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아버지의 세번째 기일이다. 아버지는 계절 가운데 가을을 가장 좋아하셨는데, 당신이 좋아하는 그 계절에 떠나셨다. 이맘때 떨어진 은행 열매를 밟게 되면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난다며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호스피스 병동에 계셨을 때, 나중에 아버지를 어디로 모실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종손으로서 아버지는 고향의 선산을 늘 생각하셨지만, 그곳은 집에서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먼 산골이었다. 연로하신 어머니 생각도 해야했다. 그렇게 멀리 아버지를 보내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동생들은 당시에 주말마다 근교의 공원묘지와 추모 공원을 둘러보러 다녔다. 그렇게 해서 집에서 1시간 거리의 추모 공원으로 결정되었다. 문중 어른들은 그 결정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다.


  유골함을 실외 매장지에 둘 것인지, 실내 봉안당으로 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했다. 그곳의 수목장은 아직 시범 사업 중이라 선택할 수 없었다. 실내 봉안당은 순서에 따라서 안장되는 것이라 이용자가 마음대로 그 자리를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좋은 자리들은 이미 다 자리가 찼고,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봉안실의 창가 자리, 시선에서 약간 높은 정중앙의 위치로 정해졌다.


  집에서 거리가 가까운 것을 어머니는 마음에 들어하셨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곤 했는데, 갈 때마다 그곳에서 만나는 인간의 면면들이 내게는 새로웠다. 한번은 화장실에 갔다가 세면대에 내팽겨진 북어를 보고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의 제례실에서는 이용자들이 가져온 음식으로 간단히 제를 지낼 수 있는데, 아마 제를 지내고 그렇게 버리고 간 모양이었다. 냄새 나는 북어를 도로 싸서 가져가기 싫다고 그런 식으로 버리다니 기가 찼다.


  어버이날이나 연휴 같은 때는 가족 단위의 이용객들이 몰려서 좀 혼잡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사람들의 행태도 눈에 띄었다. 애들이 봉안실에서 뛰어다니고 소리를 질러도 주의를 주거나 제지하는 법이 없었다. 예의범절이라는 건 도무지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낫다. 그럴 때는 한참을 밖에서 좀 걷다 오곤 했다.


  어느 날인가 봉안실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이 탄 사람도 마침 우리 가족과 같은 봉안실로 들어갔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들어서자마자 엉엉 소리를 내며 슬피 울음을 터뜨렸다. 봉안함이 있는 곳에 얼굴을 묻고서 우는 남자를 보니, 자리를 피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우리는 남자가 맘편히 울다가 나오게 밖에서 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동생은 잠시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했다. 한 5분이나 지났을까? 동생이 이제는 들어가도 될 것 같다고 전화가 왔다. 좀 있다 가야 하지 않냐고 했더니, 동생은 일단 추모관 입구로 오라고 했다. 입구 근처 벤치에서 후련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 남자를 발견했다. 그의 추모 방식은 그렇게 간결한 모양이었다.


  사실 봉안실에서는 고인을 추모하며 맘놓고 울거나 말을 편히 하기 어렵다. 평일의 한낮이라면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대개는 수시로 사람들이 드나든다. 언젠가 본 나이든 중년여성은 흰 국화 꽃다발을 들고 봉안함에 기대어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다가 인기척을 느끼면 뒤돌아보고 눈물을 그쳤다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우리 가족은 자리를 피해서 복도에서 여자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를 모신 봉안함 옆으로는 세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 옆자리는 한달쯤 지날 무렵에, 나머지 두 자리는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채워졌다. 그 두 자리의 주인들은 한 가족이었다. 봉안함에는 유골함과 함께 위패를 둘 수 있는데, 그 위패들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알게 되었다. 먼저 세상을 뜬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위패에는 남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딸이 한달 좀 지날 무렵에 세상과 작별하면서 자신의 어머니 옆자리로 왔다. 나이를 헤아려 보니 이십대 초반이었다. 두 달도 안되는 시간에 남자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하늘나라의 어머니 옆에서 맘껏 웃고 어리광도 부리면서 행복하게 지내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야. 그때까지 오빠도 힘을 낼게."


