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항구의 아그니(Η Αγνή του λιμανιού, Lily of the Harbor, 1952)'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데이비드 로웰 리치 감독의 '마담 X(Madame X, 1966)'에서 라나 터너는 아들을 향한 절절한 모정을 보여준다. 하층민으로 상류층 남자와 결혼한 홀리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시어머니에 의해 어린 아들을 놔두고 떠나게 된다. 세월은 흐르고 홀리는 밑바닥 주정뱅이의 삶을 전전한다. 우연히 홀리의 과거를 알게 된 사기꾼이 아들을 찾아가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그 사기꾼을 죽인 홀리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마담 X'라는 이름으로 법정에 선다.


  홀리의 아들은 그 여인이 자신의 모친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변호인으로 나선다. 매우 잘 만들어진 이 멜로 영화는 더글라스 서크의 'Imitation of Life(1959)'에 나왔던 라나 터너의 유명세에 힘입어 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멜로 드라마의 주 관객층인 여성이 영화에서 TV의 연속극(Soap opera)으로 이동하면서, 멜로 영화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실제로 '마담 X'의 흥행 성적도 시원찮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라나 터너의 열연, 심금을 울리는 서사, 좋은 연출로 멜로 영화의 황금기를 마감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마담 X'에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아들을 향한 엄마의 모정이다. 자신의 삶이 망가지더라도 아들만은 지켜내야 한다는 홀리의 집념은 급기야 살인까지 불사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모성은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신성화된 가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모성은 불멸의 가치인가? 섀리 엘 서러(Shari L. Thurer)는 '어머니의 신화(1995, 까치 글방)'에서 발견된 관념으로서의 '모성'의 역사를 기술한다. 도덕적 의무로 강제된 모성이 신화화되면서 그것은 여성에게 억압적인 심리적 기제로 작동한다. 라나 터너가 연기한 홀리는 그 모성의 신화를 충실히 재현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지고지순한 모성의 가치에 감동받는다. 이 모성 신화에는 '자기 희생'이 수반된다. 그것이야말로 멜로 드라마로서 '마담 X'를 구축하는 중요한 뼈대이다.

  요르고스 차벨라스(
Yorgos Tzavellas) 감독이 1952년에 만든 그리스 영화 '항구의 아그니(Η Αγνή του λιμανιού, Lily of the Harbor)'는 그런 모성 신화와는 반대되는 관점에서의 부성(父性)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뱃사람으로 살아온 지아코미스 선장은 고향 피레우스 항구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 한다. 그에게는 아내와 양아들이 있다. 귀환 축하 파티가 열리는 밤, 급한 전갈이 지아코미스에게 도착한다. 마리아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 거리의 여인 마리아는 젊은 시절 그의 연인이었다. 마리아는 선장에게 딸 아그니의 존재를 알려주지만, 그는 아그니를 혈육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술집 여자로 살아가는 아그니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히고, 아버지의 양아들 안드레아스를 유혹해 파멸시키기로 작심한다. 지아코미스에게는 딸 보다는 자신의 대를 이어 선장이 되려는 양아들이 더 소중하다. 그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아그니에게 빠진 안드레아스는 술과 도박으로 돈을 날리고 선장이 될 기회도 놓친다.

  왜 지아코미스 선장은 혈육인 딸 보다 핏줄이 아닌 양아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선장은 무엇보다 아그니의 출신을 확신하지 못한다. 마리아의 유언도, 마리아의 고백 성사를 들은 신부의 증언도 그는 믿지 않는다. 놀랍게도 그가 아그니를 딸로서 인정하게 된 계기는 딸의 등에 자신과 똑같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이다. 유전자 검사로 혈육을 확인할 수 있는 오늘날의 관객에게는 실소를 자아내는 설정이지만,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1936)'의 장돌뱅이 허 생원이 동이를 아들로 확신하는 증거가 '왼손잡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라. 눈에 보이는 확실한 신체적 증거를 보고나서야 선장은 아그니를 딸로 받아들인다. 
 
