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19세기 미국 서부에는 Gold rush뿐만 아니라 Silver Rush도 있었다. 1859년, 'Comstock Lode'로 불리는 은광맥이 네바다주 버지니아 시티에서 발견되었다. 아주 짧은 기간 융성했던 골드 러시의 끝물에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인생역전을 꿈꾸며 네바다로 몰려들었다. 엄청나게 몰려든 사람들로 네바다에는 여러 광산 도시들이 생겨났다. 열기는 18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잦아들었다. 광맥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이제 네바다 사람들은 광산업이 아닌 목축업으로 전향해서 삶의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영화 '옥스 보우 사건'은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원작자 Walter Van Tilburg Clark(1909-1971)는 네바다에 위치한 가상의 마을 Bridger's Wells에서 일어난 린치 사건을 그려낸다. William Wellman 감독은 이 소설을 무척 좋아해서 영화까지 만들게 되었다. 

  1885년, 겨울에서 이제 막 봄으로 넘어갈 무렵의 네바다 시골 마을 Bridger's Wells. 친구 사이인 방랑자 카우보이 길 카터(헨리 폰다 분)와 아트 크로프트는 마을에 도착해 선술집을 찾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은 최근 소도둑들의 출몰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길과 카터는 외부인인 자신들이 괜한 의심을 받을까봐 저어한다. 그런 가운데 마을에서 존경받는 목장주 킨케이드의 살해 소식이 술집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소도둑들의 소행이라고 여긴 마을 사람들은 보안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급하게 자경단을 꾸린다. 길과 카터는 마을 사람들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경단에 합류한다. 자경단은 마을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옥스 보우(소의 목에 거는 멍에와 닮은 구릉 지대에 붙인 이름)에 도착한다. 그들은 곧 그곳에서 도둑 패거리로 의심되는 세 명의 남자를 보게 된다. 자경단을 이끄는 목장주 테틀리는 그 세 명이 범인이니 교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영화 속 마을 자경단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캐릭터는 '마 그리어(Ma Grier)'로 불리는 여성이다. 나이든 여장부처럼 보이는 마는 거친 말투에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낸다. 원작 소설에서도 마 그리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다. '키가 작고 뚱뚱하고 못생긴' 이 여자를 마을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 모두가 다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한마디로 비호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이 캐릭터를 작가는 자신이 실제로 시골 선술집에서 본 인물을 떠올리며 만들어 냈다. 그런 마 그리어의 모습은 이 여성이 거친 서부의 삶에서 자신의 성 역할(gender role)을 지배적 남성성으로 대체했음을 보여준다.

  이 황량한 서부의 마을에는 젊은 여자들이 없다. 길은 전 여자친구 로즈 메이펀을 찾아 마을에 왔다. 그런데 그는 로즈가 마을의 나이든 기혼 여성들에게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술집 주인은 이 마을에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은 82세의 장님과 인디언 뿐이라고 말한다. 로즈와 같은 젊은 여성은 서부를 떠나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 옥스 보우로 가는 도중에 길은 도시 남자와 결혼한 로즈와 마주친다. 독하고 늙은, 자신의 여성성을 힘을 휘두르는 남성성으로 대체한 마 그리어 같은 여성만이 그곳의 삶에 적합하다. 마 그리어는 테틀리가 주도한 린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이런 마 그리어와는 대립되는 지점에 전복된 젠더 역할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또 있다. 테틀리의 아들 제랄드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자경단을 따라나선다. 테틀리는 유약한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터였다. 소설에서 제랄드는 여자 아이 같다고 묘사된다. 그런 제랄드에게 테틀리는 남자다움을 강조하고 그것을 습득하도록 밀어붙인다. 어떤 면에서 테틀리에게 이 자경단의 여정은 아들을 그가 생각하는 '진짜 남자'로 만드는 훈육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는 아들에게 린치의 실행을 지시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과연 마을 자경단에 의해 교수형 당할 위기에 처한 세 명의 남자들은 정말로 목장주 킨케이드를 죽이고 그의 소를 훔쳤을까? 그들을 둘러싼 정황 증거들은 매우 불리하다. 젊은 남자 마틴은 킨케이드로부터 샀다는 소들에 대한 매매 영수증이 없다. 멕시코인 후안이 숨기고 있었던 총은 킨케이드의 것으로 판명된다. 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힘없는 영감은 강도로 몰린다. 세 남자에 대한 심문을 주도한 테틀리는 정의의 실현를 내세우며 린치를 결정한다. 길은 그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당하지 못하다고 느낀 그는 테틀리에게 반기를 들지만, 곧 다른 자경단원들에게 총을 빼앗기고 제압당한다.

