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운 일


 

1.

  "정말로 종양을 이해하려면, 나 자신이 종양이 되어야 해요."

  바바라 매클린톡(Barbara McClintock, 1902-1992): 미국의 유전학자로 1983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2.

  8살 아이는 5살 때 엄마를 암으로 잃었다. 3년 동안, 기억 도서관에서 대출한 엄마의 기억 칩이 아이의 로봇에 장착된다. 마침내 기억 칩의 대출 기간이 끝난다. 기억 칩은 반드시 반납해야만 한다. 아이는 엄마의 기억 칩을 반납하러 기억 도서관으로 떠난다. 아빠와 함께 떠난 짧은 하루의 여행. 아이는 엄마와 두 번째 이별을 하고 돌아온다.

  어제, 동화 공모전에 내기로 한 동화를 온라인으로 접수했다. SF로 써내느라 좀 골머리를 앓았다. 일반 단편 소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에 어떻게든 세계관을 욱여넣으려니, 퇴고하는 내내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동화를 쓰는 것이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주인공인 8살 어린아이의 심정을 이해해 보는 것은 여느 단편 소설의 주인공을 만들어 내는 것과는 또 달랐다.

  "그게 쉽지가 않아. 까다롭다고. 아주 까다로워."

  오래전, 다큐멘터리 감독님을 인터뷰할 일이 있었다. 나는 다큐를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다. 감독님은 촬영 대상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 그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었다고 답했다. 영화는 시나리오에 적합한 배우를 캐스팅하면 되지만, 다큐는 다르다. 찍으려는 대상,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 다큐멘터리의 동물이든 그 대상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시간이 걸린다. 언젠가 북극곰에 대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촬영 감독은 곰들을 찍기 위해 3개월이었나, 아무튼 몇 개월 동안 카메라를 세워두고 바라보기만 했다고 메이킹 필름에서 말했다.   

  나는 8살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기 위해 8살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라는 정도로는 글을 써낼 수가 없었다. 바바라 매클린톡의 말처럼, 종양을 이해하려면 종양이 되어야 하듯 나도 8살 아이가 되고자 했다. 그게 쉬웠을 리가 없다. 나는 내가 8살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떠올려 보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날, 엄마는 다홍색의 재킷 윗주머니에 콧물을 닦으라고 손수건을 달아주었다. 입학 첫날의 수업도 생각이 난다. 흰색의 도화지 연습장에다 색연필로 구불구불한 곡선과 뾰족뾰족한 직선을 그렸었다. 참으로 8살 아이에게는 빡센 입학식 날이었다.

  그런데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다. 심지어 담임 선생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성인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매우 파편적으로 남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장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뇌의 가용 능력을 높이기 위해, 뇌는 아주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별로 필요하지 않은 유년의 기억을 과감히 삭제한다. 그러니 어른이 되어서 어린아이의 생각과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과제가 되어버린다.

  아마도 많은 동화들이 실패하는 지점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라는 존재. 몸만 아이인 주인공이 어른의 말과 생각을 구태의연하게 늘어놓는 그런 동화들. 내가 쓴 동화도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무당은 동자신(童子神)이 실리면 철부지 아이 목소리를 낸다. 어떤 면에서 작가는 세상 속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그런 식으로 변환해서 글로 구현하는 구술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작업이 쉽지 않으니까, 무척 까다로우니까 어설픈 자기 서사의 반복 내지는 확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3.

  이블린 폭스 켈러는 자신의 안식년에 바바라 매클린톡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매클린톡을 직접 인터뷰하고, 자료를 모아서 매클린톡의 전기를 썼다. 그 책이 '생명의 느낌(1996, 도서 출판 양문)'이다. 이 책에는 유전학자 매클린톡의 일생이 담겨있다. 학자의 일대기이니만큼 뭐 그리 신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지지는 않는다. 연구, 세미나, 동료 연구자들과의 교류, 이런 이야기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계속 이어진다. 오래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은 이러하다. 매클린톡은 그렇게 길고 지난한 학문적 여정을 도대체 어떻게 이어갈 수 있었을까...

  매클린톡은 옥수수에 매혹되어서 자신의 유전학 연구 대상으로 옥수수를 택했다. 한마디로 매클린톡은 옥수수에 미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 열정이란 한순간에 타오르고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매클린톡을 추동(推動)하게 만드는 근원으로서 인내심과 기다림을 내포하고 있었다. 열정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한다는 건,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고 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어려움을 견디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글쓰기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8살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기 위해 그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까다롭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을 그래도 계속 해보고 싶다.



***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 '생명의 느낌'은 현재 절판되어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다. 관심 있는 이라면 도서관에서 그 책을 찾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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