  여성은 출산의 과정을 통해 모성을 인식하지만, 남성의 경우는 다르다. '부성(父性)'은 자기 결정과 확신을 필요로 한다. 그 아이가 내 자식이라는 믿음이야말로 부성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그니의 등에 난 점은 지아코미스 선장의 부성을 일깨운다. 딸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나서야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선장은 양아들 안드레아스에게 아그니와의 결혼을 허락하고 함께 살자고 말한다. 영화는 임성한의 드라마 '하늘이시여(2005)'의 기이한 막장 결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드라마에서 젊은 시절 사생아로 낳은 딸과 헤어진 여자는 그 딸을 찾아 양아들과 결혼시킨다. '하늘이시여'의 모성이 어릴 때 버릴 수 밖에 없었던 딸에게 못다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면, '항구의 아그니'의 부성은 떠나려는 양아들을 붙잡기 위해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딸을 받아들인다. 아그니가 자신의 혈육임을 인정한 이후에도 지아코미스 선장에게 양아들의 존재는 중요하다. 50년 넘게 바다를 떠돌던 이 남자는 아들이 있는 과부와 결혼하면서 가족을 이루었다. 그 아들에게 그가 보이는 부성은 결코 '사랑'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선장은 자신의 명망을 이어갈 후계자로서의 덕목을 안드레아스에게 역설한다. 딸은 가족이 될 수 있지만, 후계자가 될 수는 없다.

  영화 '마담 X'가 지극한 '자기 희생'의 모성 서사와 모성에 의해 보호받는 아들을 보여준다면, '항구의 아그니'는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 부성과 그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눈물겨운 분투를 치루는 딸의 여정을 그린다. 초창기 그리스 영화사의 대표적 감독으로서 요르고스 차벨라스는 주로 그리스 비극에 영향을 받은 드라마를 영화로 구현했다. 그가 만든 '항구의 아그니'는 멜로 드라마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올가미에 묶인 비극적 인물들의 갈등을 화합 속에 봉합한다.


  자살을 기도한 딸 아그니는 살아난다. 서사의 완성도를 생각한다면, 아그니는 죽고 연인과 아버지는 파멸에 이르는 결말이 멜로 드라마의 공식에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쓴 차벨라스 감독은 희망의 출구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그리스에서 크게 흥행했는데, 아마도 오랜 좌우 내전과 정치적 혼란에 시달린 그리스 국민들에게는 이 영화의 결말이 꽤나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떠나려는 딸과 양아들을 집으로 불러모으는 아버지 지아코미스 선장의 모습은 전후의 상처를 회복하고 새로운 그리스를 이끌 부성의 반영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 출처: finosfilm.com  아그니 역의 배우 엘레니 하치아르기리(Eleni Hatziargy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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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때로 더이상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너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딸 로즈를 향해 이런 말을 쏟아내는 모랑 부인은 삶이 너무나도 괴롭다. 뉴욕 빈민 아파트의 삶, 거칠고 강압적인 남편, 철없는 딸과 아직 어린 아들, 모랑 부인은 그 삶에서 탈출을 꿈꾼다. 어디 모랑 부인뿐인가? 찌는듯한 무더위에 집안에 머물 수 없어서 죄다 밖에 나온 모랑 부인의 이웃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Ain't It Awful, the Heat?'로 이 놀라운 미국 오페라는 시작된다. 'Street Scene'은 쿠르트 바일(Kurt Weill, 1900-1950)이 미국 극작가 엘머 라이스가 쓴 동명의 희곡(퓰리처 상 수상작)을 원작으로 1947년에 만든 오페라 작품이다. 대본은 미국의 흑인 작가 랭스턴 휴즈가 맡았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을 원작으로 만든 음악극(Singspiel) '서푼 짜리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 1928)'로 잘 알려져 있다. 유대인인 그는 히틀러의 압제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다. 1935년의 일이었다. 미국에서 살면서, 그는 자신이 이전부터 작업해온 'Singspiel(독일어로 된 음악극)'을 새롭게 갱신한다. 영어와 미국의 정서를 결합시킨 '미국 오페라(American Opera)'가 그것이다. '미국 오페라'라는 명칭은 쿠르트 바일이 붙인 이름이지만, 1935년에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인이 만든 3막의 영어 오페라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가 그 앞에 자리하고 있다. 거슈인이 보여준 재즈와 오페라의 놀라운 결합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바일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독창적 형태의 미국식 오페라를 탄생시켰다.