  길이 강력한 항의로 테틀리의 자의적 정의에 반대를 표시했다면, 침착하고 온화한 주민 데이비스는 유화적 방식으로 린치를 저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틴이 아내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를 자경단원들에게 읽어줌으로써 마틴이 진실된 사람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마틴은 그런 데이비스의 시도를 자신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하고 비겁한 행동이라고 여긴다. 편지를 먼저 읽어본 데이비스는 마틴이 무죄임을 직감한다. 그럼에도 직접적으로 테틀리와 일행을 저지하는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마틴은 데이비스를 이렇게 비난한다.

  "I thought there was one white man among you. But I was wrong."
  (나는 당신들 가운데 제정신 박힌 올바른 사람이 있는 줄 알았지. 근데 내 생각이 틀렸어.)

 
이 문장에서 'white man'은 온전한 양심을 가진 선인을 의미한다. 분명 데이비스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그런 그에게는 용기가 결여되어 있다. 린치를 막기 위해 데이비스가 취하는 소극적 행동들은 유약한 남성성을 보여준다.

  결국 세 남자는 죽음에 이른다. 돌아오는 길에 자경단원들은 보안관과 함께 있는 킨케이드를 본다. 킨케이드는 살아있었다. 마을로 돌아온 테틀리는 제랄드의 비난을 들은 직후,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테틀리의 최후는 영화와 소설이 동일하지만, 테틀리가 선택한 죽음의 의미는 그 결이 서로 좀 다르다. 소설에서 테틀리는 아들 제랄드의 자살 소식을 듣고 자신도 곧 그 뒤를 따른다. 테틀리의 자살은 제랄드가 자신이 바라는 남자가 되지 못했다는 점, 아들을 위해 시도했던 모든 것이 실패였음을 자인하는 데에서 오는 절망이다. 이는 자신이 주도한 잘못된 린치에 대한 부채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테틀리 부자(父子)에게 닥친 비극은 테틀리의 독단적이고 파괴적인 남성성이 가져온 귀결이다. 

  작가 Walter Van Tilburg Clark는 득세하고 있는 나치 세력을 보며 이 소설을 썼다. 그가 보기에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폭력에 유럽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그 거대한 불의와 폭력에 맞설 것인지 작가는 고민했다. 데이비스의 유화적인 방식(소설 속에서 데이비스는 총을 가져가라는 테틀리의 요청을 거절한다)으로는 불법적 폭력 행위인 린치를 막지 못한다. 클라크는 소설에서 린치를 주도한 테틀리보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데이비스에게 윤리적 책임의 무게를 더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야만과 폭력에 맞서야만 할까? 어떤 면에서 그 질문은 폭력의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남성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윌리엄 웰먼 감독의 '옥스 보우 사건'은 원작자의 의도를 충실히 드러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는 독선과 편견을 가진 지도자와 군중,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폭압적 사태를 인지하게 만든다. 정의는 실현되지 못했고,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만 있을 뿐이다. 방관자들의 좌절감으로 가득찬 이 뒤틀린 서부극에는 나치 독일과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사진 출처: tc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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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재현된 현대 기독교 소설 장르의 변형과 이탈

 

Redeeming Love(2022), D. J. Caruso



  영화의 제목 'Redeeming Love'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구속(救贖)의 사랑'이 될 것이다. 이 '구속(redeem)'이란 개념은 비기독교도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 있다. 그것을 풀어서 표현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는 사라졌고 신의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영화 제목부터가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렇다. 이 영화는 기독교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무려 300만 부가 팔린 소설이다. 도대체 어떤 기독교 소설이길래 그런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아주 거칠고 간명하게 영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850년대 서부 캘리포니아, 불행한 운명의 매춘부 앤젤과 그런 앤젤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농부 마이클의 이야기. 여자 주인공 이름이 천사(Angel)이고, 남자 주인공의 성씨는 무려 호세아(Hosea, 구약 성서의 예언자)이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뭐 맹물같은 성경 이야기의 현대 버전이겠구먼, 할지도 모른다. 속단은 금물이다. 교회 사람들과 이 영화 같이 보러 갔다가는 영화관 나와서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헤어질 수 있다. 원작 소설의 작가 Francine Rivers는 기독교 소설에 화끈한 로맨스를 결합시킨다. 매춘부, 매음굴, 근친상간, 소아성애, 낙태, 폭력과 강간... 도대체 기독교 소설에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이 들어갈 수 있나 싶겠지만, 그것이 다양한 하위 장르로 분화된 현대 기독교 소설(Christian novel)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17세기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나 헨리크 센케비치의 '쿠오 바디스(Quo Vadis)'는 그 장르의 먼 과거에 해당한다.

