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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조용히 좀 해요
레이먼드 카버 지음, 손성경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3월
평점 :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요새도 아이들 사이에서 특정한 큰 흐름의 유행이란 것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그런 것이 더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4학년 때의 유행은 가지각색의 퀴즈 카드 놀이였다. 세계 각국의 수도를 알아맞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나라의 위인들에 관한 퀴즈까지 다양했다. 그런가하면 스카이 콩콩이라던가 스카이 씽씽, 인생게임과 부루마블에 이르기까지 마치 하나의 유행이 뜨면 모든 아이들이 그 유행의 품목을 필수적으로 지녀야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졌다. 심지어 먹을 것에서도 그러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입안에 들어가면 말할 수 없는 신맛을 비롯해 입안에서 불이 나는 것과 같은 이상한 맛을 내는 작은 구슬사탕을 너도 나도 사먹었다는 것이다. 사실 한통을 사면 제대로 다 먹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는데도 아이들은 모두 그 기가 막힌 신맛을 매일매일의 영양제처럼 챙기곤 했었던 것 같다.
카버의 단편들을 읽고난 느낌은 바로 그 구슬사탕을 입에 가득 넣고난 뒤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입안에서의 그 시고 탁탁 튀는 듯한 느낌... 삼켜지지도 않아서 그냥 입안에서 우물거리며 녹히지만 더는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그 구슬사탕이 생각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카버에게는 마치 아주 잘 드는 면도칼이 있어서 그것으로 우리네 일상의 구석구석을 잘게 잘라내고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이유로 그의 단편에는 낭만이나 즐거움 보다는 냉소와 회의, 침체된 우울이 더 많이 내재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인생이란 참으로 보잘것 없고 사소할 뿐만 아니라, 때론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도가니이다.
어느날 알지도 못하는 여자로부터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는 남자, 자신의 불운이 개에게서 연유한다고 믿고 아이들이 아끼는 강아지를 몰래 내다버리려는 아버지, 자신의 아내가 남들이야 뭐라하든 가장 매력적이라고 믿는 남편, 어린시절부터 이해못할 행동을 하던 아들이 집을 나간후 세월이 흘러 유명한 정치가가 되자 두려움을 느끼고 잠적한 어머니, 카펫의 먼지만을 수집하는 이상한 남자... 이렇듯 카버의 소설에 나오는 다양한 사람들의 면면은 삶이란 것이 얼마나 팍팍할 수 있는지, 우연이나 행운이란 것이 들어오기엔 얼마나 비좁은 틈을 지닌 것인지를 한눈에 보여주는듯 하다.
그 메마르고 치밀한 문체와 끝없이 침잠하는 의미들로 보자면 카버의 소설들은 얼마전 읽은 오헨리의 것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 둘을 두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일은 아니지 싶다. 삶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물체가 있다고 할 때 우리 각자는 자신이 서입는 입장에서 그것을 보게 마련이고, 그런 이유로 각사람마다 보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다른 이들이 본 모습을 조합해야만 그 전체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카버 또한 자신이 본 삶의 문제, 그 진실을 이야기 한 것 뿐이다.
카버의 이야기는 "정말 그럴까?"하는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어린 시절 먹었던 구슬캔디의 맛처럼 카버의 글에는 그 시디 신맛이 베어져나온다. 그러나 한번 먹고나면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그런 신맛이 아니라 어떤 때는 그 신맛이 못견디게 생각나는 그러한 맛처럼 입안에 남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