  '오페라'라는 명칭을 쓰기는 하지만, 관객들은 'Street Scene'을 보면서 이것이 뮤지컬인가 오페라인가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된다. 바일은 기존의 서양 음악을 대표하는 오페라의 모든 문법에 도전한다. 영어로 쓰여진 대본에 현대 음악과 미국의 재즈, 블루스의 음률이 덧입혀진 노래가 흐른다. 주요 등장 인물만 30명이 넘고(총 50명에 이르는 등장 인물들이 나온다), 대사와 춤, 노래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내가 본 2018년의 영국 연출가 팀 머레이의 마드리드 왕립 극장(Madrid Teatro Real) 공연 버전은 세트도 독창적이다. 4층의 철골 구조 아파트 세트가 양쪽으로 갈라지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그 사이로 뉴욕의 화려한 빌딩숲이 펼쳐진다. 보는 내내 머릿속으로 프로덕션 비용을 헤아려 보게 된다. 

  작품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푹푹 찌는 무더위의 어느 날,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맨해튼 뒷골목 아파트에서 여자들은 더위를 견디려고 집 밖으로 나와 있다. 그들은 이웃들의 흉을 보며 웃고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모랑 부인이 우유 배달부 생키와 바람난 것이 여자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프랭크 모랑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며 거친 언사를 쏟아낸다. 괴로운 모랑 부인은 과거의 꿈과 희망을 되새기며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지만, 딸 로즈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아들 윌리는 심한 장난꾸러기이다.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착하고 성실한 샘은 로즈에게 구애하고, 두 사람은 빈민가를 떠날 수 있는 날을 꿈꾼다. 그러나 로즈의 아버지 프랭크가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게 되면서 극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엘머 라이스는 이민자들의 꿈과 희망을 맨해튼 빈민가 아파트에 투사한다. 이태리 이민자 피오렌티노가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을 아이스크림으로 비유하며 주민들과 함께 부르는 1막의 노래는 흥겹다. 골라먹을 수 있는 다양한 아이스크림은 값싸고 달콤하지만, 현실의 하층 이민자로서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극 전체를 지배하는 숨 막히는 더위처럼 일상의 가난도 그들을 괴롭힌다. 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샘은 변호사를, 로즈는 브로드웨이 스타를 꿈꾼다. 딸을 어렵게 예술 학교로 보내서 졸업시켰지만,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싱글맘 힐데브란트 가족. 그들이 떠난 아파트에는 곧 새로운 이민자 부부가 도착한다. 지저분한 뒷골목에서도 새 생명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뷰캐넌 부부는 산고 끝에 딸을 얻는다. 그런가 하면 예기치 못한 죽음도 있다. 'Street Scene'의 1920년대의 뉴욕 맨해튼은 가난한 이민자들의 역동성으로 가득찬 당시 미국의 축소판인 셈이다.

  이 극의 제목은 우리말로 '거리의 풍경'으로 번역되었다. 번역 제목이 뭔가 미진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가난과 더위에 포위된 최하층 주거지를 면도날로 자른듯한 단면을 보여주는 극에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생각해 본다. 극 속에서 관리인 헨리가 양동이로 핏물을 하수구에 버리는 장면이 2번 나온다. 한 번은 출산 현장의 핏물, 또 한 번은 살인 현장의 핏물이다. 로즈에게는 선명한 핏빛 비극의 현장으로 기억되는 그 거리는 '수난의 거리'일 것이다. 엘머 라이스는 하층 이민자 가족의 비극을 통해 미국 현대사의 숨겨진 장면을 포착한다. 쿠르트 바일은 앨머 라이스가 잡아낸 그 장면들에 음악적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 덕분에 서구의 오랜 음악적 전통과 새로운 나라 미국의 정서가 만난 'Street Scene'은 미국 현대 음악사의 뛰어난 성취로 남게 되었다.



