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방탄소년단) 멤버가 어떤 영상에서 먹고 있었던 빨간색 음식에 대한 서양 팬들의 관심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그 음식의 간편식 해외 수출이 꽤 많이 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그 빨간색 음식은 '떡볶이'였다. 아, 떡볶이... 마음으로는 먹고 싶으나, 현실적으로는 먹지 못한지가 여러해가 다 되어간다. 예전부터 매운 음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수록 고춧가루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속이 불편해졌고, 그렇게 나는 빨간색 음식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갔다.


  사실 매운 맛이 식탁을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 그 맛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인이라면 가장 좋아하는 김치도 내게는 기피음식일 뿐이다. 고추장이 양념의 기본으로 들어가는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즉석 조리식품에서도 매운 맛은 대세가 된 지 오래다. 라면도 고춧가루 때문에 먹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먹는 우동 라면이 있었다. 그것도 어쩌다 먹는데, 어느날 그것을 먹고 난 뒤에 약간의 매운 맛이 느껴졌다. 궁금해서 제품 포장지의 뒷면을 보니 스프 내용물에 '고춧가루'가 적혀 있었다. 더이상 그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맑은 국물의 탕류라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다. 분명히 맑은 색의 국물인데, 매콤하고 알싸한 맛이 난다.


  프라이드 치킨에서도 매운 맛은 빠지지 않는다. 그냥 프라이드 치킨을 사왔는데, 튀김옷에 매운 맛을 가미했는지 입안에서부터 얼얼한 느낌이 전해진다. 역시 먹고나서 속이 쓰려온다. 고로케를 좋아하는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김치 고로케를 먹었을 때이다. 동생이 사 온 고로케 가운데 하나를 무심히 먹었다가 그날 내내 그 매운 맛 때문에 고생을 했다.


  전에는 특수한 양념의 식재료로 취급되었던 청양 고추를 요새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기본으로 넣는다. 그런 매운 맛이 들어가지 않는 요리가 있다면, 아마도 어린이를 위한 음식 조리법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아이를 위한 요리에는 매운 맛 대신에 단 맛이 들어간다. 어른들 음식이라고 해서 단 맛이 빠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 음식은 갈수록 달달해지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잡채밥 간편식이 나왔길래 사서 먹어보았다. 달아도 너무 달았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단 맛이였다. 잡채가 아니라 물엿으로 범벅을 해놓은 당면 볶음 같았다. 그 잡채밥의 양념 간장에는 매운 고춧가루가 들어가 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더 맵고 칼칼한 맛을 찾으러 다니면서, 그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극강의 단 맛에도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머니도 나이가 드시면서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김장을 할 때, 어머니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덜 매운 고춧가루를 구할 수 있는가, 였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맵지 않은 순한 맛의 고춧가루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고춧가루는 구할래야 구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고춧가루가 아주 매운 맛의 고춧가루여서, 맵지 않은 고추를 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산책을 나갔는데 어떤 아줌마의 전화 통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고춧가루를 아는 사람을 통해서 샀는데, 하나도 맵지 않아서 화가 난다는 소리였다. 아, 그 고춧가루를 우리 어머니가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한반도에 언제 고추가 들어왔는지 대해서 임진왜란 이후 일본 유래설이 오랫동안 정설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2010년, 한국 식품연구원과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공동 연구에서 새롭게 공개된 고문헌을 살펴본 결과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이미 15세기 이전에 고추장을 이용한 음식이 있었고, 그러한 발효 음식은 고추 전래 시기가 훨씬 이전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어쨌든 고춧가루를 이용한 김치가 대중화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었다. 고춧가루를 이용한 음식은 이전까지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보양식이었다가 소금이 귀한 시기에 방부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서 일반 대중의 식탁에 김치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들은 이제는 한국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소울 푸드(Soul Food)' 의 위치까지 차지했다. 힘들고 지친 일상에서 뭔가 매운 것을 먹으면 정신이 번쩍 들고, 그 매운 맛 때문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사람도 많다. 나처럼 매운 맛을 기피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감정일 것이다. 언젠가 내가 가는 사이트의 게시판에 매운 음식에 대한 글이 올라왔는데,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충도 여러 댓글이 달려서 공감하면서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회식 자리도 있었다. 자신만 빼고 다들 좋아하는 시뻘건 국물을 회식 자리에서 보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라는 글을 읽고 웃음이 나왔다. 