  영화는 골드 러시로 흥청거리는 서부 정착촌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그 지역에서 최고로 인기가 많은 창부 앤젤은 잔혹한 포주 밑에서 희망없는 삶을 이어간다. 그런 엔젤에게 순박한 청년 농부 마이클이 나타난다. 이 남자는 앤젤을 사랑한다면서 결혼해달라고 말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앤젤은 마이클을 밀어내지만, 남자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조금씩 마이클에게 마음을 열게된 앤젤은 마이클의 농장에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클의 매형 폴이 찾아오고 폴은 앤젤의 과거를 들먹이며 마이클과 헤어질 것을 종용한다. 앤젤은 고통스런 과거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원작자 프랜신 리버스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서부'를 온갖 죄와 악덕의 구렁텅이로 묘사한다. 금을 찾기 위해 몰려든 남자들은 앤젤과의 동침을 꿈꾸며 번호표 당첨의 기회를 열망한다. 그들이 내는 화대(花代)는 고된 노동의 산물인 '사금'이다. 욕정을 만족시키는 댓가로 금가루를 지불하는 그곳에 처절하게 고통받는 한 여성이 있다. 이 여자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비극이었다. 어머니는 유부남과의 관계에서 앤젤을 낳았다. 버림받은 앤젤의 엄마는 매춘부로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 그리고 어린 앤젤은 사창가에 팔렸다. 주인공 앤젤이 살아온 지독한 수난극 같은 인생에 구원자 마이클이 홀연히 등장한다. 마이클은 더러운 서부의 지옥도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고 순결한 인물이다. 마이클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앤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마이클의 앤젤에 대한 감정을 진정한 사랑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고통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신앙적 사명감의 측면이 더 크다.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은 앤젤에 대한 사랑을 신의 계시와 섭리로 생각한다. 그는 일방적으로 앤젤에게 다가서며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삶의 큰 틀에 앤젤을 포섭하려고 한다.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을 언급하는 이 남자의 집념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을 준다. 영화에서 앤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수치심으로 온전히 한 인간, 여성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앤젤이 강물에서 피가 나도록 마구 피부를 문지르며 씻는 장면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런 앤젤과 정반대의 대비되는 지점에 마이클이 서있다. 완벽하고 순결한 배우자, 구원자인 마이클은 앤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해심을 보여준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람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작가 Francine Rivers의 개인적 삶에 들어 있다. 리버스는 로맨스 소설로 자신의 글쓰기 경력을 시작했다. 1947년생인 이 작가는 마흔이 될 무렵, 인생과 경력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만난다. 독실한 기독교도로 거듭난 것이다. 더이상 그저 그런 싸구려 로맨스 소설 따위는 쓸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리와 신의 섭리를 전파하는 도구로써 글을 써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런 결심을 한 후에 쓴 작품이 바로 'Redeeming Love(1991)'였다. 이 소설은 구약 성서의 '호세아서(Book of Hosea)'에서 주요한 플롯을 따왔다. 14장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예언서는 예언자 호세아가 신의 명령에 따라 창녀 고멜과 결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창부 고멜은 이교도의 신 '바알'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리버스의 소설 '구속의 사랑'은 순박한 농부 마이클 호세아와 창녀 앤젤의 관계를 통해 무조건적인 신의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선정적이고 적나라한 표현과 설정도 성서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미명하에 쉽게 용인된다. 성서와 로맨스의 이 기묘한 결합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상업주의적인 면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원죄를 지닌 인간의 비참함과 추악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폭력과 성에 대한 묘사의 수위가 높아진다.

  "새라, 그게 내 진짜 이름이에요."
   (My real name is Sarah.)

  영화 내내 '앤젤(Angel)'로 불리던 여자 주인공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이 지겨운 영화가 끝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러닝타임 2시간 14분은 정말이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었다. 앤젤의 진짜 이름 사라는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아브라함의 아내이며 이삭의 어머니. 그 작은 뿌리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무수한 별처럼 뻗어나갔다. 불임이었던 앤젤은 아이를 갖게 되고 마이클과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영화 'Redeeming Love'는 그렇게 끝난다. 현대 기독교 소설 장르의 기묘한 변형과 일탈적 면모가 어떻게 영화로 구현되었는지 궁금한 이라면 한번 볼 법도 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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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그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했다."
  (No one really knew the truth of the matter.)
  Jean Le Coq, Parisian lawyer, 14세기


