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 단편선
0. 헨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이레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가끔 어떤 일이나 사람, 또는 언젠가 읽었던 책의 글귀를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때가 있다. 얼마전 친구와의 만남에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가 그러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희생한 무명의 화가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마음을 울리던지, 또 그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어떠한가. 가난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만드는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에 얽힌 젊은 부부의 이야기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오 헨리의 단편들은 세월이 흘러도 그렇게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힘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그의 단편이 가진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이 매력적인 글들이 영문학자이며 좋은 번역을 내놓는 김욱동 씨에 의해서 "오 헨리 단편선"으로 묶여나온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을 통해 오 헨리의 단편이 가진 다채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동적이고, 유머를 지니고 있으며, 때론 강한 페이소스를 보여준다고만 알고 있는 오 헨리의 단편들이 보여주는 의미와 정서의 스펙트럼은 나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은 듯 하다.  예를 들어 "어느 도시 보고서"는 백인 여주인과 흑인 마부의 주종 관계가 썩 매끄럽게 읽히지는 않지만 여주인이 겪는 비극과 결부되어 발생하는 살인 사건을 마치 스릴러처럼 배치하고, 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를 제3자로 한 것도 매우 흥미있는 구성처럼 보인다. 그런가하면 "매디슨 광장의 아라비안 나이트"나 "매혹의 옆모습" 같은 경우는 외모에 신비주의적 요소를 절묘하게 결합시킴으로써 인생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오 헨리의 단편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약자에 대한 연민에 찬 시선이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하그레이브스의 멋진 연기"에서 보듯 퇴역후 별볼일 없이 살아가는 소령처럼 주류에서 밀려난 소외의 감정을 지닌 인물도 있다.  "사랑의 희생"에 나오는 예술가 부부는 비록 가난으로 인해 곤란을 겪지만 사랑으로 그 난관을 극복하는 슬기를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오 헨리가 예술가 또한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서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추수 감사절의 두신사"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스스로가 기아에 허덕이면서도 종교적인 신념과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자선을 베푸는 가난한 신사는 계급적 허위의식의 피해자라고 보게끔 만든다.

  물론 오 헨리를 사회주의자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그보다는 진정한 인도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듯하다. 인간이 가진 욕망에 대해서 충분히 긍정하면서 그것이 가져오는 행복과 불행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치 화가처럼 그려내는 그의 손은 날렵하고도 정확해보인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즐거운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식탁에 찾아온 봄"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는 두남녀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결말은 오 헨리가 보여주는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문득 푸슈킨의 시가 떠오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오 헨리가 이 봄에 차려놓은 식탁에서 희망이 가득함을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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