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츠츠미 신이치를 알게 된 것은 나가사와 마사히코의 2003년도 영화 <졸업>에서였다. 이십년 동안 사랑하는 여인을 잊지 못하는 심리학 강사 역할을 맡은 그는 대사 보다는 밀도있는 내면 연기로 사랑의 상처를 입은 중년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영화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가 정말로 배우라는 사실이었다. 별다른 말이나 행동의 변화 없이도 있는 그 자체로 꽉 찬 무언가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배우만이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고 츠츠미 신이치는 그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츠츠미 신이치가 나온 드라마와 영화를 찾아서 보기 시작했는데, 그것들을 보면서 발견한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무정형의 배우라는 점이었다. 내게는 그를 어떠어떠한 배우라고 규정하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생각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그 자체에 물처럼 스며드는 그의 변모는 말 그대로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처럼 다양한 연기의 폭을 보여주는 그의 역량은 무엇보다 오랜 무명시절 연극 무대에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영화 출연작은 많지 않다. 그의 연기 경력에 비한다면 출연한 편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SABU감독의 데뷔작부터 계속 같이 작업하면서 SABU의 페르소나로 불리우며 감독이 보여주는 독특한 영화세계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데뷔작 <탄환 러너>에서의 야쿠자, <언럭키 몽키>에서의 은행 강도, <포스트맨 블루스>의 우체부, <39 형법 39조>에서의 살인자 역등 그가 맡은 역할들은 대체로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생에 대한 열망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인물들이었다. 이처럼 복잡하고 분열적인 캐릭터들을 훌륭히 소화하며 독자적인 연기 세계를 구축하던 그는 2000년에 방영된 TV 드라마 <야마토나데시코>에 출연하면서 단번에 인기스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우리나라에서는 요조숙녀라는 드라마로 리메이크 되었다). 돈만 밝히는 속물적인 스튜어디스와 사랑에 빠지는 천재 수학자 오스케 역할을 맡은 츠츠미 신이치는 순수하고 섬세하며 질박한 내면을 지닌 서른 다섯살 청년(!)의 모습으로 나와서 보는이를 매료시킨다.

  2002년 후카츠 에리와 공연한 후지 TV 드라마 <사랑의 힘>에서도 츠츠미 신이치의 뛰어난 연기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유능한 광고 기획자이지만 사랑에는 문외한인 누쿠이 코타로 역을 맡은 그는 주연 여배우인 후카츠 에리와 환상적인 연기 호흡을 보여주며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되는 이의 내면의 여정을 충실히 재현해낸다. 뒤이어 2003년에 제작된 드라마 <굿럭>에서는 인기절정의 아이돌 스타 기무라 타쿠야와 공연하면서도 주인공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대중의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나이가 서른 다섯이었으니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불혹의 나이에 들어서도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그의 모습은 항상 현재 진행형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최근에 미이케 다카시의 <착신아리>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내년도에는 <플라이 대디 플라이>와 <로렐라이>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이 배우의 끝이 어디인가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을 지닌 배우, 츠츠미 신이치. 천의 얼굴을 지닌 배우라는 말이 그에게는 결코 넘치지 않는 찬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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