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쓸 것인가 - 어떤 독서의 시대와 글쓰기


1.

  올해 초,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들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화가 분명한 문장에 그 어디에서도 큰따옴표(" ")를 볼 수가 없었다. 그냥 나열된 문장 속에서 이것이 대화이겠거니 하면서 소설들을 읽어 내려갔다. 도무지 읽히지 않는 소설들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요새는 이렇게 소설을 쓰나 보군. 인물들의 말과 생각은 문장들 속에서 정처 없이 떠내려가며 유랑하고 있었다. 그걸 제대로 정렬해 내는 것은 오직 독자의 몫이었다.

  불친절하군, 참으로 불친절해.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말을 자꾸만 되뇌었다. 도대체 이딴 유행은 누가 만든 것이며, 왜 그런 소설들을 써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나는 그것이 독자에 대한 철저한 기만과 무시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따옴표의 사용은 독자의 이해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없애고 그냥 평서문으로 기술된 문장들 속에서 독자에게 인물들의 대화와 생각, 묘사를 온전히 구분해 내라고? 왜 독자가 그래야만 하는가? 우린 이렇게 쓸 거야. 그러니까 당신들은 어떻게든 읽으라고. 나에게 따옴표 없는 그 소설들은 거만한 선언처럼 들렸다.

  불친절한 것은 삭제된 따옴표뿐만이 아니었다. 서사가 실종된 소설에는 미문과 분위기만이 남아 있었다. 주인공인 젊은 여성은 원룸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이웃집 할머니와 소통하며 코코아나 마시는 소설들. 이제까지 내가 아는 소설이란 인물과 사건, 주제가 있는 명확한 세계였다. 그런데 이제 그 세계는 흐릿해져서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물체로 변해있었다. 아마도 작금의 소설에서 내가 느끼는 그러한 혼란스러움은 내가 살아온 시대와 문학적 경험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2.

  1980년대의 문학이란 사회변혁과 함께 굴러가는 수레바퀴와도 같았다. 강석경의 '숲속의 방(1985)'은 그 당시의 나에게 약간은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독서 체험으로 남아 있다. 그만큼 그 시대의 분위기가 무거웠다는 뜻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운동권의 후일담 문학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기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개인성에 대한 자각은 분명 이전 시대의 거대 담론에 포획된 개인과는 달랐다. 정치적 민주화는 사회와 대결했던 개인이 비로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개인의 부상(浮上). 내가 생각하기에 그 결정적인 계기는 1997년의 IMF 외환위기였다. 외세에 떠밀려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구조조정과 경기침체의 후폭풍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신경숙의 '외딴방(1995)'을 흔들리는 좌석버스 맨 뒷좌석에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일이 기억난다. 그 소설에는 상처받은 개인이 과거를 반추하며 만들어내는 나름의 울림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신경숙은 그 시대를 통과하는 문학적 티켓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티켓은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버려졌다. 신경숙이 다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표절'이라는 치명적 오점보다도, 지금의 독자들이 더는 그의 소설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독자들이란 다름 아닌 20대와 30대의 여성 독자들이다. 쪼그라든 순문학 시장에서 여성 독자들은 쓰러진 집의 유일한 버팀목처럼 남아 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소설을 써내는 것은 잘 알려진 생존의 비결이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2016)'이 보여준 성공은 얄팍한 문학적 성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소설이 있는데, 양귀자의 '모순(1998)'이다. 양귀자는 대표작인 '원미동 사람들(1987)'을 통해 자신이 그려낸 주변부 세계에서 탈출했다. 작가는 이제 부촌인 평창동의 주민이 되었다. 그런 양귀자의 소설 '모순'이 보여주는 저력은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그리고 그 책은 2000년대의 여성 독자들을 지나, 지금은 책이 출간된 시기에 태어난 여성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모순'은 젊은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사랑과 연애, 결혼을 이야기한다.

  양귀자에게는 먼 훗날 자신의 독자를 예견하는 선구안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모순'을 읽는 젊은 여성의 책상 위에는 요새 잘 나간다는 시인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2023)'도 있을 것이다. 2026년에도 1955년생 작가의 책은 1997년생 시인의 시집에 밀리지 않는다. 내게는 이 기묘한 조화가 꽤나 경박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읽은 한국 문학은 이제 우리 사회의 부조리, 계층적 불평등을 말하는 대신에 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앞세우고 그것에 함입(陷入)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출구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흐름에서 비켜선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편혜영의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2007)'가 보여준 중산층의 서늘하고도 허무한 초상을 기억한다. 편혜영은 매우 영리하게 계층적 서사와 여성의 이야기를 직조해 나갔다. 편혜영이라고 그늘이 없지는 않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몬순(2014)'의 표절 의혹은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편혜영은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공모전의 심사 위원으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내게는 그것이 고갈된 창작력의 대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애란을 빼놓는 것은 매우 서운한 일이 될 것이다. 김애란은 소설집 '비행운(2012)'을 통해 동시대를 통과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채롭고 폭넓은 서사로 풀어낸다. 그 이야기들은 유쾌하지만 부박(浮薄)하지 않고, 때론 서글프게 떠돈다. 어떤 면에서 김애란은 한국의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8-1988, 미국의 단편 소설 작가)로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 나에게 김애란은 단편에 최적화된 작가이다. 이 작가에게 장편은 어쩐지 잘 맞지 않는 어색한 옷 같다.

    
3.

  결국 내게 남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이 시대에 한국에서 소설을 쓴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주류 서사는 여성 서사, 주변부의 서사는 성 소수자와 외국인 이야기가 자리 잡았다. 최근에 내가 흥미 있게 들은 단편 소설의 아이디어는 이주 여성(移住女性)의 서사였다. 글을 쓴 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에서 그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소재를 그러모았다. 그저 그런 일상적 이야기, 주제와는 확연히 다른 결의 이야기였다.

  내가 아는 그들의 이야기는 기껏해야 EBS의 프로그램 '다문화 고부 열전'에서 본 것이 전부이다. 그런 나와는 달리, 글을 쓴 이는 진짜 현실에서 이주 여성의 이야기를 보고 들었다. 그러한 현실성은 그저 이야기로 들었을 뿐인 관찰자의 시점에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이 쓰는 이야기의 핍진성(逼眞性)을 획득하려면, 기자 출신의 작가 장강명처럼 취재를 열심히 하든가 아니면 자료 조사를 치밀하게 해야 한다. 이야기는 단순히 방구석의 모니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고 나서도 남는 문제는 있다. 나는 어떤 관점으로 쓸 것인가. 바로 그것이다.

  그 관점이란 어떤 면에서 글을 쓰는 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인생관, 살아온 인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시대를 견디었고, 살아내었다. 그리고 지금도 통과하고 있다. 나만이 들려줄 수 있는 그 관점, 가치관, 인생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써내려고 하고, 써내는 중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단편 소설을, 지난 한 달 동안에는 SF 단편과 동시, 동화를 써서 공모전에 냈다. 그 이야기가 언젠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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