  나이가 들수록 소화 기능은 떨어지게 마련이고, 그래서 매운 음식 보다는 담백한 것을 찾게 되는 듯하다. 식품 회사들이나 요리 연구가들이 매운 맛 위주의 음식 보다는 좀 더 다양한 한국적인 맛을 찾아서 새로운 조리법과 간편식을 개발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매운 맛의 나라에는 그 맛을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맛'의 정의가 어떻게 하면 더 매울 수 있는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온 장류와 발효식품을 사용해서 식탁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올해는 잦은 비 때문에 고추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고춧가루 값이 예년에 비해 많이 올랐다고 한다. 배추 농사도 좋은 작황을 기대할 수 없어서 벌써부터 김장 걱정을 하는 이들도 많다. 깍두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 농사라도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매운 맛을 감수하고서라도 겨울 깍두기의 시원하고 달작지근한 맛은 놓칠 수가 없다. 맵지 않은 고춧가루만 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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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방송(KTV)에서 월요일 새벽 1시에 방영되는 'KTV 시네마'는 주로 오래전 한국 흑백 영화들을 방영한다. 1950, 60년대 흑백영화들은 대부분 한국 영화의 진부하고 신파적인 주제와 내용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간혹 비전형적인 영화 문법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들도 발견하게 된다. 이 시간에 방영된 박성복 감독의 1961년작 '해바라기 가족'이 그러했다. 그 시대에도 작가의식을 가지고 치열하게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유현목 감독은 여러편의 주목할만한 영화들을 만들어 냈다. '구름은 흘러도'는 그가 1961년도에 만든 문제작 '오발탄' 이전에 만든 영화로 감독의 독창적인 연출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탄광촌에서 부모를 잃고 가난을 견디며 사는 4남매의 고단하고 힘겨운 일상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막내 말숙이의 일기를 통해 이어지는데, 말숙이의 내레이션이 이 영화 그 자체라고도 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큰오빠가 탄광촌에서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던 이 가족은 오빠가 탄광 파업에 참여하다 해고당하자 세상의 풍파 속으로 떠밀려 나간다. 큰오빠는 다른 도시의 탄광으로, 둘째는 식모로, 그리고 남겨진 남매는 기름집 아저씨 집에 얹혀서 눈칫밥을 먹으며 학업을 이어간다. 말숙이의 유일한 위로는 일기를 쓰는 것으로, 일기장에 자신의 모든 소망과 꿈을 적어가며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말숙이가 감당해야 하는 극심한 가난은 너무 처절해서 영화 내내 말숙은 거의 단벌 옷에 맨발로 나온다. 그 맨발을 보면 누가 저 아이에게 양말이라도 사서 신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둘째 오빠의 행색도 마찬가지여서 터지고 헤진 단벌 바지를 말숙이가 대충 꿰매주어 입고 다닌다. 이 영화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했는가를 말 그대로 여과없이 보여주는 리얼리즘 영화 같다.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말숙이에게 늘 일기를 읽고 격려해주는 여선생은 빵을 사주는 호의 뿐만 아니라 학비 문제도 해결해서 학업을 잇게 해준다. 이 일기야말로 말숙이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영화는 말숙이의 일기가 출판되어서 세상에 큰 반향과 호응을 일으키고, 그 결과 4남매가 다시 탄광촌에 모여서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는 그렇게 좋은 결말로 끝났지만, 이 영화의 내적인 유기성은 성글게 이어져 있고, 그렇게 비어있고 단절된 영화 자체의 내러티브는 보는 사람에게 뭔가 미진한 느낌을 주기 충분하다. 나는 영화를 보고나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재일교포 소녀 야마모토 스에코가 쓴 일기로, 1958년 일본 출판사 광문사에서 '니안짱'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폭발적 인기를 끌어서 NHK에서 라디오 방송극으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유명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가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서 세계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두 군데의 출판사에서 이 책이 출판되었는데,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출판해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정식 계약을 맺고 출판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인기를 끌었던 이 책은 영화화의 과정까지 밟게 된다.


