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irgacheffe. 에티오피아를 대표하는 이 고유한 풍미의 커피가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바로 기후 변화(climate change)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의 커피 농부들은 맛이 없어진 커피 대신에 다른 작물을 심고 있다. Khat는 커피를 갈아엎은 땅을 빠르게 채워가는 중이다. 환각 물질을 함유한 이 나뭇잎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애용된다. 커피보다 물이 적게 들고(커피 생산에는 엄청난 물이 필요하다), 재배와 가공 과정도 간소하다. 감독 Jessica Beshir는 어린 시절, 에티오피아 내전을 피해 가족이 멕시코로 이주했고 그 뒤에 미국에 정착했다. 나중에 고국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베시르는 커피 농장이 카트로 가득찬 벌판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Faya Dayi(2021)는 카트와 에티오피아 사회의 심리 사회적 연관성을 다룬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 소설 작법에 나오는 비법 가운데 하나이다. 베시르는 에피오피아 내전과 그 후유증, 카트 산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10년에 걸쳐 촬영된 이 다큐는 어떤 면에서 감독이 바라본 고국에 대한 성찰의 편린들을 묶은 것이기도 하다. 흑백의 화면 속에 펼쳐지는 이 나라의 풍광에서 폭력과 갈등의 그림자를 찾기는 어렵다. 카트 작업장 인부들의 떠들썩한 말소리, 느긋하게 카트를 씹는 나이든 남자들, 강물에서 평화롭게 노는 아이들... 하지만 젊은이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절망이 묻어난다.

  오랜 내전(Ethiopian Civil War, 1974-1991)은 에티오피아 곳곳에 생채기를 남겼다. 2020년에 발생한 북부 티그라이 지역에서의 내전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무려 80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의 복잡한 민족 구성은 정치적 불안정과 연결되어 있다. 청년들이 나누는 대화에서는 내전에서의 폭력과 살상의 기억이 소환된다. 베시르는 내전이 할퀴고 간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내면을 시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담아낸다. 주요한 내러티브가 없지는 않다. 14살 모하메드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모하메드의 아버지는 하루종일 집안에서 카트를 씹으며 코란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카트가 떨어지면 모하메드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카트를 구해오라고 때리며 닥달을 한다. 그 모습은 여느 약물 중독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하메드는 괴로운 그곳을 떠나고 싶다. 유럽은 꿈의 땅이다. 하지만 유럽으로 향하는 길은 막대한 밀입국 비용과 목숨을 담보로 한다. 그나마 현실적인 것은 카트 밀무역상이 되어 아라비아 반도로 향하는 것이다. 고향에서 카트 중독자가 되어 절망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 아니면 밀입국을 하다가 객지에서 비명횡사하는 것. 그 모든 선택에는 불운과 고통이 수반된다.

  이슬람의 수피(Sufi) 성직자들에게 카트는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축복의 잎사귀이다. 종교 의식의 카트 연기는 신성함에 수렴되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무기력과 절망으로 귀결된다. 이미 카트에 중독된 남자는 젊은이들에게 카트를 멀리하라고 충고한다. 남자들 뿐만이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카트는 일상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필수품이 되었다.

  "모두가 카트를 씹으면서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해요."
  (Everyone chews to get away.)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모하메드는 황량한 들판을 걸으며 그렇게 읊조린다. 흑백 화면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처럼 떨어지는 모하메드의 굵은 눈물은 에티오피아가 처한 총체적 어려움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무기력과 절망이 스며든 일상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보이는 곳은 카트 가공 공장과 수매 현장이다. 베시르는 카트가 이 나라에서 커피를 밀어내고 차지한 경제적 위상을 건조한 화면 속에 담는다. 돈이 되는 신의 잎사귀는 역설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을 서서히 마비시키고 있다.

