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저녁에 직장에서 일을 하던 중이었다. 경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에 있던 4살 배기 어린 딸이 살해되었다는 비보였다. 놀란 여자는 딸과 함께 있던 아들은 괜찮냐고 경찰에 묻는다. 아들은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그럼 자신이 데리러 가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경찰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여자의 딸을 죽인 범인이 바로 13살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케이티 그린과 카일 루빈이 2017년에 만든 다큐 'The Family I Had'는 한 가족에게 닥친 참혹한 비극을 통해 범죄와 유전, 형벌 제도의 의미를 들여다 본다.

  원래 두 명의 제작자들은 청소년에게 선고되는 과도한 형량과 사법 제도에 대한 다큐를 만들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이 아들의 손에 딸을 잃은 여성 채리티(Charity)였다. 채리티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 팔과 목덜미를 가득 메운 문신은 이 여성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성장 과정 내내 방황했던 여자는 약물 중독에 시달리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뜻밖에 생긴 첫째 아이 파리스는 여자에게 새로운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러나 싱글맘으로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또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엘라, 천사같은 아이를 보며 삶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던 와중에 여자에게 견딜 수 없는 비극이 찾아온다.

  다큐는 3년에 걸쳐 촬영되었다. 관객은 채리티와 채리티의 모친, 수감 중인 파리스와의 인터뷰를 들을 수 있다. 중간 중간 들어간 그들 가족의 홈 비디오 화면을 비롯해 파리스의 글과 그림이 이 기구한 가족사를 증언한다.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은 파리스의 형기는 40년, 채리티는 수감 중인 아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엄마로서 아들에 대한 애정을 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여자의 상황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런 가운데 여자에게 아들 피닉스가 생긴다. 여자는 여전히 싱글맘으로 살아간다.

  다큐는 채리티의 인터뷰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데, 사건 당사자의 편향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채리티는 아들의 범죄가 가계(家系)에 흐르는 유전적 소인에 있음을 되짚어 준다. 파리스의 부친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채리티는 자신의 모친 카일라에 얽힌 어두운 과거를 폭로한다. 젊은 시절 카일라는 남편 청부 살해 혐의로 기소당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채리티는 모친의 무죄를 믿지 않으며, 모친의 범죄 성향과 냉정한 양육 방식이 자신의 오늘을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여자는 파리스의 범죄를 유전과 환경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을 가진 파리스가 어린 여동생을 괴롭히는 홈 비디오 장면은 나중의 비극을 예감하게 만든다. 카일라는 채리티가 아들의 그런 성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방치했다고 증언한다. 파리스가 12살 때 자신이 마약에 다시 손을 댔다는 과오는 인정하지만, 채리티는 기본적으로 그 모든 사태에서 자신의 책임을 지워버린다. 파리스에게 공격을 받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음에도 여자는 아들에게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감옥에 수감된 아들을 주기적으로 면회하는 것을 사랑과 용서의 행위라고 포장하는 이 여자에게는 분별력과 책임감이 없다.

  이런 종류의 다큐를 만들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일까? 바로 선정성과 저널리즘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실제 사건의 세부 내용을 언급하는 자체로도 너무나도 충격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위까지 다룰 것인지가 중요하다. 자신의 동생을 죽인 살인범의 차분하고 뻔뻔한 인터뷰를 보는 것은 분명 고역이다. 이제 청소년이 된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과거 행동으로 40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 나름의 불만을 토로한다. 다큐는 중심을 잃고, 이 기구한 모자의 이야기에 휘둘려 끌려다닌다. 도대체 이 다큐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채리티의 이야기는 사이코패스 아들을 둔 엄마의 인간극장처럼 보인다.