  여동생의 위패에 있는 글을 내 방식대로 바꾸어서 써보았다. 그 위패의 글을 쓴 이가 알지못하는 누군가에게 그 글이 그대로 읽히기를 원치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위패를 볼 때마다 깊이 새겨진 슬픔과 쓸쓸함을 가늠해 본다.  

 

  3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러번 그곳을 찾았어도 우리 가족은 그와 마주친 적이 없다.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늘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젊은 그에게는 아직 살아갈 많은 날이 남아있을 테고, 그는 먼저 세상을 뜬 어머니와 여동생의 부재를 견디어야 한다. 이제는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가을의 길목에 설 때면,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가 조금은 덜 슬프고, 덜 외로웠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오랫동안 어머니와 여동생을 따뜻하게 추억할 수 있기를, 언젠가 웃는 얼굴로 하늘나라에서 그들을 만날 때까지 힘을 내어 살아주길 기도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작년 초봄의 일이다. 어쩌다 보니 밤늦게까지 깨어 있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에 찻물을 끓이려고 가스레인지를 켜고 부엌 창문을 열었다. 밖에서 무언가 큰 기계 소음이 계속 들렸다. 마치 이삿짐 센터 사다리차가 내는 굉음 같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반이 좀 넘었다. 앞동의 아파트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파트 옆에는 바로 스포츠 센터가 있는데, 그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왜 새벽에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일까 싶었다. 그 기계 소음은 약 10분이 넘게 계속 이어지다가 마침내 그쳤다.


  그 며칠 후 새벽, 이번에는 새벽 2시쯤이었다. 그 소음이 다시 똑같이 들렸다. 아직 겨울 추위가 남아있던 때라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한번 나가서 확인해 보았다. 굉음의 정체는 바로 쓰레기 수거차였다. 청소 수거 업체의 차량이 스포츠 센터 주차장까지 들어와서 쓰레기를 수거해가고 있었다.


  나는 보름 정도 청소 수거 차량이 오는 요일과 시각들을 기록해 보았다. 주거지역에서 새벽 2시에 그런 소음이 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의 환경과에 문의해서 담당 공무원과 통화할 수 있었다. 담당 공무원은 일단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겠다고 하고서 나중에 전화를 주기로 했다. 일주일 후에 전화를 받았다.


  "그 청소차가 시에서 하청을 준 업체에서 나가는 차량인데, 자기들도 배정된 시간표에 따라서 하다보니 그렇대요. 구청 직속이면 어떻게 시간을 조정할 수 있을 텐데, 하청 업체도 워낙 일정이 빡빡하다 보니 나름 사정이 있나 보더라구요."


  수거 시간을 좀 앞시간으로 옮길 방법이 없냐고 물으니, 일단 이야기는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고서는 끝이었다. 그 이후로도 청소 차량의 작업 시간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쓰레기 수거 업무의 상당량이 외부 하청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쓰레기 수거 관련 외주 업체 선정 공고가 여러개였다. 이제는 종영된 EBS의 다큐 '시선'에서 도시의 청소 노동자 문제를 다룬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더 자세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청소라는 게,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좋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좋은 일을 이렇게 한밤중에,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해야하느냐는 거에요. 이렇게 밤에 일하면 잘 안보이기도 하고, 또 그래서 사고나 다칠 위험도 크단 말이에요."


  어느 외부 하청업체 청소 노동자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또한 해마다 나아지지 않는 업무 환경과 임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지자체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청소 업무의 외주화는 명목상으로 볼 때는 시의 예산을 보다 더 절감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외주를 주는 것이 인건비와 여러 부대비용의 측면에서 보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절감된 비용이 얼마나 시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정작 새벽 2시에 이루어지는 쓰레기 수거 차량의 소음 때문에 잠을 깨는 시민이 있어도, 그 시간 조정도 하지 못한다면 비용 절감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밤늦게까지 들리는 것은 새벽 청소 수거 소음 뿐이 아니었다. 그 스포츠 센터에 재작년에 새로 들어온 볼링장 소음도 문제였다. 방음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그 소음이 인근 아파트 몇개 동에 걸쳐서 들리고 있다. 주간 시간에만 그런다면 견딜만 한데, 그 볼링장은 무려 새벽 3시까지 영업한다. 그런데 그 소음을 현실적으로 시정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생활 소음 관련 법률을 찾아보니, 그 기준이 실제로 적용되려면 진짜 공사장 소음 정도나 되어야 어떻게 현실적 수단을 강구해볼 수 있다. 담당 공무원에게 민원을 넣어보았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현장 실사 나가서 업주에게 소음 안나게 보강 공사라도 해보라고 말을 좀 해보는 것이 전부다.