  일본 탄광촌이 배경인 일기는 한국의 현실에 맞게 각색되면서 상당한 사실성을 상실했고, 그것이 영화 내내 무언가 잘 해명되지 않고 비어있는 느낌을 주는 데에 일조했다. 재일교포로 차별받고 정식 탄광 노동자가 될 수 없었던 스에코의 큰오빠와 4남매가 겪었던 현실은 탄광촌이라는 배경만 따온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로 치환되었다. '가난'은 세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있는 주제였기에 스에코의 이야기는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스에코와 4남매가 겪어야 했던 재일교포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과 모순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에서도 배제되어야 하는 요소였고, 당시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우리나라에서도 드러내봤자 좋을 것이 없는 배경이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제작된 두 영화 모두 원작자인 스에코가 그려낸 일기의 본질과는 다소 동떨어진 영화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구름은 흘러도'가 보여주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따뜻하고 연민에 찬 시선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유현목은 영화 내내 맨발로 나오는 말숙이가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가난이라는 혹독한 현실을 아름답고 처연한 일기의 문장들로 승화시킨다. 제각각 흩어진 가족들이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언젠가 다시 하나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숙이의 희망에 찬 내레이션은 그 시대의 모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보인다.


  '니안짱'은 산하 출판사에서 어린이용 도서로 출판되었으나 현재 절판된 상태다. 영화를 보고나서 꼭 구해서 보고 싶었던 나에게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기의 주인공 야마모토 스에코는 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문필가로 활동했다고만 알려져 있다. 출판된 일기로 받게된 엄청난 인세가 4남매의 삶의 행로에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스에코에게는 인생을 뒤바꿔 놓은 일기였던 셈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자세한 배경 이야기를 알고 싶은 사람은 2012년에 고려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서 발간한 김승구"아동 작문의 영화화와 한일 문화교섭"이라는 논문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저자 김승구는 현대시를 전공한 국문학자인데도 한국 영화사적인 측면에서도 참고할 수 있는 좋은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데도 그의 논문이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영화에서 말숙 역으로 나오는 아역 배우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서 극의 몰입감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찾아보니 배우의 이름은 김영옥인데, 아역시절이라고 해도 원로배우 김영옥의 얼굴과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다. 배우 김영옥의 필모그래피에는 분명히 올라와 있지만, 이 영화의 아역이 그녀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어서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김영옥 씨의 공식적인 영화 데뷔작은 '가거라 슬픔이여(1957)'인데, 그 영화 포스터의 아역 얼굴과 이 영화 주인공의 얼굴은 동일하게 보여서 김영옥 씨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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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낮에 무얼 하시면서 시간을 보내느냐고 어머니께 여쭈었다. 


  "전원 일기가 케이블 여기저기서 계속 나와서 그거 돌려가면서 본다. 아주 재미있어."


  주로 MBC의 자회사 케이블 방송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그 밖에도 국민방송(KTV)이나 다른 예전 드라마 전문 방송 채널에서도 전원일기가 나오고 있다. 저녁에 유선방송 채널을 계속 돌리다 보면 전원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는데, 방영순서가 제각각이라 때론 우습기도 하다. 어린 복길이와 영남이가 다른 채널에서는 어른으로 나오고, 김회장 집 부엌은 아궁이에서 현대식 부엌을 왔다 갔다 한다. 그 드라마를 계속 봐왔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여러 가족의 얽히고 설킨 일화와 비밀들을 잘 알지못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다. 


  재미있게 보신다는 어머니와는 달리, 나에게는 그 드라마 한 회를 온전히 시청하는 일이 쉽지 않게 느껴진다. 그 드라마의 초창기부터 종영때까지 대부분의 내용을 꿰고 있기는 하다. 그 당시에는 꽤나 재미나게 보았던 기억도 있다. 도시화가 한창 가속화되던 1980년대에 전원일기는 도시사람들의 정신적 휴식처같은 드라마이기도 했다. 집필 작가가 여러번 바뀌기도 했지만, 그 드라마가 강조하던 주된 가치는 비합리적인 공동체 의식, 가부장제, 남존여비, 혈연주의, 도시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젊은 세대의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 그런 구시대적인 모든 것의 집합체였다.


  김회장의 말 한마디는 양촌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고, 복길 할머니의 고약한 성미와 강짜 때문에 시집살이를 호되게 하는 복길 엄마의 괴로움은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학을 나온 영남 엄마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가부장제 안에다 억지로 욱여넣으며 살고 있고, 배움은 짧은데 성정까지 제멋대로인 수남 엄마는 늘 자잘한 사건들을 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가진 것도 없고, 불 같은 성미 때문에 가정에 충실하지도 못한 노마 아빠는 자신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를 노마 엄마의 탓으로 돌린다. 부인에게 손찌검을 하고도 당당하고, 그렇게 버르장머리를 가르쳐놓아야 한다고 버젓이 말하는 이른바 동네 청년들의 의식 수준은 참 보기 딱할 정도다. 그렇게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하는 행동들은 지금의 세대들이 보기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꼭 재미있다기 보다는, 저 시대에는 다 저러고 살았구나. 지금보면 참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그때 생각이 나서 그런 거지."