  2027년, 파리스는 가석방 신청 요건을 갖추게 된다. 다큐 이후에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파리스는 엄마에 대한 증오심으로 범죄를 저질렀으며 당시에 엄마까지 죽이려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엄마 채리티는 다큐에서 한 이야기로는 부족했는지 2020년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펴냈다. 아들이 석방될까봐 무섭다고 말하는 이 엄마는 자신과 아들의 이야기라도 팔아 돈을 마련해야하는 걸까? 감옥에서 나오면 자신의 엄마를 죽이겠다고 공언하는 아들, 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가족의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청소년 범죄자에게 가혹한 사법제도를 비판하려 했던 'The Family I Had'는 결국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영구적 격리가 답이라는 의외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이 다큐를 본 이들은 '사이코패스'가 돌에 새겨진 성격과도 같으며 치유와 갱생이 불가능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cinemajam.com   자신의 모친 카일라를 바라보는 채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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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한국 영화를 보았다. 영어 자막이 있었는데, 계속 외국 영화를 보다 보니 우리말 대사임에도 나도 모르게 자막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 5분 정도를 그러다가 대사에 익숙해지니 그제서야 자막을 무시할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자막 있는 외국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거추장스러운 자막 없이 온전히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렇게 본 영화는 홍상수의 2020년작 '도망친 여자'이다.

  영화의 첫 장면, 전원 주택의 텃밭에서 물을 주고 있는 영순이 등장한다. 이웃에 사는 젊은 여성이 오늘 면접을 보러 간다며 영순에게 인사를 한다. 그런데 영순의 대사톤은 연극하는 것처럼 영 어색하고 느리게 들린다. 영순과 대화하는 이웃 여성도 마찬가지. 영화 내내 이 이질적이고 느린 대사톤이 이어진다. 보다보면 적응이 되기는 한다. 홍상수식 '낯설게 하기'인가? 아무튼 그렇게 이어지는 대화들의 내용도 시시하기 짝이 없다.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에 모처럼 영순을 방문한 감희(김민희 분)는 고기와 막걸리를 사들고 온다. 고기 구워먹으면서 하는 대화들이 어떤 것이냐 하면, '고기맛이 정말 좋다'와 '소의 눈망울이 세상에서 제일 순수하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 뭐 그런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웃에 산다는 남자가 그들을 찾아온다. 아내가 고양이를 무서워 하니까 고양이 밥을 주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감희는 집안에서 CC TV로 그것을 보고 있다가 나중에 나온다.

  두 번째 방문에서도 그런 상황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감희는 인왕산 아래 주택에 사는 수영(송선미 분)을 만나러 간다. 대화 도중 수영의 집을 찾아온 남자가 있다. 감희는 현관의 인터폰 화면으로 수영과 남자의 대화 장면을 본다. 세 번째 만남의 장소는 영화관, 그곳에서 감희는 과거의 친구를 우연히 만난다. 우진은 감희와 한 때 사귀었던 남자 정 선생과 결혼했다. 정 선생(권해효 분)은 마침 그곳에서 북 콘서트를 하고 있다. 감희는 남자와 대화를 나눈다. 이번에는 관찰자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대면한다. 이렇게 등장하는 세 명의 남자들은 다 등을 돌린 채로 대화를 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렇게 남자들이 쪼그라든 비중으로 나온 적이 있었던가? 영화는 시종일관 여자들의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들은 지극히 일상적이며 건강과 돈, 관계에 대한 시시한 잡담들이다. 물론 남자들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기는 한다. 영순은 전 남편과 힘든 과정을 거쳐서 이혼했고, 수영은 필라테스 강사일 하면서 10억이나 되는 돈을 모았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고민이다. '한국 남자들이 좀 심하지'라고 말하는 수영은 건축가 별거남과 잘해보려는데, 연하의 스토커가 말썽이다. 감희의 과거 남친과 결혼한 우진은 어떤가? 남편의 유명세와 말 많은 허세가 싫다며 감희에게 토로한다.