  그 스포츠 센터에 입주한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은 오랫동안 해온 24시간 영업을 작년에 포기했다. 경비 절감이 이유였을 것이다. 한밤중에 커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 커피 전문점의 결정을 아쉬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동네에는 24시간 편의점과 24시간 해장국집은 아직 여전히 영업 중이어서 대신 갈 곳이 남아있다.


  며칠 전에도 청소 수거차의 소음을 들었는데, 그 소리에 깨어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이전보다 더 늦어진 모양이다. 새벽의 볼링장 소음도 여전히 들린다. 도대체 새벽 3시까지 볼링장이 영업을 해야하는 무슨 절박한 이유라도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이제는 새벽에 청소차 수거 소리에 가끔 잠을 깨더라도 화가 치밀어 오르지는 않는다. 그 늦은 시간에 일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더 힘들겠거니 싶은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이래저래 도시라는 곳은 쉽게 잠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주 오래전 일이다. 홍콩 무협 영화들을 아주 열심히, 즐겁게 보았던 때가 있었다. 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Shaw Brothers에서 제작된 영화들이었다. Shaw Brothers, 우리말로 번역하면 邵氏형제 영화사. 영화를 재생하면 나오는 그 로고가 참으로 반갑고 좋았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무협 영화를 챙겨보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영화들을 보던 시기는 내 인생에서 모든 것이 막막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휴학 중이었다. 낮에는 시립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무작정 책을 읽었고, 저녁에는 영화들을 찾아서 보았다. 어느날, 홍콩 무협 영화 추천 글을 읽었다. 그렇게 한편 두편 찾아서 보게 된 것이 계속 이어졌다. 


  강대위, 적룡, 정패패... 다시 떠올려 보니 그리운 이름들이다. 특히 장철 감독의 영화들은 아주 호쾌하면서도 선악이 분명한 구도가 좋았다. 배우 강대위는 무협 영화 배우로서는 다소 작은 체구의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연기하는 정의로운 협객의 모습에는 올곧은 품성과 따뜻한 강인감 같은 것이 있어서 좋았다. 주로 배우 적룡과 같이 나오는 영화가 많았는데, 영화 속 그들은 악인들에게 핍박받고, 선량한 사람들을 지키려다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복수(1970)', '신외팔이(1971)', '자마(1973)' 같은 영화들.


  특히 '자마(刾)'는 걸작이었다. 늘 짝을 이루어 나오던 강대위와 적룡은 이 영화에서 원수지간으로 나온다. 그 두 배우를 하나의 팀으로 생각하던 이들에게는 이 영화 속에서는 누구를 편들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을 것이다. 배우 적룡이 비열한 악역의 모습을 잘 연기해내는 것이 신기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강대위 편을 끝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배우 정패패는 남자 배우들이 대부분이었던 무협 영화에서 유일하게 존재감을 내보였던 여협객이었다. 외유내강의 여협객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무술 동작은 남자 배우들의 선굵고 거친 동작과는 차이가 있었다. 절도 있으면서도 부드러웠고, 휘어지면서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나중에 정패패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그가 어린시절에 발레를 배웠었다는 것을 알았다. '대취협(1966)', '금연자(1968)'의 정패패는 후에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2000)'의 푸른 여우 역을 맡아서 열연하기도 했다. 언젠가 읽은 인터뷰에서, 남성 위주의 영화계에서 여배우로서 자신의 경력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토로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여협객이라면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 1969년에 나온 임원식 감독의 '맹수(盲獸)'에는 배우 사미자가 눈이 먼 여협객으로 열연한다. 그 영화에서 사미자는 협객 역을 그냥 흉내낸 것이 아니라, 진짜 처절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사미자 씨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캐스팅되고 나서 자신이 무술 동작을 익히기 위해 여러가지로 배우고 애를 썼노라고 회고했다.