  다큐의 제목 'Faya Dayi'는 건강을 기원하는 Oromo 말이다. Amhara어를 구사하는 베시르는 Oromo 농민들이 부르는 노동요에서 제목을 따왔다. 제작비의 압박 때문에 10년에 걸쳐 드문 드문 촬영했고, 그 시간 동안 다른 언어를 쓰는 주민들과 신뢰와 친분을 쌓아나갔다. 이 다큐는 에티오피아 밖의 관객들에게 그 나라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조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좁고 구불구불한 흙담벽 골목을 지나는 여인의 베일처럼 'Faya Dayi'는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미지들이 드리워져 있다. 내전이 에티오피아인들의 내면에 남긴 심리적 상흔은 '카트'와 결합하면서 사회 전체가 환각과 무기력에 잠식되어가는 중이다. 베시르는 'Faya Dayi'를 통해 오늘날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처한 심각한 사회 심리적 위기를 고요하고 밀도있는 영상 속에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fayaday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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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ju movie. 홍상수의 영화는 종종 그렇게 불린다. 이젠 외국 평론가들도 '소주'가 뭔지 안다. 가끔은 외국 리뷰어들의 흥미로운 질문글도 올라온다. 왜 '홍'의 영화에는 소주가 빠지지 않고 나오는가? 그 질문에 댓글을 달아본 적은 없지만, 나라면 이렇게 적겠다. '소주'가 들어가야 카메라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촬영 현장에는 소주가 박스째로 꽤 높게 쌓여있을 것이다. 중국의 신진 감독 Zheng Lu Xinyuan의 영화 'The Cloud in Her Room(2021)'에도 홍의 소주 같은 매개체가 등장한다. '담배'이다. 여자 주인공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은 계속해서 담배를 피운다.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니, 이 여성 감독이 골초라는 것도 확인된다.

  22살의 여성 Muzi는 춘절을 맞이해 고향 항저우에 온다. 오래전에 이혼한 부모는 각자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무지는 새엄마와 어린 이복 여동생이 있는 아빠의 집에 머무른다. 무지와 또래 친구처럼 친밀한 친엄마에게는 외국 연인이 있다. 별다른 계획도, 할 일도 없는 무지는 가족이 함께 살던 예전의 낡은 아파트를 찾아가서 시간을 보낸다. 베이징에 있던 사진작가 남자 친구가 갑자기 무지를 찾아온다. 그 와중에 무지는 동네 술집 주인과 가벼운 연애를 시작한다.

  어떤 영화들은 보고 나면 참 좋은 영화인데 막상 글로 쓰려면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반면에 별로인 영화인데 쓰고 싶은 것이 많을 때도 있다. 'The Cloud in Her Room(2021)'은 그 후자에 속한다. 이제 중국 영화 감독의 세대 구분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내가 그나마 주의깊게 지켜본 감독이 6세대 감독 리위(李玉, Li Yu)였는데, 한때 눈부셨던 리위도 영화적 재능이 바닥을 드러낸듯 하다. Zheng Lu Xinyuan은 중국 출신으로 미국 USC에서 영화를 전공한 해외파 신진 감독이다. 미국에서 작업하다가 지금은 중국에서 제작 기반을 다지고 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첫 번째 결과물로, Zheng의 고향 항저우에서 촬영했다.

  앞서 언급한 시놉시스가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The Cloud in Her Room(2021)'은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 무지의 고향에서의 기억과 현재는 다층적으로 뒤엉킨다. 거기에 네거티브(陰畫)이미지로 들어간 쇼트들과 스마트폰으로 찍은 셀카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영화 중간에는 무지에 대해 말하는 남자친구의 인터뷰 장면도 있다. 외국물 먹은 신세대 여성 감독이 중국 영화에 불어넣는 나름의 실험적이고 새로운 바람인가?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고백의 흔적이 강하게 느껴진다. 중국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자신은 미국과는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고 작업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어려움과 외로움은 여자 주인공에게 그대로 투사된다.

  무지는 틈만 나면 부모와 함께 살았던 낡은 아파트를 유령처럼 서성이며 시간을 보낸다. 그 아파트는 생의 방향 감각을 잃은 이 여성에게 한때 안온했던 자궁과도 같은 장소이다. 다른 파트너와 새로운 삶을 꾸리는 부모를 이해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고 원망스럽다. 무지는 밤의 길거리에서 굴러다니는 생수병을 신경질적으로 짓밟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남자 친구를 놔두고 유부남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고향 항저우의 서호(西湖)가 만들어낸 습기는 겨울의 도시를 안개 속에 가둔다. 항저우의 뿌연 겨울 밤거리를 하릴없이 헤매는 이 여성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무지가 끊임없이 피우는 담배는 꽉 막힌 청춘의 시간에 구멍을 내어 흐르게 만든다. 천천히 퍼지고 스며드는 담배 연기는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와도 겹친다. 빗물이 넘쳐흐르는 도로를 카메라는 유영하듯 미끄러져 간다. 수영장과 욕실에서 무지가 시간을 보내는 장면,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거칠게 굽이치는 물결이 네거티브 이미지로 제시된다. 자의식 과잉의, 슬픔과 외로움에 방황하는 22살 여성의 서사는 모호하고 공허하다. Smoking movie. 이 영화에서 기억나는 것은 '담배' 밖에 없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기이하게 인상적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담배'가 여성주의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루는지 궁금한 이라면 볼 법도 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중국 6세대 영화 감독 리위(Li Yu)의 영화들 리뷰