  그렇다면 주인공 감희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까? 남편과 지낸 5년 동안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은 늘 가까이 있어야 된다는 남편의 신조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감희. 남편을 사랑하냐는 영순의 질문에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고 얼버무린다. 감희와 지인들이 나누는 이런 대화들을 듣다보면 정말로 저 사람들은 진심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홍상수는 그 대화 장면들을 대부분 풀 쇼트와 미디엄 쇼트들로 처리한다. 관객이 인물들의 표정을 좀 더 자세히 보면서 대화의 뉘앙스를 파악하고 싶어도, '딱 여기까지만'하고 선을 그어놓고 더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는다.

  감희는 자신이 만나는 지인들의 삶의 여건을 부러워하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한적해서 살기 좋을 것 같은 영순의 집은 이웃이 키우는 닭 우는 소리가 새벽 내내 들리고, 또 다른 이웃인 젊은 여성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 영순의 집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 수영은 또라이 같은 연하 스토커에게 시달리는 중이다. 우진은 잘 나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괴리감을 느낀다. 영화의 제목 '도망친 여자'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영순은 이웃집에 살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과 힘겹게 이혼한 영순은 교외의 전원 주택으로 도피한 것일 수도 있고, TV에서 매번 같은 말을 늘어놓는 남편에게 진력을 내는 우진은 그렇게 마음이 멀어져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감희는? 관객은 감희가 남편을 사랑하는지, 결혼 생활은 어떤지 알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떨어지면 안된다는 것은 남편의 신조이지 감희의 의지가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감희는 과거 남친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감희는 정말로 정 선생을 우연히 만난 것일까? 일부러 찾아온 거 아니라고 말하는 감희와 그게 아니지 않냐고 되묻는 정 선생. 두 사람의 대화에는 질척거리는 과거의 잔재가 느껴진다. 정 선생과의 대화를 황급히 끝낸 감희는 영화관을 나오다 다시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본 영화를 다시 또 본다. 감희가 보는 영화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 그 영화를 보는 감희의 모습은 남편에게서 도망쳐 나와 잠깐의 휴식을 누리는 사람 같다.

  이 영화의 IMDb의 관객 리뷰에 별점 1개를 준 이는 이렇게 써놓았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어처구니 없으며(absurd), 마치 학교 과제 프로젝트 같다. 이 영화를 본 내 시간이 아까울 따름이다' 나는 그 리뷰의 두 가지 사항에는 부분적으로 수긍할 수는 있지만, 마지막 부분은 좀 생각이 다르다. 시시한 대화들로 채워진, 뭔가 어설프게 보이는 이 영화를 나는 꽤 즐겁게 보았다. 그냥 즐거웠던 정도가 아니라, 매료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 영화에는 기이한 매혹이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영화관에서 본 것이 1996년, 나는 결코 홍상수 영화의 열성적인 관객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영화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지만, 어느 때고 다시 돌아가 홍상수의 영화들을 챙겨서 보기는 했다. 한 명의 관객이 25년이 지났음에도 그가 내놓는 영화들에게서 마음이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 또한 홍상수가 지닌 재능이다. 영순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던 감희는 영순이 문닫고 보여주지 않는 3층에 대해 말한다. 너무 더러워서 보여주지 않는 거라고 말하는 영순에게 감희는 자신을 못믿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묻는다. 정말로 영순의 집 3층은 더러운 곳일까? 아니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까? 홍상수에게는 영순의 집 3층처럼 아직도 꼭꼭 감춰둔 자신의 영화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asianmovie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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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언제나 이야기가 문제가 된다. 마치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쫓아가려는 유전자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문학 작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늘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영화라고 뭐가 다를까? 물론 영화는 다양한 시각적 실험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관객들은 언제나 주인공과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카렌 샤크나자로프(Karen Shakhnazarov) 감독의 1998년 영화 '보름달이 뜬 날(Day of the Full Moon)'은 그런 관객들의 기대를 보기좋게 배반한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려 80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이 쏟아지는 영화, 그런데 거기에는 주인공도 이야기도 없다.  