  그 드라마가 그렇게 재미있으시냐고 묻자 어머니는 그렇게 답하셨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전원일기는 어쩌면 오늘날의 기성세대가 살아온 그 시대의 여러 모습들과 가치관들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화사회학적인 영상자료인지도 모르겠다. 그 드라마가 급변하는 농촌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하고, 구시대적인 가치들을 더이상 칭송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드라마는 자연스럽게 폐지되었다. 나중에는 연기하는 배우들조차 개연성 없고 별다른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드라마 내용에 부끄러움까지 느꼈을 정도였다. 배우 김혜자가 전원일기를 끝내면서 '신동아'에 그런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권태롭고 챙피해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김회장 부인 역을 그만 두고서 김혜자 씨도 자유로움을 느꼈을 것 같다. 2009년에 개봉된 봉준호의 영화 '마더'를 보고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배우 김혜자를 새롭게 재발견했을 것이다. 내게는 특히 극중에서 김혜자가 담배 피우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34년동안 골초였다가 담배를 끊었던 그가 보여준 그 장면은 오랫동안 연기했던 김회장 부인 역이 그 배우에게 정말 맞지 않은 옷 같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어쩌면 더 좋은 작품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을 '전원일기'를 찍느라 다른 감독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복길이 할머니 역의 김수미는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도 예능에서 맹활약 중이다. 전원일기에서도 때론 슬랩스틱 같은 몸연기와 뛰어난 애드립을 선보이기도 한 복길이 할머니를 떠올려 보면 배우는 천상 배우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억척스러운 종기 엄마 역으로 나왔던 배우 이수나는 4년 전,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호전되었으나 근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쾌유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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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9-23 21:15   좋아요 0 | URL
어느 시대 어느 순간이든 모순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고 본다면, 총체적으로 어떤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좋을 수 있는지 개인적 판단과 기준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몇년 전의 일이다. 경량 구스 다운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나와서 구매를 했다. 올라온 상품평을 읽어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고, 이미 가격에 혹해서 어찌되었든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옷을 받아보니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나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좋은 옷을 샀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얼마 좀 지나지 않아 이 옷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가장 심각한 결함인 '털빠짐'이었다.


  사실 상품평 가운데 그 점을 지적한 글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글에는 그것이 약간의 털빠짐이라고만 되어있어서 나는 다운 점퍼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단점이려니 하고 넘겨버렸다. 만약 다음과 같이 써져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구매할 마음을 접었을 것이다.


  "이 옷 입고 외출했었는데요, 집에 와서 벗었더니 내가 토끼가 되어 있더라구요."


  그 상품평을 읽었을 때는 이미 옷을 사고 한참이 지난 뒤였다. 그 글을 읽으면서 혼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루종일 가봐야 웃을 일이 없다가도 그런 재기 넘치는 상품평이라도 읽으면 잠깐 동안은 즐거워진다.


  상품평들을 읽다보면 참고할만한 좋은 상품평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알파벳과 한글 자음과 모음을 제멋대로 무성의하게 적어놓은 끄적거림, 상품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엉망진창 식탁 풍경이나 집안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화분 사진 따위를 올리는 기묘한 악취미, 택배 회사와 기사에 대한 성토, 옷이나 신발 사이즈도 말하지 않고 그저 '잘 맞아요' 라고 써놓는 쓸모없는 글들이 넘쳐난다. 거기에다 호평 일색의 몇몇 상품평의 아이디를 다른 구매 사이트의 동일 상품 페이지에서 기막힌 우연(!)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물건은 사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오픈 마켓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는 상품평 외에도 고려해야할 점이 하나 더 있다. 판매자의 고객응대 자세이다. 언젠가 최저가 검색으로 나온 오픈 마켓 판매자에게 물건을 주문한 적이 있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도록 배송이 되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했다. 상품 페이지의 질문 게시판을 살펴보니 배송이 늦는다, 왜 안보내냐 하는 불만글이 여러개였고, 놀랍게도 판매자의 답글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 판매자가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장사꾼에게도 '단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구매 자주 합니다. 최저가인 대신에 배송은 좀 느려요. 그점을 감수한다면 괜찮을 거에요."


  일주일 동안 물건을 보내지 않는 장사꾼은 좀 느린 게 아니라, 장사의 기본이 안된 사람이다. 즉시 구매를 취소했고, 그 일 이후로는 상품평과 함께 질문 게시판 글에서 판매자의 고객 응대 자세도 보게 되었다.