*사진 출처: naxosdir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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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은 소련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해였다.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제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스탈린을 비난한다. 스탈린은 1953년에 사망했으나 소련은 그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발언 이후 '해빙기(Khrushchev Thaw)'는 더욱 가속화 된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가운데 소련 국민들에게 사회, 문화적으로 폭넓은 자유가 허용되었다. 레오니드 루코프(Leonid Lukov) 감독의 '다른 운명(Разные судьбы, Different Fortunes, 1956)'은 그 해빙기의 초입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는 아름다운 타냐를 중심으로 스툐파, 페쟈, 소냐, 고교 동창생 4명의 젊은 날을 그린다.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바 강가에서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의 스툐파는 타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타냐는 페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스툐파는 실망하지만, 곧 자신의 길을 찾아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로 떠난다. 낮에는 제철 공장, 저녁에는 야간 대학에 다니며 스툐파는 열심히 살아간다. 타냐는 페쟈와 결혼한다. 그러나 학생 신분으로 경제력이 없는 페쟈에게 타냐는 곧 실망한다. 페쟈는 부업으로 택시 운전사 일까지 하지만, 안락한 생활을 꿈꾸는 타냐는 유명 작곡가 슈친과 사귀게 된다. 스툐파가 타냐를 마음에 둔 것을 알지만, 한결같이 스툐파를 좋아하는 소냐는 스툐파가 있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렇게 네 명의 서로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

  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은 타냐이다. 타냐를 연기한 타티아나 필레츠카야의 싱그러운 젊음과 아름다움이 스크린 위로 넘실거린다. 아름답지만, 제멋대로이며, 분별력이 결여된 타냐는 사랑에 빠져 급하게 한 결혼에 곧 염증을 느낀다. 가난한 학생인 남편 페쟈는 집 구할 돈도 없다. 각자 부모의 집에 얹혀 사는 이 이상한 부부의 결혼 생활은 위기에 처한다. 아내가 중년의 부유한 작곡가와 내연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페쟈는 분노한 나머지 타냐의 뺨을 때린다. 이 부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다른 운명'에서 관객들은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행해지던 '자아비판'의 실제이다. 남편에게 뺨을 맞은 타냐는 학교의 공산당 위원회에 페쟈를 고발한다. 단상에는 사회를 맡은 당 소속 간부들이 자리하고, 청중들은 타냐와 페쟈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던진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정의 문제는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타냐는 자신을 때린 페쟈를 비난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료 학생들은 페쟈가 왜 타냐를 때렸는지 궁금해 한다. 페쟈는 아내의 허물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타냐는 슈친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 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아비판은 타냐에 대한 공개적 비난으로 돌아온다.