  미국의 중세 문학 연구자인 Eric Jager는 14세기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인 Jean Froissart의 책에 매혹되었다. 1386년,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중세 시대의 마지막 결투를 기록한 책이었다. 에릭 재거는 연대기 작가가 펼쳐놓은 이야기를 따라 자신만의 학구적 여정을 시작했다. 무려 10년에 걸쳐 그는 두 명의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시대에 대해 탐구했다. 그런 후에 낸 책이 'The Last Duel: A True Story of Crime, Scandal, and Trial by Combat in Medieval France(2004)'였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마지막 결투: 중세 프랑스에서 있었던 범죄와 스캔들, 그로 인한 싸움이 촉발한 재판의 실제 이야기'가 되겠다. 팔순을 넘긴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 책을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 'The Last Duel(2021)'은 연대기적 구성에 의해 기술된 책과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결투 사건의 중요한 세 인물, 장 드 카루주, 자크 르 그리, 마그리트의 시점에서 사건이 각각 펼쳐진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Rashomon, 1950)'을 떠올리게 된다.


  'The Last Duel'의 뼈대를 이루는 사건은 이러하다. 14세기 프랑스,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 그리는 피에르 백작을 주군으로 섬기는 가신들이다. 둘은 친한 친구 사이였으나 주군의 총애가 르 그리에게 치우치면서 멀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카루주는 아내 마그리트로부터 르 그리에게 강간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분노한 카루주는 행동에 나선다. 당시 봉건제 치하에서 지역 사법 재판의 관할권은 영주에게 있었다. 르 그리를 총애하는 피에르 백작은 카루주가 제기한 소송을 가볍게 기각한다.

  생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낸 50대 전사는 그대로 물러앉지 않았다. 파리로 가서 국왕을 알현하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결정적 증거의 유무였다. 국왕의 명에 따라 열린 재판에서 마그리트는 분명하고 일관되게 자신이 입은 피해를 증언했다. 그에 대해 자크 르 그리는 알리바이를 대며 그 모든 것은 자신을 시기한 카루주와 그 아내의 모함이라고 맞섰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책의 저자 에릭 재거는 마그리트에 대한 신뢰가 책을 쓰게 쓰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리들리 스콧 감독도 마그리트의 증언에 마음이 기운듯 하다. 영화 속 마그리트의 이야기에 해당하는 세 번째 장에 'The Truth'라는 소제목을 붙인 것을 보면 그렇다.

  카루주가 보기에 자크 르 그리는 주군에게 아첨하는 소인배이며, 아내 마그리트를 강간한 천인공로할 범죄자이다. 자크 르 그리의 입장에서는 카루주와의 애정없는 결혼 생활에 지친 마그리트와 사랑에 빠져 합의된 관계를 맺은 것 뿐이다. 르 그리의 속마음을 그려낸 영화의 그 부분은 에릭 재거의 책과는 다르게 각색되었다. 재거의 책은 장 프와사르가 기록한 연대기를 바탕으로 하는데, 거기에는 르 그리의 변호인이었던 Jean Le Coq의 상세한 기록이 나와있다. 르 그리는 일관되게 자신의 범죄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므로 르 콕은 자신의 의뢰인을 의심하면서도 확신은 하지 못했다. '아무도 그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했다'고 쓴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한 명은 아내가 당한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한 명은 그것이 강간이 아닌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사건의 당사자인 여성은 명백한 강간이라고 말한다. 영화 'The Last Duel'은 관객들로 하여금 안개 속에 있는 진실의 실체를 탐색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분할된 이야기 구성이 그다지 효용성이 없다는 데에 있다. 리들리 스콧은 그것이 뭔가 대단하고 의미있는 시도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처음으로 해본 이는 선구자('라쇼몽'의 구로사와 아키라)가 되지만, 그걸 그대로 따라하면 어설픈 짝퉁이 된다. 스콧의 영화에는 먼저 시도한 이와의 독창적인 차별점이 없다.