  Shaw Brothers 제작의 무협 영화들을 볼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자막이 없다는 점이었다. 잘 알려진 유명 영화들은 영어 자막이 있었지만, 대개의 영화들은 자막이 없었다. 외국 영화를 자막없이 보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다. 그래도 무협 영화의 단순한 구성과 명확한 인물 설정은 무자막의 광둥어 대사를 충분히 인내할 수 있게 했고, 나중에는 나 스스로 대사를 만들어서(!) 읊조리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그 시절, 내가 무협 영화들을 그토록 좋아했던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가끔씩 생각해 보곤 한다. 악행을 저지른 악인은 처벌 받고,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착한 이들에게는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는 그 자명한 진리가 참으로 마음에 와닿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은 결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무협 영화의 결말들은 나에게 더 분명하게 각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무협 영화를 보던 시절이 지나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아주 가끔은 그 시절에 보았던 영화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무협 영화를 본 적은 없다. 얼마전,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적룡이 나오는 무협 영화를 발견했다. 좋지 못한 화질 속의 배우들이 푸른 초목을 헤치고 뛰어다니면서 싸우고 있었다. 예전에 즐겨 보았던 무협 영화의 기억을 떠올리며 보려고 했으나 더 볼 수 없었다. 문득, 무협 영화를 보며 감동하기에는 이제는 내가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용히 TV를 꺼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드라마 작가 임성한이 새로운 드라마로 다시 복귀한다는 뉴스를 얼마전에 읽었다. 5년 전, '압구정 백야'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을 때에도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 제작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동안 보여주었던 임성한 드라마의 위력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놓는 작품마다 각종 논란을 양산해내던 그에게 '막장 드라마 작가'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그 논란의 가장 정점에 있었던 사건을 꼽으라면, '오로라 공주(2013)'의 주인공 설설희의 대사가 떠오른다.


  "암세포들은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실제로 그 대사는 내게 꽤나 흥미롭게 들렸다. 뭐랄까, 임성한이라는 작가가 보여주는 독특한 세계관이라면 저렇게 쓸 수도 있겠구나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암투병을 하는 환자와 가족들 입장에서는 감정을 건드리는 대사였음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드라마 제작진에게 항의가 빗발쳤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일일드라마 역사상 최고 시청률(57.3%)을 기록했다는 "보고 또 보고(1998)"는 정말 매일매일이 기다려지는 드라마였다. 그 당시에 나도 재미나게 보았었는데, 겹사돈이라는 좀 흔하지 않은 소재를 다루기는 했어도 이른바 '막장'의 기운은 그때까지 감지되지 않았다. 나중에 한류스타로 뜨게 되는 배우 박용하가 비중이 작은 배역이었음에도 후반부에 눈길을 끌었던 기억이 난다. 후속작이었던 '온달왕자들(2000)'에서부터 뭔가 남다르게 비틀린 기이한 세계가 펼쳐졌던 것 같다. 그 드라마에서 제기된 논란을 가볍게 제압해버린 것은 '인어아가씨(2002)'였다. 항상 조연에 머물렀던 배우 장서희가 이 드라마의 '아리영'을 열연해서 진정한 국민배우로 부상했다.


  '하늘이시여(2006)'는 어떤 면에서는 '임성한 월드'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이 작품이 양산해낸 각종 논란과 화제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말도 안되는 황당한 설정과 등장인물들의 어이없는 죽음은 혹평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기이한 팬덤도 낳았다. 어쨌든 재미가 있기 때문에 임성한이 쓴 드라마라면 꼭 챙겨본다, 는 시청자들이 꽤 많이 늘어났다.


