반 영화는 그냥 안보고 피하게 되었다. 그러다 오늘은, 그동안 좀 쉬운 선수들을 만났으니 약간은 좀 긴장 좀 해보자 싶었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Fragments of a Chronology of Chance, 1994)'을 그렇게 영화 감상의 링 위에서 만났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Short Cuts, 1993)'과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Elephant, 2003)'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다지 새로운 것은 없다. 솔직히 '어, 좀 약한데?'라고 슬쩍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상을 바라보는 하네케만의 디스토피아적 관점은 관객을 진흙탕으로 무작정 끌고 들어간다. 영화는 파편화되고 분절화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진다. 그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방송 뉴스 화면이 흘러 나온다. 뉴스들의 내용은 당시 분쟁 지역들과 관련된 소식이다. 보스니아와 소말리아, 아이티의 내전 소식, IRA와 쿠르드 반군의 전투, 유럽의 이민자들 문제며 유고슬라비아의 인종 청소,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소식까지 망라한다. 전혀 관련이 없는 이들의 일상은 암전(blackout)화면에 이어 연결된다.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은 루마니아 소년, 고아원 아이를 입양하려는 중년의 부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보안회사 직원과 그 아내, 가족의 무관심 속에 홀로 지내는 외로운 노인, 불만이 가득한 대학생이 각각의 에피소드를 끌어간다.

  1993년 10월에서 12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 빈을 배경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은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에 은행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엮인다. 1시간 35분의 러닝타임에 마지막 15분 가량의 결정적 순간을 향해 가기까지 영화는 더디고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시간이 정말로 느리게 간다고 느끼게 된다. 관객은 외롭고 아픈 노인이 냉담한 딸에게 쏟아내는 폭풍같은 불평의 전화와, 대학생이 탁구 연습을 하는 롱테이크를 명상하듯 응시해야만 한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라고 계속 질문을 던질 때마다 뉴스 보도 화면이 딱딱 맞춰 나온다. 전쟁과 참혹한 살상의 소식은 고립된 인물들의 일상과 병치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다. 노인이 딸(은행원)을 만나는 곳은 자신의 연금을 찾는 은행 창구이며,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를 입양한 부부는 가벼운 대화나 접촉도 거부하는 아이의 폐쇄성에 좌절한다. 국경을 넘은 소년은 도둑질과 거리 생활에 익숙해지며 부랑아가 된다. 거리를 헤매는 이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 영화에는 하네케의 주요 관심사인 미디어, 인간 사이의 소외와 단절, 폭력에 대한 성찰이 잘 드러나 있다.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뉴스 화면은 매우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보는 이들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소식들에 무감각해진다. 그 누구도 화면 속에서 재현되는 폭력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없다. 미디어는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고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단절시키고 고립시킨다. 전화통을 붙들고 딸의 무관심을 꾸짖는 외로운 노인의 옆에는 TV가 켜져있고 계속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조용히 통화하려면 TV를 꺼야하지 않을까? 이 노인은 밥 먹을 때도 TV를 켜놓는다(사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한다). 노인에게 미디어는 세상과의 소통이 아닌, 아무 의미 없는 배경 소음으로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 눈길을 끄는 흥미있는 장면이 있다. 바로 대학생들이 계속 반복해서 하는 조각 퍼즐 놀이이다. 잘라진 종이 조각을 맞추어 하나의 형태로 완성하는 것인데, 그들은 퍼즐을 완성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결국 그 퍼즐을 완성하는 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그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영화는 조각난 이야기들을 '우연'이라는 요소로 그러모아 마침내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한다. 고장난 현금 인출기에서 돈을 빼내지 못한 대학생은 갑자기 총을 들고 은행에 들어가 난사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실제 있었던 그 사건에서 범인의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하네케는 그 사건을 이 영화의 마지막으로 선택했다. 희생자가 된 이들이 무심히 보았던 뉴스는 다시 그들의 비극을 방송으로 송출한다. 그렇게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 폭력은 일상에 스며들어 빠르게 재생산된다.

  하네케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차갑고 건조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존재이며, 고립과 단절은 인간의 숙명이다. 미디어가 그런 인간을 이어주고 더 나은 곳으로 안내해줄 거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쏟아내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뉴스들은 사태를 제대로 성찰할 이성을 마비시켜 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방송되었던 뉴스가 똑같이 반복되어서 재생되는 장면은 그 악순환의 틀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돌아오게 되는 하네케 영감님의 암울한 닫힌 세계가 궁금한 이들은 한 번 감상해 보기 바란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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