  영화의 도입부, 영화사를 찾아가는 한 남자가 보인다. 남자는 영화사 관계자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인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골머리를 썩고 있다. 남자의 조부모가 귀족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거기에서 소재를 얻고자 모친의 영화사 방문을 의뢰한다. 그렇게 남자는 떠나고, 두 사람은 몽골 제국의 칭기스 칸을 등장시키는 것은 어떤지 서로 의견을 나눈다. 그러고 나서 화면은 몽골 초원의 소년 칭기스 칸을 비춰준다. 다음 장면, 영화사 복도에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 지망생이 등장한다. 멋진 외모의 여성은 버스에 타는데,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의 자동차 승객과 눈이 마주친다. 미소를 지어보이는 젊은 남자, 그와 일행은 외딴 차고지에 도착한다. 잠시 후, 어디선가 도착한 승합차의 문이 열리고 기관총이 난사된다. 차에 탄 이들은 모두 죽는다. 차고지 근처를 지나는 지하철이 마침 멈춘다. 늙은 승객이 처참한 현장을 목격하지만 그는 공원으로 향한다. 공원에 앉아있던 노인은 방송국 인터뷰에 응한다. 노인이 들려주는 과거의 기억, 장면은 1940년대의 어느 레스토랑으로 바뀐다.

  그쯤 되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충 감이 온다. 마치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영화의 내러티브는 서로 스쳐지나가는 인물들에게서 끊임없이 부딪혀서 튕겨져 나가며 그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시간은 현재에서 1940년대, 근대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이러한 비선형적(非線形的) 시간 구조, 스토리를 계속 분쇄시켜가는 이 영화는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Short Cuts, 1993)'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되는 '숏 컷'과는 달리 '보름달이 뜬 날'은 방사형으로 뻗어나갈 뿐이다. 카렌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자신의 영화적 실험이 관객들의 저항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영화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가 제작된지 20주년을 기념하며 모스 필름과 했던 인터뷰에서 그는 새로운 예술적 도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가 1990년대의 러시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그의 부연 설명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여러 등장 인물들의 삶의 편린들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킨다. 기관총을 난사하는 갱들과 청부 살인을 저지르는 저격수는 자본주의의 도입과 함께 러시아에 자생하기 시작한 폭력조직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차에 탄 저격수를 비추던 카메라는 차 안의 노래를 소개하는 DJ가 있는 라디오 방송국으로, 그리고 나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 노래를 신청한 여성 청취자의 방으로 이동한다. 새로운 러시아의 젊은 여성은 신나게 자신의 방 안에서 춤을 춘다. 이 아가씨의 모습은 이전까지 보았던 구 소련 영화의 젊은 세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 소련은 붕괴했고, 이제 '러시아'라는 이름의 나라가 등장했다.

  국가가 영화를 검열하던 소련 시절이라면 등장하지 못할 매춘부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귀엽고 청순한 외모의 매춘부는 TV를 보다가 중세 수도원의 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썩지 않고 발견된 공주의 시신, 그런데 그 공주는 매춘부의 얼굴과 똑같다. 1990년대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은 영화 속에서 여러 번 작동한다. 푸쉬킨이 몽골계 민족인 칼미크족  여성과 만나는 장면도 있다. 그런 장면들을 통해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러시아'라는 나라의 근원,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붕괴했지만, 러시아인이 가진 고유의 정체성은 손상될 수 없는 것이다. 러시아 정교의 오랜 전통, 위대한 문인 푸쉬킨, 칭기스 칸이 호령했던 중앙아시아의 끝없는 들판, 이 모든 것은 현대의 러시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보름달이 뜬 날'은 분명히 소련 이후의 러시아 사회를 보여주지만, 샤크나자로프 감독의 시선은 좀 더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을 바라 본다. 그의 시선은 인간에게서 동물의 내면으로까지 향한다.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늙은 개는 주인과 함께 했던 사냥의 기억을 떠올린다. '기억'은 이 영화에서 주요한 주제가 된다. 과거의 연인인 재즈 연주자를 무대 뒷편에서 만난 여자는 둘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1940년대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잔을 깨뜨리는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기억을 가진 두 명의 사람도 나온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이지만, 그렇게 공동의 기억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그들을 비롯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역사'라는 거대한 모자이크화의 미분화된 점들처럼 보인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의 영화적 실험은 성공적인가? 관객에 따라서는 이야기의 깊이가 없는 이 영화의 피상적 접근 방식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는 무의미한 편린들의 나열처럼 보이는 '보름달이 뜬 날'에서 의외로 굳게 내린 현실의 뿌리를 발견했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시대에 대해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고 그것을 영화 속에 끌어들인다. 영화가 만들어진 1998년, 어설프게 이식된 자본주의는 러시아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그해 러시아는 갑작스럽게 닥친 금융 위기로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했다. 결국 러시아는 혹독한 경제 성장통을 치루어야만 했다. 그 시기에 만들어진 '보름달이 뜬 날'에는 공산주의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신생 국가의 흔들림과 들뜸, 불안정한 모습이 들어 있다. 