  개인의 삶에 당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실체적 면모는 스툐파의 삶에서도 드러난다. 스툐파는 자신의 전공 지식을 바탕으로 보다 효율적인 생산 방식을 제안하지만, 공장의 직속 상사들은 스툐파가 당돌하며 분수도 모르는 애송이라고 생각한다. 스툐파의 제안은 무시되고, 업무에서 배척당하는 처지에 이른다. 그런 스툐파를 구하는 것은 지역의 당 간부이다. 그는 스툐파가 가진 전문성과 참신성을 높게 평가하고, 스툐파는 곧 당의 인정을 받아 레닌그라드 연구소 강연을 맡게 된다. 열심히 삶을 개척해 나가는 스툐파에게 주어지는 행운, 도덕적으로 타락한 타냐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비난, 이렇듯 '다른 운명'에서 국가는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공산주의 이념에 맞는 바람직한 인민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의 원칙은 영화 '다른 운명'에서도 충실하게 재현된다. 그것은 서로 대립되는 성향을 가진 타냐와 소냐의 엇갈리는 운명으로 입증된다. 타냐의 엄마는 딸에게 넘치는 사랑을 퍼붓는다. 결혼을 했음에도 엄마의 보살핌 속에 살고 있는 타냐는 오직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와는 달리 한결같은 사랑으로 스툐파를 바라보는 소냐는 시베리아의 낯선 도시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며, 결국 원하는 사랑을 쟁취한다. 스툐파는 페쟈를 통해 알게 된 타냐의 불륜에 실망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소냐가 가진 지조와 성실함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성장하고 있는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원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은 타냐가 아닌 소냐였다. 타냐에게 매혹되었던 남자들은 모두 타냐를 떠난다.

  아름다움으로 빛나지만, 지극히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타냐는 영화의 마지막에 기차역에 홀로 서 있다. 타냐는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아 마땅한 캐릭터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타냐가 지닌 무분별함, 충동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이 심각한 성격적 결함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타냐는 1950년대의 소련에 어울리지 않는 여성이었을 뿐이다. 타냐는 화면을 향해 관객을 응시하면서 묻는다.

  "나는 좋은 사람(good person)이 아닌가?"

  러시아의 관객들이 타냐의 물음에 연민과 공감을 갖고 바라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가가 강제한 바람직한 도덕 규범, 가치에서 벗어난 여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까지, 스크린 밖의 타냐는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했을 것이다. 레오니드 루코프 감독이 그려낸 '다른 운명'에는 그렇게 사회주의 국가에서 순탄치 못했던 삶을 살아간 여인의 초상이 담겨져 있다.  

 
*사진 출처: zen.yandex.ru   타냐 역의 타티아나 필레츠카야


** 어울리지 않는 불행한 부부 타냐와 페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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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밤의 충돌(Clash by Night, 1952)'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거친 바다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갈매기와 물개가 조업 중인 선박들 주변에 모여든다. 대형 그물에서 쏟아지는 생선들은 통조림 공장으로 이동한다. 여성 노동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생선을 자동화 라인에서 분류한다. 마치 수산물 가공업에 대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도입부를 가진 영화, 프리츠 랑 감독의 1952년작 '밤의 충돌(Clash by Night)'이다. 원작은 클로드 오데츠가 1941년에 발표한 동명의 희곡으로 브로드웨이 연극으로도 공연된 작품이었다.

  한가로운 몬테레이의 어촌 마을에 화려한 외모의 여성이 도착한다. 매(Mae)는 고향을 떠난지 10년 만에 돌아왔다. 높은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끌고 가는 여자는 영 그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는 남동생 조의 집을 찾아간다. 조는 누나가 보낸 그간의 삶을 궁금해 한다. 매는 '꿈은 컸지만, 결과는 보잘 것 없었지'라는 말로 대신한다. 매와 알고 지냈던 마을의 순박한 어부 제리(폴 더글라스 분)는 매와 데이트를 시작한다. 동네 영화관의 영사 기사 얼(로버트 라이언 분)도 매를 좋아하게 되지만, 매는 얼의 불안하고 상스러운 면모를 경멸한다. 어떻게든 삶에 안착하고 싶었던 매는 제리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는 딸도 태어난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의 답답함에 지친 매는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는데...