  영화 'The Last Duel'은 맥아리 없이 변주되는 이야기와 그저그런 볼거리로 채워진 기사 무용담이 뒤섞여 있다. 이 무너져 내리는 서사의 문제점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시나리오이다. 벤 애플렉과 맷 데이먼은 남자의 관점에서 두 챕터의 시나리오를 썼고, 여성 시나리오 작가인 Nicole Holofcener는 마그리트 부분을 담당했다. 일부러 사건을 더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책에는 없는 부분이 덧대어 지면서 영화는 산으로 간다. 예를 들면 르 그리와 마그리트가 연회장에서 대화를 나눈 장면, 르 그리가 시장에서 마그리트를 우연히 보게 되는 장면, 마그리트가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 때문에 남편에게 질책을 당하는 장면, 마그리트가 르 그리를 미남이라고 말했다는 마그리트 친구의 증언 같은 것들. 실제 연대기의 기록에는 마그리트와 르 그리는 공식적으로 단 한 번 만났을 뿐이며, 영화 속 마그리트의 친구가 한 증언 같은 것은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사건의 정확한 기록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원작인 에릭 재거의 책을 찾아 보았다. Random House의 영문본은 약 83페이지 분량이다(이 책은 번역본이 작년에 출간되었다). 의외로 글이 술술 읽히고 흡인력이 있다. 책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면면과 시대 상황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영화에서 맷 데이먼이 연기한 기사 장 드 카루주는 그야말로 치열한 전장에서 구른 백전노장이다. 그는 매우 거칠고 직설적인 인물이었다. 아내의 지참금으로 받을 몫이었던 땅 '오누 르 포콩(Aunou-le-Faucon)'을 두고 주군 피에르 백작과 벌인 소송전은 그 단적인 예이다.

  그의 장인 Thibouville은 왕위 계승권자들의 다툼에서 샤를 5세의 반대편에 섰던 이였다. '배신자'라는 오명이 있는 그의 딸 마그리트를 카루주가 아내로 맞아들인 이유는 명확했다. 지참금으로 받을 재산이었다. 오누 르 포콩은 아내 몫으로 남겨졌지만, 피에르 백작은 그것을 탐냈다. 백작은 정당하게 값을 치루고 땅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것을 르 그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카루주의 르 그리에 대한 원한은 아마 거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카루주의 첫 부인에게 얻은 아들의 대부가 르 그리였을 정도로 두 사람은 친밀했다. 이후 첫 부인과 아이들이 불운하게 세상을 뜨면서 카루주는 심리적 타격을 받았다.

  티부빌의 딸 마그리트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 카루주에게 땅과 돈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지참금이 될 노른자위 땅이 백작에게 넘어가자 카루주는 주군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결과는 패소였다. 봉건제 사회에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주군에게 반기를 드는 가신의 행태는 비우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카루주는 땅을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 집안 대대로 내려온 벨렘 성의 대장직이 르 그리에게 넘어갔다. 피에르 백작은 카루주의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직위를 카루주에게 주지 않았다. '기사'였던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던 르 그리는 주군의 총애를 바탕으로 차츰 영향력을 키워갔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카루주를 격노하게 만들었다.

  르 그리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카루주의 아내를 범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에서처럼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카루주는 불 같은 성미의 사람이었고, 르 그리에 대한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표출했을 것이다. 아마도 르 그리는 카루주에게 모멸감을 안겨주기 위해 마그리트에 대한 범죄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 르 그리는 마그리트에게 그 일을 발설하면 남편이 당신을 죽일 거라며 협박한다. 마그리트도 자신의 남편이 거친 성품의 사람임을 알았다. 하지만 여자는 결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우리의 눈에 무지막지하게 보이는 중세 시대에도 강간은 중범죄였다. 그것을 고발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여성들은 한정되어 있었고, 마그리트는 그럴만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소송을 하는 일은 평생을 따라다닐 낙인, 가문의 명예, 태어날 아기(마그리트는 그 사건 이후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의 미래, 그리고 부부의 목숨을 담보로 했다. 영화의 마지막 결투 장면에서 마그리트는 족쇄에 묶여 남편과 르 그리의 결투를 본다. 그 싸움에서 남편이 지면 마그리트는 무고죄로 화형을 당할 운명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결투는 신의 뜻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였다. 그것이 즉각적으로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사법부는 함부로 결투를 결정할 수 없었다. 사건의 진상을 두고 양측의 진술이 엇갈리는 가운데 카루주는 최후의 수단으로 결투를 제청했다. 그즈음, 샤를 5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17살의 샤를 6세는 영국을 상대로 원정길에 나섰다. 사법부는 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하루빨리 재판을 마무리짓고 싶어했다. 결국 카루주의 청이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중세 시대의 마지막 결투가 되었다(물론 그 이후에도 결투는 있었지만 공식적인 재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방 영주의 관할 지역에서 일어났다).