관음산(观音山, 201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2011.html

둑길(紅顔, Dam Street, 200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dam-street-2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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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쿠(ばく).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아사코(Asako I & II, 2018)'를 주의깊게 본 관객이라면 이 이름을 기억해낼 것이다. 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영화 속에서 바쿠와 료헤이로 1인 2역을 연기한다. 애니메이션 영화 'Cryptozoo(2021)'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바로 그 바쿠이다. 미국의 인디 애니메이터가 만든 영화에 일본의 요괴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꽤나 흥미롭기는 하다. 중국의 전통 설화에서 유래된 이 요괴는 꿈, 특히 악몽을 먹어버린다. 영화 속에서 바쿠는 귀여운 아기 코끼리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길다란 코로 사람들의 머릿속 생각과 꿈을 빨아들인다.

  마치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 동식물처럼 크립티드는 밀렵꾼들에 의해 사냥되고, 암시장에서 거래된다. 수의학자 로렌 그레이는 바쿠와 같은 신화적 생물 cryptid를 구출하는 데에 전력을 다한다. 군 부대에서 성장한 어린 시절, 로렌은 악몽에 시달릴 때 바쿠가 와서 도와준 기억을 갖고 있다. 이런 로렌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이는 부유한 후원자 조앤이다. 조앤은 거대한 Cryptozoo를 만들어서 로렌이 구해낸 크립티드들을 수용한다. 한편 군에서는 바쿠를 이용해서 좌파 시위대를 진압하려고 한다. 바쿠가 시위대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없앨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로렌은 조앤의 도움으로 고르곤 피비와 함께 군 부대에 잡힌 바쿠의 구출에 나선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의 기괴한 그림체에 비한다면 내러티브는 그다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좌파적 상상력을 말살시키기 위해 국가 권력이 상상의 요괴를 잡으러 나선다. 그 반대 지점에서 크립티드의 수호자인 로렌이 맹활약을 펼친다. 'Cryptozoo'에는 온갖 다양한 신화와 하위 문화 속에서 차용한 크립티드들이 등장한다. 중국 신화 속의 용부터 시작해서, 일본의 바쿠, 그리스 신화의 고르곤과 사티리콘, 스폰지밥을 연상케 하는 플리니의 모습까지. 크립티드의 형상은 Dash Shaw의 비주류적 감성과 강렬하게 공명한다.

  'Cryptozoo'는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 1993)'을 떠올리게 만드는 여러 지점을 갖고 있다. 로렌과 조안은 크립티드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서 Cryptozoo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거대하고 복잡한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 그런 이유로 크립티드들은 상품화되고 관람객들의 유인에 이용된다. 과연 크립티드들은 그 동물원에 갇혀서 사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고 고마워할까? 쥬라기 공원의 공룡들이 자본주의적 욕망의 산물인 것처럼 조안과 로렌의 크립토 동물원 또한 그러한 혐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이 영화에서 국가 권력이 악의 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크립티드 사냥꾼 니콜라스는 그 권력의 하수인이다. 그는 바쿠를 잡아들인 것에서 더 나아가 cryptozoo를 파괴시키려고 한다. 마침내 혼돈과 파괴의 아수라장 속에서 크립티드들은 풀려난다. Dash Shaw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억압하는 지배 권력, 그것을 은밀하게 매수하려는 자본주의를 모두 조소한다. 상상력에 자유를! 관객은 그렇게 1960년대 융성했던 히피 문화, 68혁명의 구호들이 울려퍼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Cryptozoo'에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다. 영화가 보여주는 단선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철 지난, 구식의 것이다. 녹슬고 삐걱거리는 뼈대 안에서 모든 것이 과잉으로 흘러 넘친다. 성과 폭력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그림체는 때로 거북스럽다. 동서양의 신화 서사에서 차용해온 크립티드는 기발하기보다는 진부하다. 그럼에도 이 애니메이션이 옹호하는 반문화적 상상력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면에서 'Cryptozoo'는 히피 시대를 떠올리게 만드는 95분의 영상 환각제로 기능한다.



