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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안 풍경 30년 - 1968-2001
김기찬 지음 / 눈빛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살다보면 내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때가 많다. 일이든, 사람이든 얽히다 보면 이런저런 생채기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 것이 삶이려니, 다들 그렇게 살아가려니 하고 넘기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 아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 사진집의 표지는 형제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해맑은 웃음으로 골목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진이 차지하고 있다. 울적한 기분에 무심코 꺼내어 들었는데 그 사진을 보고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듯 하다. 사진 속의 아이들은 아직 인생을 모른다. 그것이 얼만큼의 무게로 자신들에게 다가올지, 어떤 어려움을 줄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토록 티없는 웃음으로 주변의 세계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보다보면 참으로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단순할 수 있는지, 거기에 깃든 소박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탄복하게 된다. 비록 비좁은 골목을 너른 마당 삼아 둥지를 튼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분명 삶의 기쁨이 빛난다. 아이들을 하나씩 등에 업은 아이 엄마들의 몸짓과 표정에는 자식에 대한 자부심이 번져나오고, 장 보고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이웃을 향한 표정에는 정겨움이 흐른다. 개발 때문에 철거 중인 집터를 놀이터 삼아 노는 어린 소녀들은 그 흔한 장난감 대신에 집에서 다 쓰고 난 양념통과 식용유병, 통조림 캔과 약병으로 소꿉 놀이를 하면서도 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다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아, 이런 사진들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골목안 풍경에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쓸쓸함과 고단한 삶의 흔적들도 드러난다. 이제 겨우 열살이나 되었을 법한 소년은 자신의 집까지 배달이 되지 않는 연탄을 지게로 직접 나른다. 아들 며느리 내외가 돈 벌러 나간 사이 혼자 집을 지키는 노인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것은 강아지 뿐이다. 그런가 하면 이 골목의 주인공들은 사람만이 아니다. 텅 비어있는 골목의 한구석에 있는 큰 꾸러미의 쓰레기 봉투와 내다 놓은 화분들은 그 자체로 풍경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골목안에서 만난 아이와 그 가족을 몇년의 세월을 두고 마치 연작처럼 그 변화를 찍어서 담아낸 사진들이다. 어린 아이들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고, 마침내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이 가득한 부모와 함께 하는 모습이 있는 사진들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준다. 일부러 구도 자체를 그렇게 잡은 이유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안거나 업고 있었던 아이들이 커서는 부모의 양 옆에 마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듯 손을 잡고 서있는 모습은 구태여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삶은 오직 기쁨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슬프고 괴로운 날도 있는 법이다. 그럴 때에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힘내. 더 좋은 날이 있을 거야."하고 위로해준다면... 이 책은 말 대신에 자신에게 담긴 사진들로 위로를 건넨다. 사진집이라 가격이 꽤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보고나면 행복해지는 책이라서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사진들에 나온 사람들에게 누군가 만약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말 대신에 그 소박한 웃음으로 답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