  '밤의 충돌'은 프리츠 랑 감독의 후기작으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작품이다. 당시에도 이 영화는 작품성 보다 다른 의미로 큰 화제가 되었다. 영화에서 조의 여자 친구로 나온 마릴린 먼로 때문이었다. 먼로는 누드로 찍은 화보 달력을 내놓았는데, 먼로를 취재하려고 촬영장은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제작사 RKO는 몰려든 기자들을 내쫓는 것이 일이었고, 촬영장의 분위기도 어수선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먼로는 감독의 연출 지시는 무시하고 자신의 개인 연기 교사의 지시를 따랐으므로 프리츠 랑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주연 배우 바바라 스탠윅을 비롯해 폴 더글라스, 로버트 라이언은 집중력을 발휘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바바라 스탠윅 최고의 연기력을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평범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야심많은 여자의 고통과 좌절을 보여준다. 주부의 일상을 견디는 것이 매에게는 갈수록 힘들게 느껴진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과 비슷한 기질을 가진 얼에게 끌리고, 매는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한다. 프리츠 랑이 보여주는 이 멜로 드라마는 매우 현실적이며 절제되어 있다. 동시대의 감독 더글라스 서크가 화려함이 넘쳐나는 세트에 갇힌 중산층 여자의 멜로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과는 차별되는 점이다. 바바라 스탠윅은 어부 아내의 일상을 연기한다. 빨래를 널고, 식사를 준비하고, 아기를 돌본다. 프리츠 랑은 어촌 마을의 선술집, 결혼 파티, 해수욕장을 보여줌으로써 일상적 풍경이 가진 사실성을 강조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프리츠 랑은 일반적 멜로 드라마 서사의 전복을 시도한다. '밤의 충돌'에서 매의 성격적 결함과 타락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은 남편 제리이다. 그는 착하고 나무랄 데 없는 가장이며, 아내에게 충실한 사람이다. 나쁜 남자에 의해 슬픔과 고통 속에 빠지는 멜로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과 바바라 스탠윅이 연기하는 매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있다. 제리는 아내의 부정(不貞)에 분노해, 그 상대방인 얼을 죽이려는 행동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 가엾은 남자를 보면서 감정적으로 동요할 관객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일반적 멜로 드라마의 여성 관객들을 소구
(求)하지 않는다. 멜로 드라마를 향유하는 주 관객층이 여성임을 상기한다면 의외의 점이다.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가 상영되는 당시 영화관 매표소는 여성 관객들로 미어터졌다.

  자신을 떠나게 해달라는 매의 간청에 제리는 외친다. '당신은 끔찍한(rotten) 여자야!' 그 여자, 매의 얼굴에서 '이중배상(Double Indemnity, 1944)'의 요부 필리스가 얼핏 스쳐지나가는 것도 같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살인을 부추기는 악녀 필리스를 연기한 사람은 바바라 스탠윅이었다. 분명 '밤의 충돌'의 매는 나쁜 여자이지만, 엄마 역할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매는 딸을 자신이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놀라운 일이다. 가정을 버리려는 여자가 불륜남과 함께 떠나면서 자식을 데려간다는 것은. 결국 모성이 매를 잡아끈다. 제리는 아내를 용서하고, 여자는 다시 가정에 안착한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스탠윅이 연기한 또 다른 영화 '스텔라 달라스(Stella Dallas, 1937)'의 헌신적인 엄마 스텔라를 떠올리게 된다.

  왜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여자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가? 영화가 만들어진 1952년에 미국은 공산주의자들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밖으로는 한국 전쟁을, 안으로는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 사회는 이전에 비해 매우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2차 대전 중에 이루어진 여성의 사회 진출은 종전과 함께 다시 축소되었고, 여성들은 가정으로 복귀했다. 가정과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 가치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굳건해져 갔다. 매카시즘은 공식적으로 1954년에 종결되었지만, 그 여진은 195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1950년대의 헐리우드 영화들 속에서 그것이 미친 영향력을 분리해서 보는 일은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영화의 제목은 19세기 영국 시인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의 시 '도버 해변(Dover Beach)'에서 따왔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의 해변가에 서있는듯 하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폭풍우 속을 걸어간다. 관객들은 '밤의 충돌'에서 바바라 스탠윅의 치열한 연기와 함께 프리츠 랑이 보여주는 전복적 멜로의 서사를 발견하게 된다.  



