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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V양 사건 ㅣ 버지니아 울프 전집 10
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달빛이 환히 비치는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이미 밤이 늦어서 거리에는 인적이 거의 없다. 그렇게 나 홀로 걷는 것이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새 내 앞에는 앞서가는 이의 긴 그림자가 흔들리며 가고 있다. 순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내 빰을 스친다. 그림자에는 잔잔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의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밤거리에 출렁인다. 나는 그 그림자의 주인을 보고자 걸음을 서두른다. 그러나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자 그림자는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아, 그 매혹적인 뒷모습이란...
울프의 글을 읽을 때면 그러한 매혹적인 뒷모습을 보고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글을 결코 완전한 이해라던가, 전부를 보여주는 법이 없다. 오히려 작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그림자 속에 숨어버린듯한 느낌이 든다. 결국 독자의 몫은 그림자를 통해 울프의 생각과 느낌을 상상 속에서 헤아려보는 것이다.
울프 전집 기획으로 나온 단편집 가운데 첫번째 권인 "불가사의한 V양 사건"은 작가의 신비스럽고 매혹적인 뒷모습을 엿볼 수 있게 만든다. 물론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쉽고 빠르고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같은 작품을 되풀이해서 읽을 때에 조금씩 그 의미의 질감들이 살아나는 것 같다. 마치 파도를 타듯 각각의 단편들은 고유의 높낮이와 움직임으로 독자를 울프의 내면 세계로 이끈다.
울프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과 결혼에 대한 성찰들을 섬세하게 마치 레이스를 짜듯 풀어낸다. "라뺑과 라삐노바", "필리스와 로자먼드", "밖에서 본 여자대학", "어떤 모임"은 마치 울프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어떤 제약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자유롭고 온전한 삶을 살고 싶은 여성이자 한 인간의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울프가 보여주는 삶이 여성에 제한되지는 않는다. 그는 인생의 불가해한 일면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온 부를 앵무새가 가져다 주었다고 죽을 때까지 믿었던 과부를 그린 "과부와 앵무새", 떠돌이 개에게서 인간과도 같은 감정의 순간을 잡아내는 "잡종견 집시", 단한번의 기이한 경험으로 삶의 행로를 바꾸게 되는 정치가의 모습이 담긴 "단단한 물체들"과 같은 글들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런가하면 울프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는 데에도 뛰어났던 것 같다. "세개의 그림"에는 어부에게 닥친 비극이, "본드가의 델러웨이 부인"과 "사냥꾼 일행"에서는 상류 계층의 삶의 단면이, "어느 영국 해군 장교의 생활 현장"에는 해군장교라는 특수한 직책에 있는 이의 일상이 마치 사진처럼 정교하게 재현된다. "본드가의 델러웨이 부인"과 "새옷"의 경우는 후에 나온 그의 장편 "델러웨이 부인"의 밑그림과도 같은 것이어서 매우 흥미롭다.
어쩌면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실린 "청색과 녹색"의 경우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특정한 색에 대한 울프의 주관적인 느낌을 묘사한 것이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가 평생동안 앓았던 정신질환의 반영처럼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예전에 울프에 대한 보고서를 쓰기위해 그의 전기와 많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많이 생각했었던 기억이 난다.
울프는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죽음이 가져다준 정신적인 충격으로 평생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으로 추정되는 심리적인 고통을 겪었다. 그러한 고통을 감내할 수 없어서 결국 주머니에 돌맹이를 가득 넣고 강에 투신자살한 그의 비극적인 삶의 단면들은 필연적으로 작품 곳곳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오늘 도서관에 갔다가 신간 서가에서 울프의 나머지 단편들이 실린 "유산"을 발견하고서는 얼른 빼어들었다. 아마도 나는 울프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보여준 그 매혹적인 뒷모습에 빠져있는 것 같다. 울프는 내게 있어 그런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