*사진 출처: mosfilm.ru  '보름달이 뜬 날'에서 연기지도를 하는 카렌 샤크나자로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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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재일 교포 소녀 야스모토 스에코가 쓴 '니안짱'이란 제목의 일기 모음집이 출판된다.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4남매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인 1959년에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일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 '니안짱'은 일기를 쓴 주인공인 막내 스에코가 둘째 오빠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같은 해, 유현목 감독도 일기책 '니안짱'을 영화로 만든다. '구름은 흘러도'란 제목의 이 영화는 당대 한국 영화의 스타들이 꽤 많이 나온다. 무엇보다 주인공 말숙 역을 맡은 김영옥의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아역 배우가 원로배우 김영옥 씨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영화는 동일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하는데도, 서로 다른 부분들이 눈에 띈다. 처절한 가난을 다룬 점은 동일하지만, '니안짱(My Second Brother)'이 재일 한국인의 현실을 삽화적으로나마 묘사했다면 '구름은 흘러도'는 어린 소녀의 성장에 더 비중을 둔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니안짱'에 대해 나중에 술회하기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영화가 아니라 영화사(니카츠)의 문예 영화였기 때문에 큰 애착을 갖고 찍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영화는 촬영과 연출, 여러 부분에 걸쳐서 공들여 찍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다가 보이는 후쿠시마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광부들의 파업 장면을 비롯해 어촌 마을의 일상, 그곳 주민들의 가난에 찌들린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53년으로 당시의 일본은 패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던 때였다. 탄광촌의 경우는 생존의 여건이 더 열악했다. 종전 후 일본은 주력 에너지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탄광들이 문을 닫았다. '니안짱'의 4남매는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광부인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말 그대로 거친 세상에 내던져 진다. 큰 오빠는 탄광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기를 바라지만, 이미 많은 인력이 해고되는 상황이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언니는 인근 도시의 정육점에 취직하고, 니안짱과 스에코는 이웃 헨미 씨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한다.

