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책상 위의 시계가 5분 늦게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얼른 분침을 바로
잡아준다 하지만 이 시계는 점점 더
정각에서 멀어질 것이다 새 건전지를
끼워줘야겠지 나는 시계에 새 건전지를
끼워준 적이 한 번도 없다 원래 이런 시계는
쓰다 남은 건전지를 끼워도 잘도 간다
그런데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이 발견을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준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수명이 다한 것처럼 보이는 건전지가 그렇게
꾸역꾸역 지 목숨을 이어가는 것처럼 희망도
끈적끈적 점액을 내뿜으며 들러붙는다 슬프게도
희망이란 원래 버리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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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1.
아파트의 분리수거장에 그리 낡지 않은 매트리스와
이불이 나와 있다 이불은 두 개의 끈으로 잘 동여매져
있었다 금실과 은실로 수놓아진 진홍색의 솜이불
엄마가 시집올 때 해온 이불도 알록달록한 천에
수가 놓아져 있었다 장미와 모란과 학이 있는 이불
나는 버려진 옛날 이불에서 죽음의 기운을 읽는다
아마도 저 이불의 주인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깨끗해 보이는 매트리스도 그래서 함께 버려졌으리라

2.
가을 새벽, 소슬바람에 잠이 깼다
춥다, 나는 오리털 이불을 꺼내었다 덮어보니
무겁다, 최신의 과학 기사에 따르면 무거운 이불을
덮어야 잠이 잘 온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그 이유가 다소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이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깟 손바닥 두께만큼의 오리털 이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면 편안한 잠을 잘 수 없다
몇 번을 뒤척이다가 나는 인생에 얼마만큼의
무게가 더해져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지 생각한다
휘청거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그런 무게의 짐
하지만 나는 늘 휘청거렸다

3.
한때 극세사 이불이 크게 유행했었다
엄마는 극세사 이불이 마음에 들었는지
꽤 많이 사들였다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마다 샀다
극세사 이불의 색상은 거의 비슷했다
다홍색 빨강색 자주색 보라색
내게는 아주 옛날의 내복 색깔 같았다
그런데 엄마는 극세사 이불을 덮지 않았다
그걸 덮으면 너무 더워서 갑갑하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산 이불을 막내딸 혼수로 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동생은 이불 색깔이 촌스럽다며 가져가지 않았다
엄마가 사랑한 극세사 이불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나의 장롱에 오래도록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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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책


작가가 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세요
뭐 필독서나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들어야 할 수업이 있다면 그것도 함께
일단 글을 쓰기 위한 뼈대를 세우고 나서
거기에 들어갈 내용은 좀 생각을 해봐야겠죠
참고할 만한 자료들도 모아보고
그렇게 내 글을 써나가고 싶거든요

자, 내가 해결책을 알려줄게
잘 쓰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해
어떻게든 오랫동안 버티면서 쓴다고
생각하면 뭐든 될 거야
말하자면 시간과의 싸움이지
너와 같이 출발한 사람이 어느 순간,
네 옆에 보이지 않을 때
네가 버티는 것은 더럽게도 힘들고
너의 글을 읽게 될 독자들은 저기 어디
외계 행성에나 있을 것이므로
너의 감수성은 미세플라스틱처럼 바스러지고
나중에는 그냥 도망쳐 버리고 싶어져
이봐, 알아들었어?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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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과(沙果)


가려운 어깨를 긁는다
나의 병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1년째 오른쪽 발이 아프더니
이제는 왼쪽 발까지 아프다
걸을 수 없다고 죽을 수는 없는 법이지
하지만 욕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쓰레기통 밑바닥에
굴러다니는 푸른 사과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멀쩡해 보이는 사과
그 사과는 왜 버려졌을까
쓰레기의 내력을 헤아려 본다

저 사과는 아픈 사과다
아픈 것들은 죄다 멸시를 받고
눈물을 질질 흘리며
결국은 버려질 것이기에

앞집의 노인은 백 살을 앞두고 있다
몸이 아파서 바깥출입을 못한지가 꽤 되었다
봄과 가을에는 사망률이 치솟는다
나는 앞집 노인이 올가을을
넘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나에게 남은 생은 얼마나 되는지
그때까지 쓸 수 있는 글은 얼마나 되는지
그때까지 버려질 글을 또 얼마나 쓸지

가려운 어깨는 불길한 징조이다
붉은 반점도 우는 소리를 낸다
아픈 사과가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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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人事)


아파트의 청소 아줌마와 마주쳤다
인사를 하는 것이 어색해서
다른 출입구로 갔다 그런데 아줌마가
그쪽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나한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네, 수고하시네요

아줌마가 그냥 모른 척해주었으면 했다
나는 인사하는 것이 너무 싫다
사람 사는 세상, 그래도 온기가 있어야지
하지만 나는 그 머나먼 온기가 싫다

만나면 먼저 인사합시다

아파트 단지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있다
나는 그걸 볼 때마다 비뚤어진다
제발 아는 척하지 좀 말고
인사도 하지 않았으면

늙으신 엄마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젊은 여자와 여자의 어린 딸이
엄마에게 인사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할머니, 안녕하세요

엄마는 모르는 이들이었다
엄마가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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