*사진 출처: polygon.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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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다소 혼란스러운 도입부로 시작한다. 어린이집 교사인 앤은 부산스러운 애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 앤의 모습과 교차 편집된 장면은 절친의 'Bachelorette Party(결혼을 앞둔 신부와 친구들이 하는 파티)'로 스카이다이빙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헝클어진 금발머리처럼 앤의 표정이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들뜨고 불안정해 보인다. 캐나다의 감독 Kazik Radwanski의 2019년작 'Anne at 13,000 Ft.'은 불안한 젊은 여성의 삶을 포착한다.

  이 영화에서 존 카사베츠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핸드 헬드 카메라는 시종일관 거칠게 흔들린다. 관객은 그 화면 속 앤의 모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곧 알아챈다. 앤은 뜨거운 커피는 아이들에게 위험할 수 있으니 치우라는 동료 교사의 충고를 받는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앤은 커피를 개수대에 버리고는 컵을 상대방에게 던진다. 동료 교사는 질책하지만, 앤은 빈 컵을 보여주려는 것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런가 하면 친구의 결혼식에서는 축사를 하다 말고 울어버린다. 

  'A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에서 하층 계급 여성의 내면을 옥죄는 알콜 중독은 이 영화에서 조울증으로 대체된다. 앤은 친구의 결혼 피로연에서 진창 퍼마시고는 화장실에서 구토하고 주정한다. 이는 카사베츠의 'Husbands(1970)'에 나오는 친구들의 화장실 구토신과 닮았다. 어쩌면 감독 카직 라드완스키는 카사베츠 덕후일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카사베츠의 즉흥적이고 자연적인 연출 방식도 흉내낸 것일까? '13,000 피트의 앤'에서 라드완스키는 출연자의 일상을 계속 따라잡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카메라처럼 앤의 모든 것을 근거리에서 담아낸다.    

  집을 얻어 이제 막 독립한 이 젊은 여성의 삶은 어색하고 서툴기 짝이 없다. 결혼 피로연에서 만나 사귀게 된 매트와의 관계도 삐걱거린다. 매트를 엄마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는 느닷없이 약혼자라고 말한다. 매트는 어떻게든 앤을 도우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다. 보육원에서도 아이들을 보살피는 교사라기보다는 매우 불안해 하는 어른 아이 같다. 앤의 근무 태도는 동료들과 상사에게 비판받는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 지나친 자기 중심성, 기이한 유머 감각, 앤의 모든 것은 정상에서 벗어나 있다.

  카사베츠가 정서적 불안정성을 계급 문제와 결합시켜서 보여주었다면, 라드완스키는 오로지 젊은 여성의 내면에만 집중한다. 아이들을 보살피던 앤이 갑자기 압도되는 감정에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드러누워 버릴 때, 관객은 이 여성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하게 된다. 좋은 동료, 걱정하는 엄마, 이해심 많은 남자 친구, 그 누구도 앤을 도울 수 없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약물 처방을 받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 앤은 하늘로 향한다.

  스카이다이빙이 앤을 낫게 할 수 있을까? 자의식 과잉의, 감정의 양극단을 오가는 앤의 모습은 입안의 돌가루처럼 서걱거린다. 냉소적인 관객이라면 '그래서 뭐 어쩌라구?', 하고 반문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심드렁하게 러닝타임 75분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긴장된 표정의 앤은 맨 마지막 순서로 낙하한다. 카메라는 텅 빈 비행기 안에서 앤이 사라진 창공을 응시한다. 하강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지막지한 바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앤의 불안정한 내면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난기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13,000피트 고도의 압력을 떠안고 시도하는 스카이다이빙처럼, 앤은 불확실한 삶의 여정을 향해 뛰어든다. 나는 비로소 이 젊은 여성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존 카사베츠의 영화 '남편들(Husbands, 197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husbands1970-melancholia2011-national.html

