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시간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화장실 청소는
이상하게 하루 이틀씩
미뤄져 일요일에
하던 것이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그렇게 미뤄지다
한 달 만에 일요일
악보의 도돌이표

무대공포증에 걸린
피아니스트는
다시는 무대에서
연주를 못할 것
같은 심정이 되어
갖고 있는 모든
악보를 내어다
버릴 궁리를 하지

매일 음계 연습을
하지만 암만 궁리해
봐도 이걸로 먹고
살 방편은 참으로
요원하며 눈물나게
궁핍하며 짠하게
소름이 돋고
소금물을 들이킨
심정이 되어 버려

하기 싶지 않은 때에
하기 싫은 이야기를
쓸 수 있어야 한다,
고 누군가 주제넘게
충고하더군 참으로
오랫동안 너는
하고 싶은 때
하고 싶은 이야기만
써내려고 했어

화장실 청소같은
불편한 인생의
모서리 가만히
고개를 수그려
쓰고 싶지 않은
이 시간에
쓰고 싶지 않은
이 시를 쓰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업주부(專業主婦)


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요
인터넷 게시판에
나이 오십의 주부가
글을 썼다 전문직
친구가 마냥 부럽고
남편은 자신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군
누군가 위로하길
인생에서 비교는
무의미해요 자신의
인생을 살면 되는
거죠 진짜 그러냐
그런지도 모른다
비교는 찌그러진
얼굴의 지름길이다
타인의 행복을
곁눈질하며 아픈
상처에 빙초산을
들이붓고는 왜 삶이
이 모양인가 무수히
묻다가 쇼핑몰 앱에
고개를 콕 파묻는다
지뢰가 깔린 상품들의
홍수림(紅樹林)에서 빠져나올
구멍은 그 어디에도
없다 마음의 누추한
평화를 찾기 위해
들락날락하면서
그렇게 또 멀미나는
하루의 끝에 서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의 미래


말라비틀어진 눈에
인공눈물을 넣고
시를 쓴다 시란 본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국을 끓여먹을
수도 어디다 내다 팔
수도 없다 그저 마음이
괴로운 이들이 파고 또
파는 무수한 우물일
뿐이거늘 너는 한밤중에
시를 쓰고 있는가 아마도
그것은 이 시의 미래를
믿기 때문이다 지금 듣고
있는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한 피아니스트는
19일 전에 세상을 떴다
그의 음반을 듣는 동안
나는 그의 영혼과 이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
예술은 영매(靈媒)이며
신성한 것을 지상에
중계한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것에
접속할 뿐이다 시는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시간과
그 시간을 사는 독자를
향한다 나는 그 독자에게
신호를 보낸다 얼어붙은
변방에 살고 있는 자의
바늘 같은 뾰족한 눈물과
푸르스름한 의지의 신호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못쓴 시



못쓴 시는
못생긴 얼굴
같아 엄마는
얼굴이 못생긴
것과 무식한 걸
제일로 싫어하셨지

엄마가 고른 남편은
그러니까 내 아버지는
많이 배웠고 잘 생겨서
좋아하셨지 그런데
엄마 인물은 어떤가
솔직히 말하면 별로야
눈도 별로 코도 별로
입매도 별로 언젠가
아빠에게 가만히
물었더랬지 엄마와
왜 결혼했어 그건 말이다
가을에 받은 편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거든

진한 커피색 계절에

그 진한 커피색
계절에 떠난 아버지
생각이 난다
참으로 써지지
않는 못생긴 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일의 봄비
 

덥고 눅눅한 공기
이상고온의 4월
귀신같이 아픈 오른쪽
귀는 비의 일기 예보

지기 시작한 꽃들을
보러 나간다 라일락과
겹벚꽃 스러지는 모든
것들은 아프고 서러워
멀리서 보이는 흰꽃의
큰 나무 한 그루
세상에, 라일락 나무야
아마도 서른 살쯤
견디고 견디어낸
무명의 삶 말없이
건네는 경외의 인사

재활용품 수거장에
나온 낡은 장롱 안
키 작은 의자 둘이
등을 대고 의지하며
어차피 인정사정없이
쪼개어질 너희들의
미래 그래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가만히 귀 기울여
내일의 봄비 소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