  영화는 연대기의 기록을 충실히 재현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기사들의 투구가 얼굴 전면을 감싸도록(부상의 위험을 생각하면 당연하다)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영화는 얼굴 반면이 노출되도록 찍었다. 주연 배우들의 얼굴이 드러나야 박진감이 넘치기 때문이다. 결투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 가늠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카루주가 르 그리에 비해 전장터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지만, 기록은 르 그리가 카루주에 비해 더 큰 체격 조건을 가졌다고 되어있다. 결국 승리의 여신은 카루주에게 미소를 지었다. 결투를 보기 위해 프랑스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 샤를 6세는 원정을 포기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왕은 어린 왕세자를 병으로 잃은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영화에 나오지 않은 르 그리의 최후는 이러하다. 흙바닥에 널부러진 르 그리의 시신은 말에 끌려가 'Montfaucon'의 교수대에 내걸려졌다. 몽포콩은 교수형된 시신이 내걸리는 곳이었다. 르 그리의 패배는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신의 처벌로 받아들여졌다. 결투에서 승리한 카루주는 왕의 신임을 받고 왕실의 주요 일원이 된다. 이 불굴의 용사는 다시 한 번 주군 피에르 백작을 상대로 오누 르 포콩 땅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다. 소송은 패배했다. 어떤 면에서 그가 가문의 명예와 목숨을 내걸고 결투까지 하게 된 것은 아내 마그리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면보다는, 자신의 것(그 시대에 아내는 남성의 재산, 소유물로 간주되었다)을 건드린 데에 대한 보복의 집념이 더 커보인다.

  이후 이 사건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다르게 읽히고 변조되었다. 후대의 호사가들과 문인들에게 르 그리는 무고한 희생자로 여겨졌다. 카루주와 르 그리의 '마지막 결투'는 중세 시대의 무지와 악습을 부각시키는 대표적인 사건이 되었다. 마그리트는 남편을 부추겨 죄없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 '간악한 여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사전(Diderot and d'Alembert's Encyclopedie, 1707)'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것은 그대로 이어져 1992년에 중세  연구자 R. C. Famiglietti도 자신의 저서에서 마그리트를 간교한 베갯머리송사의 주인공으로 묘사했다. 에릭 재거의 책은 그와는 반대되는 지점에서 마그리트의 입장을 옹호한다.

  영화 'The Last Duel'은 흥행에서 참패했다. 이를 두고 리들리 스콧은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사는 요즘 애들(the box office failure is the fault of young people and their cellphones, he says: 출처 variety.com) 때문'이라고 탓했다.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노감독의 경멸이 느껴지는 대목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다 떠나 그는 영화를 잘 만들지 못했다. '왜 내가 좋은 영화 만들었는데 알아주지 않는 거냐'고 볼멘 소리를 해도 별로 공감이 되지 않는다. 정말이지 원작이 된 책이 훨씬 재미있게 읽힌다면야 말 다한 거 아닌가.

  그럼에도 영화 'The Last Duel'은 잊혀져 있었던 중세 시대 여성 마그리트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마그리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편의 변호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다시 르 그리의 변호인 르 콕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아무도 그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그가 세세하게 남긴 기록에서 후대의 사람들은 한 여인의 용기있는 외침과 불의에 저항하는 의지를 읽는다. 이 여자를 둘러싼 상황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배신자의 딸이라는 불리한 오명, 가문과 남편을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비난, 태어날 아이가 평생 지고갈 삶의 무게,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마그리트는 침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여자는 '피해자(victim)'가 아닌 '생존자(survivor)'가 되었다. 그것은 기나긴 고통의 여정이었다. 영화를 보는 이들은 마그리트가 들려주는 진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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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정서, 나루세 미키오가 건네는 유년의 편린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매우 과묵한 사람이었다. 그와 여려 편의 영화에 함께 한 여배우 타카미네 히데코는 후일 이 감독에 대해 회고하기를 '좀 무서웠다'고 했다. 주연 배우에게조차 그는 별다른 연출 지시를 하지 않아서, 타카미네 히데코는 자신의 감을 믿고 그냥 연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의 짧은 결혼 생활과 이혼, 그리고 꾸준히 영화 경력을 이어간 것 이외에 그의 사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그의 자전적 편린이 들어있는 영화가 '秋立ちぬ(Autumn Has Already Started, 1960)'이다. 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가을이 다가온다' 쯤이 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12살 소년 히데오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뜨거운 한여름, 도쿄에 이제 막 도착한 엄마와 아이를 보게 된다. 히데오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삼촌집을 찾아 간다. 허름한 뒷골목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는 삼촌. 엄마는 히데오를 맡기고 근처 여관에 일자리를 얻는다. 가장이 세상을 뜬 후, 이 모자(母子)는 살던 나가노를 떠나 도쿄에 왔다. 팍팍한 숙모 아래에서 조금 눈칫밥을 먹기는 해도, 사촌들은 히데오에게 잘 대해 준다. 동네 애들은 히데오를 촌뜨기라며 무시하고 텃세를 부리지만 히데오는 의연하다. 우연히 알게 된 준코라는 여자 아이는 히데오에게 호감을 보인다. 알고 보니 엄마가 일하는 여관 여주인이 준코의 엄마다.

