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간 속에서


1.

  "오늘 이를 다섯 개나 뺐어. 지금 얼굴 모양새가 말이 아냐. 내가 밖에 다닐 수가 없다고."

  전화기 너머, 할머니의 목소리는 슬프고 기운이 없게 들렸다. 이제 구십이 다 된 친척 할머니의 치아는 수명이 다한 모양이다. 늙음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틀니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나이에도, 할머니는 자신의 치아를 보내버린 것이 서러울 따름이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그 나이가 된다면 남아 있을 치아는 몇 개가 될까를 가만히 가늠해 본다.

  "어머니는 암 투병을 열심히 하시다가, 지난달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뜬 이는 솜씨가 좋은 요리 블로거였다. 나는 가끔 들러서 그의 레시피를 메모하곤 했다. 블로그의 주인이 암이 발병한 것을 알아챈 것은 작년 여름, 병기(病期)가 말기에 가까워서 항암 치료가 힘들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랬는데 결국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궂긴 소식을 듣고 말았다. 내 나이와 비슷한 또래라서 뭔가 더 마음이 쓰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요절(夭折)이라는 말을 쓸 수 없는 나이. 이르게 가긴 했지만, 절절히 안타깝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나이. 뭔가 어정쩡한 나이. 나는 다른 이의 죽음에서 내가 서있는 삶의 자리를 바라본다.


2.

  작년 이맘때에 무얼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니, 김수영 문학상에 응모할 시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공모전이라는 게, 한 명만 뽑히고 나머지는 버려지는 것이니까 어떤 면에서 내가 쓴 시들은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를 쓴다고 매달린 시간이 2년이었다. 김수영 문학상의 작년 응모자 수는 역대 최대인 359명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나라에서 시집으로 시를 묶어 응모한 그 359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게 하나의 시집을 완결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제 시는 그만 써야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동시를 쓰고 있다. 올해 단편 소설을 낼 수 있는 공모전은 끝났고, 어떻게 찾다 보니 남은 것이 아동문학 공모전이었다. 아이들은 미래에 내 글의 독자가 될 수도 있다. 뭔가를 쓰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그래서 조금씩 써 내려가는 작업이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써내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다시 아이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동시를 쓰는 건,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말을 건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동시든 동화든, 아동문학을 하는 이들은 그런 느낌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작업 자체가 일종의 해방감, 치유의 느낌을 주었다.

  결국 문학 치료라는 심리학적 치료 방법도 문학의 그런 기능에 기대어 나온 것이다. 문맹인 할머니들이 글을 배워서 자기 삶을 시나 산문으로 풀어서 써내는 것. 트라우마를 가진 개인이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다 그러한 범주에 속해 있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 새삼 생각을 해보니, 마음이 고요해지기 위해서 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머릿속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헝클어져 있을 때, 일기를 쓰다 보면 정리가 되곤 했다. 시를 쓰는 것, 소설을 쓰는 것도 다 그 고요해지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니 작년에 뽑히지 못한 50편의 내 시들이 실패한 시들이라고만 할 수 없다. 2년 동안 그 시들을 써내는 과정 자체가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었다. 언어와 감정을 응축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소설로 서사를 확장할 필요성도 절실히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일을 실패한 작업, 쓸모없는 일로 단정하는 건 매우 쉽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러한 일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건 나름의 통찰력이 필요하다.

  "우리 인생에 있었던 과거의 일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늘 움직이는 것이죠."

  주역을 연구하는 역학자 강기진의 유튜브 강의를 보다가 그런 말을 들었다. 그는 우리가 과거의 자신을 늘 새롭게 바라보는 역동성을 지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면, 현재가 지닌 의미도 바뀔 수 있다.


3.

  어린 시절의 책장에는 계몽사의 10권짜리 백과사전이 있었다. 붉은색의 두꺼운 장정(裝幀)으로 된 그 백과사전은 꽤 비싼 물건이었다. 그 시절의 아이에게 백과사전이란 첨단의 지식과 만나는 어찌 보면 유일한 통로였다. '브리태니커'라는 이름의 백과사전을 들었던 것은 아주 한참 뒤, 나의 유년 시절이 이미 오래전에 끝났을 때였다. 나는 부들부들한 고급 종이로 된 백과사전을 심심하면 들춰보곤 했다. 거기에는 '지구의 최후'였나, 우주와 관련된 항목도 있었다.

  '수명이 다해서 백색왜성으로 변한 태양은 지구를 삼켜버릴 것입니다.'

  아직도 그 부분의 삽화가 기억이 난다. 허여멀겋게 변한 태양이 흰색의 팔과 같은 띠로 지구를 휘감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지구의 운명이 참으로 가엾다고 생각했다. 뭔가 비감한 느낌에 약간의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로 지구가 사라질까? 정말로? 아이는 스스로에게 혼자 그렇게 물었다.

  언젠가 소멸하게 될 지구처럼,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사라질 운명이다. 언젠가 나도 수명이 다한 치아를 생각하며 서글퍼할 것이고, 그러다가 눈이 떠지지 않는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어쨌든 오늘도 마음에 떠도는 시를 붙잡는다. 흐르는 시간 속, 스러지는 모든 것들이 내쉬는 숨을 그렇게 글 속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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