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쓰면, 읽을 사람은 있어?"

  안데르스의 여자 친구가 그렇게 묻는다. 여자 친구 엘지는 이웃에 산다. 허름한 빈민가 공동 주택에서 사는 안데르스에게는 알콜 중독자 아빠, 세탁부로 생계를 유지하는 엄마가 있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그는 틈만 나면 글을 쓴다. 책상도 없는 그는 식탁을 창가로 끌어다 서재를 대신해 거기에서 글을 쓴다. 안데르스에게는 오직 글만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기댈 수 있는 희망의 빛이다. 쓴 글을 출판사들에 보내고 답신을 기다리는 것이 일과인 그에게 어느 날, 스톡홀름의 출판사에서 답장이 날아든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 1967)'으로 잘 알려진 보 비더버그 감독의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Kvarteret Korpen, Raven's End, 1963)은 하층민 청년의 자아 찾기를 그린다. 흑백으로 촬영한 이 영화는 1963년에 제작한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역시 같은 해 만든 첫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던 배우 토미 베르그렌이 안데르스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이 작품은 종종 감독 자신의 자전적 요소가 반영된 영화라고 알려져 있지만, 보 비더버그는 그에 대해 부인했다. 오히려 안데르스 캐릭터의 유사성은 그 역을 연기한 토미 베르그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하층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다. 자신의 삶과 비슷한 배역이어서 그랬을까? 베르그렌은 신인이었음에도 아주 안정적이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의 배경은 1936년의 스웨덴의 말뫼, 안데르스의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다. 전단지 돌리는 일이라도 하라고 아내는 다그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다. 이 가족은 세탁부로 일하는 엄마가 벌어오는 돈으로 겨우 먹고 살아갈 뿐이다. 안데르스는 자신이 잘 하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인 글쓰기에 몰두한다. 축구 선수인 그의 절친한 친구 식스텐은 출세해서 파리의 매춘부를 만나는 것이 꿈이지만, 안데르스는 작가가 되고 싶다. 변함없는 지긋지긋한 일상, 공동 주택 앞의 공터에는 선거 유세 방송으로 시끄럽다. 출판사에서 날아온 답장에 잔뜩 기대를 걸고 스톡홀름을 방문했지만 뜨뜻미지근한 답변에 안데르스는 실망한다. 글쓰기도 시들해지던 안데르스에게 여자 친구 엘지는 임신 소식을 알린다. 안데르스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갈까?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이 괴로운 청년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서 무슨 쓸모있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아온 무기력하고 한심한 가장은 자기 변명으로 일관한다.

  "난 가라앉고 있어. 삶을 견디기 위해 잠수종(潜水鐘, diving bell)에 들어가는 거야. 늘 그래왔다구."

  안데르스는 비좁은 집도, 부모도, 여자 친구도 넌더리가 난다. 마음 둘 데 없는 불운한 청춘은 괴롭기만 하다. 안데르스만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의 스웨덴의 상황도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전세계로 확장되었고, 스웨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층민과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보 비더버그는 이 영화에서 선거와 정치를 비중있게 다룬다. 영화 초반부에 히틀러의 연설 방송이 들린다. 스웨덴 선거에서 나치 당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우파 정당이었던 농민당은 히틀러의 이념과 노선에 경도되어 있었다. 1932년의 선거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좌파 정당 사민당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 확실한 우세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1936년의 선거는 사민당과 스웨덴의 운명을 가르는 선거이기도 했다. 안데르스가 엄마에게 히틀러 추종자가 의회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투표를 독려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은 혼란의 시대 속, 방황하는 청춘들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안데르스를 비롯해 여자 친구 엘지, 식스텐에게 현실은 출구없는 복도 같다. 빈곤에 허덕이면서 그저 삶을 견딜 뿐이다. 그런 현실에서 안데르스의 아버지는 술에 절어서 인생을 회피하면서 살아왔다. 아들은 잠수종의 삶을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처럼 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 이 진창과도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무겁고 암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에 쓰이는 음악은 매우 경쾌하고 아름답다. '엘비라 마디간'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썼던 비더버그의 음악적 안목은 이 영화에서부터인지 모른다.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작곡가인 주세페 토렐리(Giuseppe Torelli)의 '트럼펫 협주곡 D장조'가 주요한 장면에서 흐르는데, 이 밝은 곡은 영화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안데르스는 작가가 되었을까? 영화는 안데르스의 청춘에서 멈춘다. 나는 그가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응시하는 사람, 인생을 견디기 위해 그것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 작가란 그런 사람이다. 매력적인 서사와 동적이고 감각적인 촬영이 돋보이는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은 1995년에 스웨덴 관객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스웨덴 영화였다.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서운했을까? 그 또한 이 영화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영화 속 주인공 안데르스와 함께 보 비더버그를 영화 작가로 탄생시킨 영화였다.



*사진 출처: avxhm.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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