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기 -상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최연 옮김 / 소화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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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랑기는 일본의 근대를 대표하는 여류작가인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일기체 소설이다. 나는 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꺼내어 읽다가, 기억 속에서 책의 내용과 중첩되는 이미지들을 찾아냈다. 그것은 나루세 미키오가 만든 "방랑자의 수첩(1962)"이란 영화였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술집의 종업원, 여관의 여급, 경리, 파출부 등, 생계를 위해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시를 쓴다. 그리고 어려움 끝에 마침내 작가로 성공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그려내는 감독 나루세 미키오의 시선이 참으로 기이했다. 감독은 이 영화를 여류작가의 눈부신 성공담처럼 그려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는 격동하는 근대 속에서 여성작가가가 자신의 길을 찾기까지 겪어야 했던 밑바닥 생활의 궁핍과 남자들과의 어긋난 연애담, 비루했던 일상을 가감없이 그려낸다. 나루세 미키오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 작가, 시인, 예술가의 삶에 드리워진 보기좋은 허울과 치장을 걷어내고 그 이면의 삶에 대해 연민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하야시 후미코였다. "방랑기"는 나루세 미키오가 만든 "방랑자의 수첩"의 원작이 되는 작품이다. 영화는 연대기순으로 서사를 이어가지만, "방랑기"의 서사는 그렇지 않다. 후미코는 마치 일부러 시간을 섞어놓은 것처럼 일기와 시들이 정확히 언제 쓴 것인지 모르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방랑생활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글인 것이다.

  그러한 연대기적 혼란 속에서 작가의 삶에 대한 진정성과 빼어난 문학성은 역설적으로 더욱 빛난다. 무엇보다 그녀가 쓴 시들이 너무도 훌륭해서 읽는 내내, 그 시집들을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는가를 궁리하게 만들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나온 것이 없고, 만약 구한다면 일본에서 나온 전집을 사와야할 판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내가 일본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 정말이지 그녀의 시집을 꼭 구해서 읽고 싶다).

  혼란과 격동의 일본 근대를 살아갔던 한 여성이 있었다. 시인으로, 또 작가로서 그녀는 마치 피를 토해내듯 어렵게 글을 써가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방랑기"는 그 시절에 대한 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고백이자, 문학에 대한 연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작품이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좋은 역자를 만나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낌없이 별 다섯을 준다. 다섯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 "방랑기"는 상권과 하권, 그렇게 두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핍한 시대에 더 빛났던 한 여성 작가의 영혼을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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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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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작을 하는 이들에게 창작 수업의 합평 시간은 매번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나 또한 합평 시간마다 아무렇지 않게 오고 간 날이 선 비평의 말들에 익숙해지는 일은 쉽지가 않았었다. 괜찮다고 써간 글이 그 시간이 되면 너덜너덜한 글 조각이 되어 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시 창작 수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써간 시들은 그 순박한(!) 감상성이 문제였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시어들은 촌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나는 넘쳐나는 감정의 시어들을 과감하게 잘라내느라 힘이 들었다. 

  문태준의 "가재미"를 읽으면서 내가 나의 시에서 그토록 잘라내고 싶어했던 깊은 감성과 정서의 뿌리를 발견해냈다. 시 창작 수업 선생님이 질색을 하던 그 감정의 시어들이 문태준의 시 세계에서는 자유롭게 유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모처럼의 평안함을 느끼면서 한때 내가 써낸 시들이 참으로 못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감정이 베어져 나오는 시는 촌스럽지 않다. 오히려 때론 눈이 시린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만든다.

   이제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 시를 통해 정서를 드러내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태준의 시집을 읽고 잠깐 생각했다. 다시 시를 써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가재미"에는 시를 통해 내가 드러내고 싶어했던, 한때 열렬히 찾아 헤매었던 깊은 정서의 뿌리들이 가닥 가닥 살아있다.  

  시에서 베어져 나오는 눈부신 정서의 힘을 느껴보고 싶은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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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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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소설 작법에 있어서도 내적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 평면적인 캐릭터는 이야기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주인공은 반드시 변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고 창작 강의 시간에 소설가 선생님은 강조하곤 했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는 법이다. 

  "완득이"는 성장 소설의 기본 문법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세상과 사람에 대한 소통을 거부하던 완득이는 주변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조금씩 벽을 깨고 나오기 시작한다. 작가는 완득이의 개인적 성장을 그려내면서 거기에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래서 "완득이"는 한 청소년의 성장일기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나름의 의미있는 텍스트로 읽힌다.

  아동문학, 내지는 청소년 문학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제는 고인이 되신 권정생 선생의 "몽실언니"가 주는 따뜻하고도 가슴저린 느낌으로 남아있다. "완득이"를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마치 시간터널을 통해 다른 시간대로 순간이동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당혹감과 이질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인물과 상황에 대한 설정이라고는 해도 욕설과 비속어를 이야기 내내 반복해서 읽어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또한 작가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과 시각은 어떤 면에서는 단선적이고 표피적인 것처럼 보인다.

  "몽실 언니"의 몽실이나 "완득이"의 주인공은 모두 상처를 지니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사는 모습이 달라져도 아이들이 고민하고 꿈꾸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상처를 보듬어가며 아이는 커나간다. 어쨌든, 완득이는, 소년은 성장한다.

