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요지 감독의 2002년도 작품인 "황혼의 사무라이(원제: 황혼의 세이베이)"는 일반적인 사무라이 영화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 있다. 이 영화에서 결투신은 겨우 두번에 지나지 않고, 주인공은 하급 사무라이로 농사짓는 것을 삶의 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아내의 장례식을 치루느라 사무라이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검마저 팔아버렸다.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로 독자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온 야마다 요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시대극의 연출에 있어서도 빼어난 재능이 있음을 보여준다.  

  폐병으로 아내를 잃은 번의 하급 관료인 세이베이에게는 치매에 걸린 노모와 어린 두딸이 있다. 적은 급료로  살림을 꾸려가자니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일이 끝나면 곧장 퇴근해서 벌레잡이 통을 만드는 부업을 해가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데 그런 그를 동료들은 "칼퇴근 세이베이"라며 비웃기 일쑤다. 이런 그에게 어느날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다. 친구의 여동생이며 어릴적부터 소꿉친구인 토모에의 이혼한 전남편이 행패를 부리는 것을 막다가 결투를 신청받게 된 것이다.  

  목검으로 상대를 가볍게 제압했다는 소문이 성안에 파다하게 퍼진 것과는 상관없이 세이베이는 자신의 평온한 일상에 충실할 뿐이지만 영주의 죽음과 관련하여 측근들의 세력다툼이 벌어지자 그 또한 분란의 한가운데에 있게된다. 자결을 거부하고 집에 칩거한 경호대장을 죽이라는 명이 세이베이에게 주어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을 생각하고 그는 결투에 나가기 전 토모에에게 살아돌아온다면 부인이 되어달라고 청한다. 과연 그는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여기까지의 이야기만 보자면 이 영화는 참 밋밋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결투하기 위해 간 세이베이는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는 경호대장을 발견하는데 그는 결투에 바로 임하려는 세이베이에게 대답대신 술을 건네며 자신의 인생살이에 대해 들려준다. 그 대화에는 몰락해가는 막부 시대의 마지막 사무라이들의 고단한 일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단지 가족과 소박하게 살고 싶었을 따름인 그 두 사무라이들의 인생을 어긋나게 만든 것은 지배계급이 부여한 허울뿐인 명예와 종속적인 의무였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무너지고 흔들리기 시작한 지점에 있는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투는 치뤄지고 세이베이는 살아서 집에 돌아온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과거를 회상하는 세이베이의 큰딸의 내레이션이라는 점이다. 큰딸의 내레이션에는 그리움과 자랑스러움이 묻어져나온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모습은 자신들의 지나온 과거에서 끊임없이 무엇이 일본적인 것인가를 묻고 지켜내려는 일본인들의 성향과도 맞닿아있는듯도 하다. 물론 그것이 맹목적인 추종으로 치달을 경우 과거사에 대한 일방적인 미화로 나타나기도 한다.

  "황혼의 사무라이"는 아주 영리한 방법으로 일본적인 것에 대해 찬미한다. 큰딸이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이 일본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맹위를 떨치던 때라는 점도 기이한 울림을 낳는다. 막부 말기, 몰락해가는 사무라이 계급의 한 단면을 그려내면서 자신의 의무와 가족에게 충실하려 했던 한 남자의 모습을 각인시키고 거기에서 이상적인 일본의 가치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한 시도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절제된 연출과 잘 짜여진 이야기 구성은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속편격인 "숨은 검, 귀신의 손톱"이 궁금해진다. 야마다 요지는 그 작품에서도 녹슬지 않은 자신의 솜씨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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