  러닝타임 79분. 이 소품 같은 흑백 영화는 아이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 영화를 제작하기 이전에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에서 아이들과 작업한 적이 있다. 말수가 적었던 감독이 일일이 아이들에게 연출 지시를 하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듬해인 1960년에 '가을이 올 때'를 만든 것을 보면, 감독 본인이 꼭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영화 속 아이들의 연기는 요즘 아역 배우들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좀 있다. 어색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히데오와 준코가 전달하는 정서의 깊이는 충분히 무리없이 전달된다.

  히데오에게는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가까운 곳에 있다고는 하나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고, 같은 방을 쓰는 사촌 형이 밤늦게까지 기타 치며 노래부르는 것도 참아야 한다. 밥값이라도 하려면 가게 배달일도 도와야 한다. 성질 나쁘고 재수없는 동네 녀석들은 시덥잖게 괴롭히려고 든다. 그나마 히데오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건 고향에서 갖고 온 큰 하늘소이다. 녀석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데 어느 날, 작은 상자집에 있던 하늘소가 사라졌다. 히데오는 그새 친해진 준코의 학교 숙제를 위해 하늘소를 빌려주기로 약속했던 터였다. 사촌형은 쉬는 날 도쿄 근교 숲으로 가서 하늘소를 잡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영화는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히데오가 보기에 쥐꼬리만한 매상으로 겨우 먹고 살아가는 삼촌은 늘 허허실실, 팔다 남은 채소 반찬이 오르는 지겨운 식탁에서 맥주만 들이킨다. 깍쟁이 숙모는 히데오가 그대로 여기 눌러 살까 걱정이다. 사촌 형과 누나는 돈 안되는 가게 팔고 좀 번듯한 곳으로 이사가자고 삼촌에게 볼멘 소리를 하지만 별 소용이 없다. 부잣집 딸처럼 보이는 준코에게도 고민이 있다. 다른 도시에 사는 늙은 아빠는 가끔 오는데, 이번엔 나이든 언니 오빠를 데려와서는 형제라며 인사를 시킨다. 가만 보니까 아빠가 데려온 그 아이들은 자신을 무척 싫어하는 것 같다. 왜 아빠는 집이 두 군데에 있는지 엄마에게 물어보니 성질만 낸다.

  나루세 미키오는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 1960년 도쿄의 풍경을 펼쳐 놓는다. 한국 전쟁으로 인한 특수 덕에 일본 경제는 고도 성장기에 진입한다. 히데오와 준코가 구경하는 번화한 백화점 안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늘소를 잡으러 사촌형과 함께 나간 교외의 숲에는 젊은 남녀들이 시시덕거리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회색빛의 도시에는 고향의 하늘소 같은 건 없다. 백화점 옥상에서 아이들이 내려다본 도쿄 시내는 빽빽한 고층 건물의 숲이다. 히데오가 보고 싶은 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히데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준코는 늘 타던 택시를 대절해 바닷가로 간다. 허허벌판 같은 바닷가 근처 공터에 곧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거라고 준코는 일러준다.

  도쿄에서 보내게 된 히데오의 유년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비어있다. 사라진 하늘소의 작은 상자집은 열려있고, 엄마는 여관 손님과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할머니가 보낸 사과 상자에서 발견한 하늘소를 준코에게 주려고 했더니, 여관 앞에는 이삿짐 차가 서있고 그 안은 텅 비어 있다. 아이는 외롭고 막막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른다. 전에 가봤던 백화점 옥상 난간에 하늘소를 올려놓고 도시를 바라볼 뿐이다.

  히데오가 느꼈을 그리움과 외로움은 스크린 너머로 바람처럼 스며든다. 나루세 미키오는 그렇게 자신의 영화적 역량을 입증한다. 그는 영화를 통해 정서를 전달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이였다. '나루세 미키오, 오즈 야스지로의 구식 영화 따위를 보는 건 시간 낭비다'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아마도 아직 너무 젊거나, 실패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들일 것이다. 어떤 영화들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인생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나는 영화 속 비어있는 풍경을 가득 채우고, 마침내 흘러 넘치는 정서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이 영화를 만나는 이들은 나루세 미키오가 겪었던 유년의 편린을 그와 공유하게 된다.