  케이블 방송에서 임성한 드라마는 여러 드라마 채널에서 자주 재방송되고 있다. 오래전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그 드라마들을 '정주행'하며 챙겨본다는 감상평들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요새 개연성 없고 재미도 없는 그런 드라마들 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보고 또 보고'의 짧은 감상평을 올린 그 시청자는 케이블 방송의 감질나는 매일 편성을 견디지 못하고 인터넷으로 남은 회차를 몰아서 다 보았다고 했다. 내 어머니는 '하늘이시여'를 아마도 3번 이상은 다시 보셨던 것 같다. 물론 나름의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도 그 드라마의 작품성을 높게 인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써본 물건이나 제품들, 음식들 좋은 점 언급하면서 시간 끄는 장면은 지금 보면 참 많이 우습기도 하고 그래." 


  이른바 제품의 간접광고(PPL, Product Placement)를 임성한 식으로 직접광고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장면들이 그의 드라마들 속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마치 방문 판매업체의 담당자 설명에 예능적 요소가 곁들여진 느낌 같다.


  드라마가 불러일으키는 논란과 화제성을 독점하는 임성한을 모델로 새로운 후계자가 부상했다. '아내의 유혹(2008)'의 김순옥은 그 대표적인 작가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당시에 저녁마다 학교 운동장으로 운동을 하러 나갔는데, 트랙을 돌면서 걷기 운동을 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드라마인가 해서 봤더니, 얼굴에 점 하나 찍고서 '난 이전의 당신 아내가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그 황당한 설정의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의 성공 이후로 김순옥은 '왔다! 장보리(2014)', '내딸, 금사월(2015)'로 승승장구했다.  


  그런 후배 작가들의 잘 나가는 현실을 그저 바라보고 있기가 괴로웠던 것일까? 곧 다시 임성한은 자신의 드라마로 시청자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드라마 작가로서 세간의 화제를 독점했던 화려했던 시절을 재현시킬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범작의 평가를 받을 것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드라마를 쓰지 않았던 지난 5년 동안에 임성한이 무엇을 보고 느꼈느냐일 것이다. 예전과는 다르게 대중의 취향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고, 그것을 예측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임성한이 대중의 관심사를 얼마나 현시대의 드라마로 그려낼 수 있는지가 작품의 성패를 가늠할 것이다.


  요새 국민방송(KTV)에서 재방영되는 김수현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1995)'를 틈틈이 보고 있다. '사랑과 진실(1984)'부터 김수현의 작품들은 빠지지 않고 거의 다 본 것 같다. 김수현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드라마계의 여제로 군림했다. 작가로서 나름대로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중의 심리를 읽어내려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적 흐름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작가 자신만의 가치관을 계몽적으로 전파하는 가족 드라마들을 만들어내면서 그는 화제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목욕탕집 남자들'은 3대가 모여살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상을 담아내는데, 김수현은 가부장제에 대한 확고한 지지, 나이든 세대의 가치관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미, 젊은 세대들의 부박함에 대한 질타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래, 그런거야(2016)'는 그런 김수현의 드라마와 이 시대가 결별하는 작품이었다. 저조한 시청률과 별다른 화제도 되지 못했던 그 드라마 이후로 김수현은 다음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작가가 젊은 세대의 의식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대개 유명 드라마 작가들은 보조 취재작가를 두는데, 젊은 취재작가가 젊은 세대의 이야기 소재를 취재해도 결국 최종적으로 쓰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그것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이 노작가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제는 방송사에서도 김수현의 복귀작 편성에 난색을 표시하기 때문에 번번히 무산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임성한이 다시 복귀작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그의 작품에 대한 대중과 관련업계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드라마의 성패가 드라마 작가로서 임성한의 남은 경력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때 그의 드라마를 흥미있게 보았던 한명의 시청자로서 임성한의 복귀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음악 선생님이 여름방학 음악 숙제를 내주셨다. 라디오 방송의 클래식 음악 방송을 하나 정해서 듣고, 그 음악들의 곡명과 작곡가를 적어오는 숙제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숙제를 아주 지겹게 느꼈던 것 같다. 나중에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해온 음악 숙제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많은 아이들이 오전에 TV에서 막간을 이용해 잠깐 방송되는 5분 정도의 클래식 영상물을 시청해서 적어왔다. 그러니까 나처럼 매일 1시간씩 듣고 선곡표를 적어왔던 것이 아니라, 매일 한곡씩을 듣고 적어온 것이다. 그것도 서로 베껴서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숙제가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클래식 음악이 좋아졌다. 그래서 매일 듣는 1시간 방송 외에도 다른 방송을 더 듣는 때도 있었다. 물론 생소한 작곡가와 곡명을 적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클릭만 하면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선곡표가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1980년대에 방송에서 들었던 음악을 확인하는 방법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서 해당방송 담당자와 통화를 하는 것 뿐이었다.