*사진 출처: milibrary.com   배우 바바라 스탠윅과 로버트 라이언



*다음 글은 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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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수업 (양장) -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얼마 전부터 TV 리모컨의 전원 버튼이 잘 눌러지지 않았다. 아주 힘을 꾹꾹 주어서 눌러야만 작동이 되곤 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새 리모컨을 사려고 했다. 그래도 전원부 버튼만 안되는 것인데 고칠 방법이 없나 싶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고칠 방법을 알려주는 글들이 주르륵 뜬다. 고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버튼의 접점이 닳거나, 이물질로 인해서 생긴 문제이므로 리모컨 분해 후에 접점 부위를 손보면 된다. 이물질을 제거해도 잘 안되는 경우는 전도성이 있는 알미늄 포일을 접점에 작게 붙여주면 된다. 그렇게 리모컨은 다시 살아났다.

  아주 사소한 수리였지만, 그걸 해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접점(接點)에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기판이 정상이라고 해도 전류가 흐르지 않아서 작동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작고 보잘 것 없는 문제들이 일의 시작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글쓰기'의 경우에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제대로 된 좋은 글을 써야한다는 압박감,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 말고 내일은 쓸 거라는 다짐,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영감, 그런 것들... 도러시아 브랜디는 '작가 수업'에서, 글을 쓰려는 이들이 마주하는 그런 근원적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 한다.

  사실 이 책을 오래전에 사두고 그냥 책장에 넣어두었던 것 같다. 작년 가을부터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예전에 샀던 글쓰기 책들을 가끔씩 들여다 보고 있다. 대개는 그냥 흘려버리는 그저그런 조언들이지만, 이 책은 좀 다른 면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작가'라는 직업의 정체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브랜디는 작가는 '언제,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매일, 일정량의 글을 써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작가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 습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다른 직업에 대해서 고민해 보라는 충고를 곁들인다.

  우선 글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시간대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대에도 익숙하게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마다 자신이 더 선호하는 작업 시간대가 있기는 하다. 브랜디는 그것을 뛰어넘으라고 일러준다. 어느 시간대든 글을 쓸 수 있는 습관을 갖게 된다면, 비로소 작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첫 번째 열쇠를 얻게 된다. 꾸준함과 성실함이야말로 작가가 가져야할 기본적인 덕목이다.

  브랜디는 그 다음의 작업으로 스스로의 글에 비평하는 자아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비판적 자아는 일단 내려두고, 무의식 속에 자리한 창조적인 글감들을 길러 올리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줄리아 카메론이 쓴 '아티스트 웨이'였다. 글쓰기에 대해 다룬 그 책에서도 창작에서의 무의식의 중요성을 다룬다. 솔직히 그 책은 내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카메론의 그 책은 브랜디의 책에서 영감을 받아 나온 많은 글쓰기 책들의 하나였다. 1934년에 이 책이 출간된 이후로, 글을 쓰려는 많은 이들이 브랜디의 조언을 따랐다.

  오늘 날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구식의 관점과 조언이 있기는 해도, 작가 지망생에게는 커다란 줄기에서는 귀담아 들어야할 이야기들이 있다. 글을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제 막 글쓰기에 들어선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생각대로 글이 써지지 않거나, 쓰다가 그만 두기를 반복하는 이들은 자신의 글쓰기 버튼의 접점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신만의 글쓰기 습관과 일과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다음에 글쓰기의 전원 버튼을 눌러 보라.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 수업'은 마치 허름한 원조 맛집을 방문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화려한 인테리어나 친절한 고객 응대는 없다. 다만 정성스럽게 잘 만들어진 음식이 차려질 뿐이다. 결국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작가됨', '글쓰기'의 본질이다. 매일, 일정 분량의 글을 써내는 습관과 자신의 내면에 갇혀 있는 이야기들을 해방시키는 것. 그런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작가'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작가 수업'은 그 정체성을 갖추기 위한 첫걸음, 그리고 그 길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원칙을 다룬다. 글을 쓰려는 이들의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구판이 절판되고, 2018년에 다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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