*사진 출처: http://kookaimorita.livedoor.blog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리뷰

아내(妻, Wife, 195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ife-1953.html


산의 소리(山の音, 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1954.html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late-chrysanthemums-1954.html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안즈코(杏っ子, Little Peach, 1958)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little-peach-1958.html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1959.html

여자의 자리(女の座, A Woman's Place, 196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place-1962.html

여자의 역사(女の歴史, A Woman's Life, 196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womans-life-19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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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안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The mist was coming)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The Birds, 1963)'는 이전까지 사람에게 무해한 존재로 인식되던 '새'를 공포 영화의 주인공으로 둔갑시킨다. Frank Darabont의 2007년작 'The Mist'에서는 안개가 죽음을 몰고 온다. 정확히는 안개와 함께 온 괴생명체들이 한 마을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영화의 원작은 Stephen King이 1980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원작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정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소설과 영화는 어떻게 다를까?

  메인주의 작은 마을, 화가 데이비드에게는 아내와 5살 아들 빌리가 있다. 심한 뇌우로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불안해진 마을 사람들은 식료품을 쟁여놓기 위해 동네 슈퍼마켓에 모여든다. 데이비드도 아들과 함께 마트에 들른다. 그런데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들어온다. 남자는 위험하다며 마트를 나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밖은 순식간에 밀려든 안개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소 괴팍하고 신경질적인 중년 부인 카모디는 이건 죽음의 징조라며 혼자 중얼거린다.

  영화 '미스트'에서 공포의 대상은 안개 그 자체가 아니라 안개 속의 괴생명체들이다. 거대한 촉수와 빨판이 달린 괴물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죽인다. 마트 안의 사람들은 이 괴물들과 대적하는 동안 두 부류로 나뉜다. 데이비드를 비롯해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은 총과 빗자루, 화염방사기로 괴물과 사투를 벌인다. 반면 카모디 부인이 주축이 된 일군의 무리는 일그러진 종교적 신념에 휩쓸린다. 영화는 카모디 부인을 비뚤어진 광신도로 묘사한다. 하지만 원작 소설 속의 카모디는 기이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면서 일종의 주술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미스트'는 어떻게 공포가 사람의 내면을 망가뜨려가는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묘사한다. 적대적인 타자는 괴생명체가 있는 마트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존재로서 괴물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한다면, 카모디 부인은 자신의 잘못된 광신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난데없이 등장한 안개와 괴물들은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포에 휩쓸리고 인내심은 곧 바닥이 난다. 그 틈을 비집고 맹목적 신념이 들어선다.

  공포는 광기와 일탈 행위로 이어진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설 속의 데이비드는 극한의 상황에서 눈이 맞은 아만다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영화의 결말부에서 카모디 부인이 아만다를 향해 '창녀(whore)'라는 모욕적 표현을 쓰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데이비드가 성적 일탈을 보여준다면, 카모디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개 속 괴물에게 인신 공양을 하도록 부추긴다. 마트 안의 사람들 누구도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안개가 몰고온 재난은 신체적 위협과 상해를 가할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이성과 윤리를 마비시킨다.

  원작자 스티븐 킹은 카모디 부인의 죽음과 함께 데이비드 일행의 암울한 탈출 여정을 암시하는 것에서 소설을 끝낸다. 그와는 달리 프랭크 다라본트는 이 공포 수난극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차를 몰고 마을을 떠나려는 데이비드는 엄청난 크기의 괴물을 목격하고 절망한다. 연료가 떨어진 차가 멈춘다.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아들 빌리를 비롯해 일행을 죽인다. 그 순간, 안개가 걷히면서 마을에 진입하는 군부대가 보인다.

  아마도 그러한 결말은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논란이 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광기와 합리적 선택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과연 무엇일까? 기다림? 데이비드가 좀 더 기다렸다면 그는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가정일 뿐이다. 소설은 데이비드와 일행 앞에 놓인 미래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스티븐 킹은 '희망(hope)'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소설을 끝맺는다.

  소설 '미스트'는 초자연적 타자를 내세워 인간 내면의 연약함을 역설한다. 영화 속 끔찍한 괴물은 사람의 육신을 찢고 피를 튀기며 잡아먹는다. 마찬가지로 공포는 이성의 눈을 가리며 결국에는 통째로 삼켜버린다. 영화의 참혹한 결말은 호수에서 데이비드가 처음으로 안개를 목격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스티븐 킹이 멈춰 버린 곳에서 자신만의 구부러진 길을 만든다. 그것이야말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창의적이고 놀라운 틈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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