  상품평을 열심히, 주의깊게 읽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품을 구매해서 받아보고 난 뒤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교환, 반품의 지난하고 귀찮은 과정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별로 비싸지 않은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가급적 많은 상품평을 검색해서 읽어보게 된다. 그렇게 이제까지 많은 상품평을 읽어왔는데, 내게는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상품평이 하나 있다.


  무슨 물건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떤 상품이 아주 좋은 가격에 올라왔고, 정말 살 것인가를 결정하려고 상품평을 읽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품평을 읽자마자 나는 사려는 마음을 접었다.


  "사지마, 사지마, 사지마!"


  나는 그렇게 강력하고, 간결하며, 인상적인 상품평을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 그 상품평을 쓴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즉시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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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암병동에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고나자, 이제 가족들도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호스피스 병동은 뭐랄까,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기이한 곳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옆에서 보면서도, 그저 그날 하루를 무사히 잘 보내면 죽음의 그림자를 피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죽음의 전령은 병자의 침대 밑에 분명히 서있는데도, 살아있는 가족들은 애써 외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곧 예정된 그 시간은 들이닥치게 마련이다. 


  추석 연휴 기간이 끝나가던 날이었다. 밤샘 간호를 하던 어머니와 동생을 집으로 보내고, 낮에는 내가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경미한 혼수상태였다. 의식은 명료하지 않았고, 뭔가를 계속 말씀하시는 듯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숨소리는 거칠고 고르지 않았다. 슈욱슉, 샤아샥, 마치 고장난 기관차의 엇갈리는 배기음처럼 불규칙적인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나고 있었다. Death rattle. 임종을 앞둔 이들이 흔히 보이는 징후였다. 비강과 폐에서 제대로 배출되지 못한 침과 가래가 울리면서 나는 소리이다.


  아버지는 뭔가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나의 마음도 두렵고 무거웠다. 나는 임종을 앞둔 이들을 위한 기도문을 반복해서 계속 읽어드렸다. 병실에는 다른 두명의 환자가 있었는데, 폐암 말기 환자도 Death rattle을 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는 소리가 낮게 깔리는 소리였다면, 그의 경우는 굉장히 크고 탁했다. 맑고 화창한 가을 날의 낮병동을 가득 채우는 그 소리는 긴장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직도 나는 그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더러는 그런 소리가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괴로운 기억 때문에 호흡을 완화시켜주는 약을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명절 연휴의 병동에는 그런 것까지 신경써주는 주치의는 없었다.


  담도암을 앓는 다른 한명의 환자는 가수면 상태에서 부인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의처증으로 부인을 힘들게 했다는 그 환자가 간절하게 부르던 부인은 명절 준비를 하러 집에 가고 없었다. 대신 심드렁한 표정의 아들이 자신의 가족과 함께 와있었다. 그 아들은 휴게실의 소파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저녁 무렵에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를 보살피러 다시 나왔다. 그때쯤 아버지의 숨소리는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폐암 환자는 임종실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병원을 떠나기 전에 그의 가족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제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평소에는 휴대폰을 밤에 꺼놓는데 그날은 끄지 않았다. 새벽에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평온하게 임종하셨다. 1년여에 걸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아버지의 마지막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병실의 담도암 환자는 그 다음날 병실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전, 자주 가는 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글이 있었다. 폐암 말기인 부친이 통 드시질 못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미 가까운 가족을 먼저 그렇게 보낸 이들에게 그것은 익숙한 징조였다. 이제는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댓글들이 달렸다. 죽음을 준비하는 육신은 뭔가를 먹어도 장에서 흡수되지 않기 때문에 음식물은 필요하지 않게 된다.


  혈육지친을 먼저 보내는 과정에서 보게 되는 그런 일련의 풍경들은 남은 사람들이 맞닥뜨리게 될 명시적인 진리, 즉 Memento mori, 언젠가 우리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되새기게 만든다. 17세기 유행했던 서양의 정물화 Vanitas에 등장하는 해골의 이미지가 말하는 바도 그런 뜻이었다. 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당시의 중산층은 집안에 그런 정물화를 걸어놓고 인생의 덧없음을 성찰했다.


  내게는 아버지의 임종 전날 들었던 Death rattle이 마치 그 Vanitas처럼 마음에 남아있다. 이제 곧 아버지의 세번째 기일이 다가온다. 시간이 흘러서, 가슴이 미어지는 그런 슬픔 보다는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 것 같다. 언젠가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 아버지여서 참 고마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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