  유현목 감독은 '구름은 흘러도'의 화자를 말숙으로 설정하고, 말숙이 쓰는 일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그와는 달리 이마무라 쇼헤이는 스에코와 니안짱을 공동 화자로 설정한다. 일기를 쓰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니안짱'은 내러티브의 많은 부분을 4남매와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에 쓴다. 4남매는 탄광촌의 재일 한국인 공동체 구성원들을 비롯해 일본인 이웃들(헨미 씨)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어 자막에서는 재일 교포(조선인)라는 점이 일본어 대사처럼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서양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가 될 수도 있다. 같은 조선인이라 하더라도 욕심 사나운 이웃 할머니처럼 4남매를 이용해 먹으려는 이도 있고, 첫째 오빠의 친구로 고물 장사를 하는 착한 이도 있다. 영화는 조선인 공동체가 일본 사회에서 받는 차별과 냉대를 모호하게 처리한다. 아마도 그런 민감한 부분을 드러내기 보다는, 4남매의 가난과 고통스런 현실을 일본 관객들에게 더 부각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1959년쯤 되면, 일본은 한국 전쟁으로 인한 경제 특수를 누리면서 자신들의 어려웠던 시절을 조금은 성찰할 여유를 갖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영화 속 4남매가 고통스런 가난의 현실 속에서 가족애를 보이는 모습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괴롭고 힘든 현실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구름은 흘러도'의 맨발의 말숙(말숙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맨발로 나온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담임 선생처럼, '니안짱'에서도 담임 선생과 보건소 카네코 선생이 스에코에게 힘이 되어준다. 두 영화는 4남매가 가난 때문에 떨어져 지내는 것과 둘째 오빠 니안짱의 가출 소동을 비롯해 여러 에피소드들을 공유한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구름은 흘러도'가 말숙의 일기가 출판되면서 탄광촌에 금의환향하는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니안짱'은 가출했던 니안짱이 돌아와 스에코와 탄광의 언덕배기를 힘겹게 오르는 장면으로 끝난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내겠다'는 니안짱의 마지막 독백은 일본 사회에서 생존해 나가고자 하는 재일 한국인 소년의 동화 의지를 보여준다. 각색 작업에도 참여한 이마무라 쇼헤이는 소녀의 목소리 대신에 강인한 성격의 니안짱의 목소리를 선택했다. 그러나 실제의 현실에서 4남매를 구원한 것은 스에코의 글이었다.

  '니안짱'의 개봉과 함께 책은 더욱 불티나게 팔렸고, 책의 인세가 4남매의 안정적 삶을 보장해 주었다. 원작자 야스모토 스에코는 와세다 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문인으로 평탄한 삶을 이어갔다. 그야말로 책 한 권으로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셈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유현목 감독의 '구름은 흘러도'의 결말이 그들 4남매의 후일담과 더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 영화 가운데 유현목 감독의 연출이 좀 더 좋다고 느꼈다. 물론 '구름은 흘러도'는 재일 교포라는 원작자의 출신 배경이 제거된 맥락으로 만들어졌지만,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견디려는 소녀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작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

  '니안짱'은 스에코의 목소리 대신에 4남매가 겪은 비참한 가난의 현실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일본인들이 지나온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이 영화를 재일 조선인의 시련기 내지는 정체성에 대한 탐구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일본인들의 감상은 가난했던 그 시절에 대한 소회와 가족애에 대한 공감이 주류를 이룬다. '니안짱'을 보는 한국 관객들은 영화가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또는 의도적으로 숨긴 재일 교포들의 차별적 현실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미완의, 상상력을 활용해 메꾸어야 하는 불완전한 영화적 텍스트로 남겨진 셈이다.  



*사진 출처: nikkats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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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심리학이 헐리우드 영화에 드리운 그늘, The Dark Mirror(1946)와 Compulsion(1959)의 경우

  1940년대 헐리우드 영화에서 프로이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히치콕의 '스펠바운드(Spellbound, 1945)'이겠지만, 로버트 시오드막(Robert Siodmak)의 '다크 미러(The Dark Mirror, 1946)'도 그에 필적할 만하다. 시오드막 감독은 독일 출신으로 '다크 미러'에서 표현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정신의학과 심리학 전공자들은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는 유사(類似) 심리학적 지식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쌍둥이는 선과 악이 분리된 각각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 등장하며, 로르샤 검사(Rorschach test)는 범죄 성향을 파악하는 도구로 쓰인다. 이런 영화들을 보다보면 정신분석학이 당시 헐리우드 영화들을 망가뜨린 것인지, 헐리우드 제작자들과 시나리오 작가들이 프로이트의 학문을 곡해한 것인지 가끔씩 생각해볼 때가 있다.