  나는 방송되는 곡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정확하게 받아적으려고 애를 썼다. 제일 싫은 것은 진행자가 노래를 틀기 전에 곡명을 한번만 알려주고, 끝날 때 말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제대로 듣지 못해서 확인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버리면 짜증이 치밀기까지 했다. 아무튼 집에 있는 인명 백과 사전까지 열심히 뒤적여가며 음악 숙제를 해갔다. 지금도 생각나는 작곡가는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인데, 그의 오페라 '라 조콘다' 가운데 '시간의 춤'이 자주 나왔었다. 이 작곡가 이름을 펑키엘리로 적을 것인지, 폰키엘리로 적을 것인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백과 사전에 있으면 그대로 적었지만, 없으면 대충 적었다. 그럴 때마다 진행자들의 발음을 탓하곤 했다.


  어쨌든 그 방학 숙제 이후에 나는 클래식 음악만 듣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가요와 팝송을 듣는 동안, 내 취향은 클래식 음악으로 고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취향의 발견'이었다. 아네스 자우이 감독의 영화 '타인의 취향(2000)'에는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미술 작품에 억지로 관심을 두게 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나중에는 정말로 미술 애호가가 되어버려서,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품들을 사들이기까지 한다.


  지금은 음악 방송을 들을 때, 잘 알지 못하는 좋은 노래를 우연히 듣다가 진행자가 말해주는 노래 제목을 놓치게 되어도 괜찮다. 선곡표가 있는 세상. 그리고 가사 몇 마디, 노래 몇 소절만 알고 있으면,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이 노래를 찾아주는 시대이다. 내가 원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 편지와 엽서를 써서 라디오 방송에 보내고, 그것을 녹음하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카세트 테이프의 REC 버튼을 누르려고 기다리던 아날로그의 시대는 지나가버린지 오래다.   


  선곡표가 없던 시대를 떠올리며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인터넷 댓글 사연이 있다. 노래에 얽힌 글타래에서 읽게 된 댓글이었다. 그 댓글을 쓴 이는 어느날 라디오에서 귀에 확 꽂히는 새롭고 놀라운 음악을 듣게 된다. 그런데 노래 제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마다 그 노래의 소절을 들려주고 그 노래를 아는지 물어보았다.


  그의 노력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따따 따라, 따따따, 이런식으로 이어지는 그 노래의 음조를 자신이 다니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서 노래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9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그는 우연히 듣게 된 음악 방송에서 그 노래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노래의 제목을 알 수 있었다. 그 노래의 제목은 '보사 바로크(Bossa Baroque)',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이 1984년에 발표한 곡이었다. 노래 제목을 알아내기 위한 그의 지난한 대장정이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댓글에서 자신을 매혹시킨 노래를 향한 한 사람의 집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그 노래 제목을 알게 되었을 때 진심으로 기뻤을 것이다. 선곡표가 없었던 시대에 그가 겪어야했던 우여곡절이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웃음을 안겨주는 일화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지식 하나를 얻기 위해 참으로 쉽지 않은, 번거로운 과정이 일상이었던 그 시대에는 그렇게 얻게 된 지식과 정보가 소중했고, 또 그것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되었다. 이제는 손쉽게 얻고 알게 된 수많은 정보는 그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뿐이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내보는 개념이 되었다.


  아주 가끔은, 아날로그 시대의 불편함이 주었던 그 진정성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어제, 음악 방송에서 나오는 '보사 바로크'를 들었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곡의 제목을 찾아 자신만의 긴 여정을 힘겹게 마친 어떤 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지금 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선곡표를 좋아할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