너무 늦은 블루스(Too Late Blues, 196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glenn-miller-story-1954-too-late-blues.html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 197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opening-night-19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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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몬태나(Hostiles)'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영화 'Hostiles(2017)'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1892년은 이제 인디언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이다. 이미 1890년 12월에 운디드니 학살(Wounded Knee Massacre)로 250여명의 라코타족이 죽었고, 남은 부족민은 황량한 보호구역에 유폐되었다. 영화의 주인공 블로커 대위(크리스찬 베일 분)는 오랫동안 인디언 전쟁의 제일선에 있었던 인물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서로 대립하는 집단이 같은 방식으로 휘두르는 폭력의 양상을 마주한다. 로잘리의 가족을 습격한 코만치 인디언은 활과 총으로 죽인 것도 모자라 칼로 머리가죽을 벗긴다. 인디언 소탕 작전에 나선 블로커는 여자와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가혹하게 잡아들이고 그들을 짐승 취급한다. 인디언과 백인들 사이에는 오직 적의(hostile)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제 그 질기고 오랜, 피비린내 나는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영화는 처참한 전쟁의 뒤안길을 응시한다. 로잘리의 가족을 도륙한 코만치 인디언들처럼 블로커가 속한 미 연방군 또한 도살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블로커에게 오직 처단해야할 적으로 상정된 인디언들은 죽거나 보호구역으로 보내져 더이상 찾기도 어렵다. 오랜 세월을 군에 몸담아온 블로커가 퇴역을 결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 때 그의 부대원들에게 가차없는 죽음을 안겼던 추장 옐로우 호크도 늙고 병들었다. 그럼에도 블로커의 내면에서는 여전히 인디언들에 대한 적의가 들끓는다.

  추장 옐로우 호크를 부족의 땅 몬태나에 데려다 주는 여정은 블로커에게는 어려운 시험과도 같다. 마음으로는 추장과 일가족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지만, 상부의 명령을 어기면 군법 회의에 회부되고 퇴역 연금도 없다. 인디언들에게 가족을 잃은 로잘리가 갖게 된 적의는 어떤 면에서는 블로커의 내면과 맞닿아 있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 보낸 그였지만 부대원들의 죽음만큼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다. 옐로우 호크에게 블로커가 갖게 된 처절한 증오는 바로 거기에서 나왔다. 로잘리의 고통에 블로커가 연민과 공감을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감독 Scott Cooper는 그 지점에서 평화와 공존을 말하고 싶어한다. 블로커 일행은 로잘리 가족을 죽였던 코만치 인디언들의 습격을 받고, 어렵사리 그들을 물리친다. 거기에는 추장 일가의 도움이 있었다. 여정이 거듭될수록 블로커와 추장 사이에는 이해와 연대의 감정이 생겨난다. 마침내 블로커가 몬태나에 이르렀을 때, 그는 추장의 시신을 기꺼이 부족의 땅에 매장해주려고 한다. 블로커는 그 땅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매장을 허락하지 않은 백인 목장주와 목숨을 건 혈투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쓰고 나면 영화가 꽤나 감동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그럴듯한 수정주의 웨스턴에는 헛점이 있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오류가 눈에 띈다. 일행이 몬태나로 향하는 여정에서 로잘리와 추장의 딸, 그리고 며느리는 모피 상인들에게 납치당해 몹쓸 일을 당한다. 미국의 모피무역은 1800년대 초반에 매우 흥했다가 1830년대에 끝물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1890년대의 서부에 등장하는 모피 무역상들은 정말이지 뜬금없다.

  거기에 덧붙여, 'Hostiles'는 역사적 과오를 피해자-가해자 구도의 개인적 차원으로 바라보는 구조적 결함을 갖고 있다. 블로커와 인디언 전쟁을 함께 해온 동료 메츠는 살상의 기억으로 내면이 망가진 인물이다. 그는 추장 옐로우 호크에게 참회의 뜻을 전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미국 정부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던 인디언 절멸의 책임은 그렇게 참전 군인의 윤리적 고통과 죽음으로 해소된다. 원주민 일가족을 잔혹하게 학살한 블로커의 예전 부대원 윌스의 죽음도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다.

  영화의 결말에서 로잘리는 추장 일가의 유일한 생존자인 어린 리틀 베어와 함께 떠난다.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블로커는 발길을 돌이켜 기차에 오른다. 인디언 부족을 죽이는 데에 앞장섰던 연방군 블로커, 가족을 인디언에게 모두 잃은 로잘리, 백인들에 의해 부모가 죽은 리틀 베어. 피와 고통의 기억도 함께 실은 기차는 서서히 멀어진다. 어쩌면 그 기차가 향하는 곳은 목적지 시카고가 아닌 그들이 살아갈 새로운 20세기인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해소되지 않은 적의가 미국의 현대사에 선명하게 스며듦을 보여주는 묵시적 예언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미국의 서부 개척사를 다룬 PBS 8부작 미니 시리즈 Ken Burns: The West(199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pbs-8-ken-burns-west1996-8.html


***수정주의 웨스턴 Hombre(1967)와 Valdez Is Coming(197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hombre1967-valdez-is-coming19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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