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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시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어느날 밖에서 놀다 집에 와서 TV를 켰는데 늘 사진으로 보았던 대통령의 얼굴만 나오고 다른 방송들은 나오지 않았다. 사진은 얼마동안 있다가 끊기고 다시 회색의 빈 화면으로 이어지고 했다. 어머니께서 이유를 설명해주고 얼마가 지났을까? 난 슬프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대통령 아저씨가 죽었으니 이 나라가 어떻게 되는건지, 이대로 내 인생이,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닌지 싶어서 눈물까지 흘렸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태어나서 알고 있는 대통령이라고는 그 단 한사람 뿐이었기 때문이다.
쿳시의 "철의 시대"를 읽는 내내 왜 그 때의 일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 날 이후의 크고 작은 일들이 참으로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 집 근처까지 들렸던 시위대의 6월의 함성 소리, 고등학교 때 강석경의 "숲속의 방"을 누가 알까 금서처럼 숨어서 읽었던 기억, 민주화 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학생들의 분향소가 학생회관에 수시로 세워졌던 대학시절 기억까지 마치 홍수로 불어난 강물 위로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것들이 마구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인형? 인형의 삶? 그것이 내가 살았던 삶인가? 그런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이 인형에게 주어진 것일까? 혹은, 그 생각은 다른 암시처럼, 번개의 번쩍임처럼, 천사가 갖고 있는 지혜의 창으로 안개를 푹 찌르는 것처럼, 왔다가 가는 것일까? 인형이 인형을 알아볼 수 있을까? 인형은 죽음을 알 수 있을까? 아니다. 인형은 자라고 말을 배우고 걷는 것을 배운다. 그들은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들은 나이를 먹는다. 그들은 시든다. 그들은 못쓰게 된다. 그들은 불 속에 집어넣어지거나 땅 속에 묻힌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는다.(중략)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모든 관념들처럼, 불멸하고 죽지 않는, 삶의 관념을 사는 것이기에." (철의 시대 144쪽)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다 퇴직한 엘리자베스 커런은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유일한 혈육인 미국에 사는 딸에게 남길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커런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그것이 인형의 삶이 아니었던가 자문한다. 폭압적인 정권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백인이기는 했지만 기득권 지배계층의 이해와 가치를 충실히 보전하도록 어느정도는 협력했다고 여겨지는 강단에서의 삶은 오직 관념으로만 그 삶이 가능한 인형과도 같이 무기력하고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랬었구나. 내가 가보지 못한 그 먼나라에서 사는 당신 또한 그런 시대를 살아내었던 것이구나. 이 나라에서 나 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인형의 삶을 살도록 강요당하던 것처럼 당신과 당신 나라의 사람들도 그러했던 것이구나...
그 시대에는 생각하기 보다는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했고,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침묵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다. 어딜가나 인형들이 걸리적거리도록 넘쳐났다. 많은 인형들 속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고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반문할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냐고? 그러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인형들이 살았던 시대가 있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