  '다크 미러'는 도입부에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곧이어 목격자들에 의해 용의자로 지목된 여성이 등장한다.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는 테리(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분)는 경찰의 심문을 받는다. 그런데 테리에게는 쌍둥이 동생 루스가 있고, 그 두 사람은 각자 강력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티븐슨 형사는 쌍둥이 연구자인 엘리엇 박사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박사는 쌍둥이들에게 자신의 연구에 참여하길 요청한다. 개별적으로 테리와 루스 자매의 정신 분석 연구를 진행하던 엘리엇 박사는 점점 자매의 서로 다른 기질을 파악하게 된다. 박사가 루스에게 호감을 느끼자, 테리는 질투에 휩싸이고 루스의 불안을 조장하기 시작하는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1인 2역을 맡아 테리와 루스의 서로 다른 면을 섬세하게 연기한다. 편집증적이고 냉혹한 내면을 지닌 테리, 그런 테리에 의해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착하고 유약한 루스, 이렇게 분리된 선과 악의 캐릭터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연상하게 만든다. 엘리엇 박사는 나름대로 자신의 전문적 지식을 총동원해서 테리와 루스 가운데 누가 범인인지 알아내려고 애를 쓴다. 거짓말 탐지기로 알려진 폴리그래프(polygraph)도 나오고, 잉크 반점을 이용한 카드를 제시하며 연상되는 것을 말하게 하는가 하면(로르샤 검사), 심지어 왼손잡이(영화 속 테리)는 뭔가 비뚤어진 어두운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과연 전적으로 선하기만 하고, 또는 사악하기만한 인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쨌든 영화 속 테리와 루스는 전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성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사악한 기질을 범죄 성향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타고난 것으로 결코 외적 요인에 의해서 변화될 수 없다고 상정된다. 엘리엇 박사는 루스를 가장하고 자신을 찾아온 테리에게 '테리의 내면은 뒤틀려 있다'고 말한다. 무언가 결여된, 일그러진 내면을 가진 이 여성은 자신의 쌍둥이 자매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고까지 한다. '다크 미러'가 보여주는 범죄에 대한 관점은 타고난 천성, 생득적 요인에 의한 필연적 결과이다. 그러한 시각은 종종 살인 사건과 같은 중대 범죄 재판에서 정신분석학을 감형 요건으로 이용하려는 데에까지 미쳤다.

  리처드 플라이셔(Richard Fleischer) 감독의 '강박충동(Compulsion, 1959)'은 1924년에 시카고에서 있었던 실제 살인 사건 재판을 다룬다. 명문대에 재학 중인 두 명의 부유한 남학생들이 아동을 납치, 유기한 잔혹한 범죄였다. 니체의 초인 사상에 경도된 '레오폴드와 로우브(Leopold and Loeb)'는 자신들의 지적인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완전범죄를 기획하고 실행한다. 영화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세부적 묘사는 생략하고, 대신 재판 과정을 길게 늘어놓는다. 실제로 동성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검열(Hays code) 때문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사건의 설정을 따온 히치콕의 영화 '로프(Rope, 1948)'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의 동성애적 관계가 범죄의 주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것을 묘사할 수 없게 되면서 범죄의 동기는 정신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병들고 썩은 내면, 즉 구제할 수 없는 정신적 이상(abnormality)이 법정에서 두 사람의 범죄를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정신의학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증인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레오폴드와 로우브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변호인 측이 내세운 논리가 그와 같았다. 변호인단은 범인들이 성장 과정에서 겪었다는 학대와 심지어 내분비계의 문제가 환각 증상을 불러왔다는 이야기까지 들먹였다.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인간 내면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유용한 도구일 뿐이지,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특히 이상 심리와 범죄를 연결지어서 보여주는 기존 영화의 내러티브 방식은 때론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구태의연하게까지 보이는 면이 있다. '다크 미러'는 1940년대 헐리우드 영화가 천착한 '이상 심리학' 장르의 계보를 보여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군데군데 헛점이 보이고 때론 실소가 나오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 시대가 범죄를 바라보는 지배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플라이셔의 '강박충동'에서도 그러한 관점은 강력하게 지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영화에서 프로이트의 정식분석학적 틀이 인용되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 심리의 연구는 뇌과학과 유전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확장되었고, 영화도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런 시대적 조류에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진 출처: classicfilmnoir.com   'The Dark Mirror'의 루스와 테리(그들은 각자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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