  "완득이"를 덮으며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성장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가난한 애들일까 하는. 부잣집 애들의 성장 이야기는 별로 매혹적이지 못한가? 아마도 어려움과 결핍이 인생의 숨겨진 많은 면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싶은 생각이 문득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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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나 씁쓸함을 느끼며 돌아서야했던 전시회였다. 서울 시립미술관의 이전 기획전시였던 "모네 전"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고흐 전"은 그 상업성의 양상이 더 심화되었다는 데에서 극도의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명색이 고흐 전시회에 유화 작품은 얼마되지 않고 사진과 드로잉이 전시실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솔직히 납득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전시회를 다녀온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면 오로지 고흐의 진품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도판으로만 접했던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보고서야 그만의 풍부한 색감과 그림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나의 눈길을 끌었던 작품은 "아이리스"였다. 몇번을 보고 다시 보아도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신비함과 우수, 아름다움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시회 표값 만 이천원이 그나마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아마도 그 작품 때문일 것이다.

  전시장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건 미치기 전에 그린 건가봐." 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고흐가 위대한 것은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잘라버리게 만들만큼의 광기의 삶을 살았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 속에서도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고흐와 그의 그림이 미치기 전과 미친 후의 두 시기로 양분되어서 평가받는 것은 너무나 부박한 세상의 시각이다.

  평생 가난과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시달리면서도 고흐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예술이 가져다주는 구원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을 전하고자 전도사로 탄광촌의 광부들과 가난한 사람 속으로 들어갔던 그가 그림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흐는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으로 추측되는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겪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가난과 정신적 고통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온전한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 뿐이었다. 그의 생전에 그가 그린 그림들은  세상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세상은 바뀌어서 고흐의 그림들은 이제 천문학적 액수에 거래되는 고가의 미술품이 되었다. 한 예술가의 광기와 고통스러운 삶은 그림의 후광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고흐는 분명 무능한 예술가였다. 살아있는 동안 팔린 그림은 단 한점 뿐이었다. 자신의 그림을 보기좋게 기획하고 포장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우수한 작가의 역량으로 평가하는 현대의 미술계에서 고흐 같은 예술가는 더이상 존재하기 어렵다. 미술에 "개념"이 들어오면서 어떤 면에서 작가들은 알맹이 보다 포장에 공을 들이게 되었고, 그때부터 예술은 상업성의 거대한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미술이 그렇게 되기 전, 예술이 가져다주는 구원을 진정으로 믿었던 한 사람을 나는 만났다. 고흐의 그림은 그 자신에게나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구원의 한 자락을 발견하게 만든다. 

 

   덧붙이는 글: 

  넘쳐나는 관람객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서 제대로 감상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예술 교육을 시키겠다는 엄마들의 과도한 열정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건 나무를 그린 거고, 이건 강을 그린 거야"정도의 설명을 아직 말귀도 못알아듣는 어린 아이에게 열심히 하고 있는 그네들을 보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아예 처음부터 초등학생들에게 오디오 해설기를 안겨주는 학부모도 있다. 그순간부터 아이들에게 전시회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반강제적 행사가 된다. "이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은 뭐지?"라고 매번 일일이 감상을 묻는 엄마에게 대답을 해야하는 아이의 얼굴을 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즐겁게 미술관을 체험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일까? 그들을 바라보는 어른도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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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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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몇년 전에 길을 가다 우연히 박완서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그렇게 만나게 되다니, 들뜬 마음에 몇마디 말을 붙여보았던 기억이 난다. 선생은 그다지 내켜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것 같다. 반듯하고 다소 차가워 보이는 그 때의 짧은 인상은 이후 선생의 글을 대할 때마다 중첩되어서 읽히곤 했다.

  "친절한 복희씨"는 읽히는 재미가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매력적이지만, 작가와 나이듦의 함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작가도 나이가 들면 글 쓰는 것이 예전과 같지는 않다. 우선 작업량에 있어서 그렇고, 주제의식이나 깊이에 있어서도 이전에 자신이 고수해왔던 것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도 어렵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친절한 복희씨"는 선생의 펜촉이 이제는 세월과 함께 조금씩 무뎌지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나이듦에 따른 원숙함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 선생의 첫 작품인 "나목"을 다시 읽어보았다. 다소 성글고 거친 부분이 있어 보이는 그 소설이 참으로 반갑게 느껴졌다. 거기에는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는 선생의 설레임과 두려움,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런 것들이 들어있었다. 그렇게 선생은 작가가 되었다. "친절한 복희씨"는 오래전 선생이 내디뎠던 작가로서의 발걸음을 다시한번 돌이켜보게 만든다. 여전히 선생의 필력은 빛나고 있지만, 예전의 날카롭고 생생한 문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작년에 나온 선생의 전집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 둔 때문도 있지만, 아껴가면서 조금씩 읽고 있다는 말도 맞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선생을 우연처럼 만날 일이 있을까? 아마 만나게 되더라도 십몇년 전처럼 말을 걸지는 못할 것 같다. 그 때는 어렸을 때라 창피함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었던 것이었겠지만, 이제는 그런 용기를 내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선생의 글과 함께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친절한 복희씨"는 그렇게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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