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모의 바다에서


1.

 the step-mother world, so long cruel—forbidding—now threw affectionate arms round his stubborn neck, and did seem to joyously sob over him, as if over one, that however wilful and erring, she could yet find it in her heart to save and to bless. (Moby-Dick; or, The Whale, 132장)

  계모의 바다, 그토록 잔인하고 혹독했던 그 바다가 부드러운 팔을 뻗어 에이허브의 강건한 목을 휘감았다. 아무리 제멋대로이고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바다는 기꺼이 구원하고 축복을 내려줄 듯, 그를 끌어안고 기꺼이 울어줄 것만 같았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 번역- 본인)


2.

  EBS에서 AI로 만들어낸 고전 명작 시리즈 가운데 '모비 딕'이 지난주에 끝났다. 나는 멜빌이 써낸 놀랍고도 풍부한 은유와 묘사에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소설이었다. 그것을 보다가 '계모의 바다'라는 구절에서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본문에는 'the step-mother world'라고 되어있는데, 이 소설 속 세상은 바다 그 자체이므로 그것을 '바다'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계모'라는 단어를 쓴 것은 주인공 이스마엘이 어린 시절, 냉담한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모든 계모가 명백하게 의붓자식에게 적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계모의 바다'라는 구절이 단번에 내 머릿속을 할퀴고 지나갔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온갖 불운의 총합이 그 단어에 응축된 느낌이었다.

  '이제 동화는 그만 쓰려고 해요. 그동안 내가 써왔던 동화들을 보니, 어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럴듯하게 아이의 이야기처럼 써낸 것에 지나지 않더군요.'

  동화를 쓰면서 등단을 모색했던 어느 지망생이 그런 글을 남겼다. 나는 그가 앞으로도 글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글로 독자를 만나겠다는 열망이 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글은 써진다. 내가 시를 2년 쓰다가 그만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처럼. 쓸쓸한 쉼표 같은 고백을 읽으면서, 그 지망생을 나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매일 뒤적거리면서 읽는 문학 커뮤니티의 글 속에서는 계모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괴로움이 감지된다. 어떻게 하다 보니 글쓰기의 길에 들어섰는데, 등단의 길은 보이지 않고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등단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순수 문학 시장 자체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상태여서, 신진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지면과 기회 자체가 지나치게 협소하다. 이제 출판사는 신인들의 실험이나 파격적인 시도에 그 어떤 인내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만큼 순문학 출판사들의 상황도 좋지 않다는 뜻이다. 매출을 안정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작가에게서 쥐어짜듯 뽑아먹고 뽑아먹는다. 결국에는 그렇게 소모되어 개성을 잃은 작가들만 양산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3.

  올해 내가 단편으로 응모할 수 있는 공모전은 더이상 없다. 신춘문예에는 응모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에게 그것은 엄청난 행운의 끝판왕처럼 느껴진다. 그런 운이 있었다면 이미 다 써버렸던지, 아니면 좀 더 견뎌야 할 날들을 위해 남겨두고 싶다. 그렇게 공모전을 마무리하려는데, 8월이 마감인 동화 공모전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더이상 쓰지 않겠다며 떠나버린 동화라는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이는 상어의 거대하고 잔혹한 입처럼, 동화는 그렇게 입을 쩍 벌리고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어때? 동화도 어차피 이야기잖아. 동화의 독자인 아이들에게도 먹힐 이야기를 써내는 건 작가의 역량이기도 하다고. 계모의 바다에서 난파당한 선원이 살아남기 위해 널빤지 하나라도 필사적으로 그러쥐는 것처럼, 나는 공모전의 문구를 결국 붙잡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아이였어. 그 아이의 시절로 되돌아 가보는 거지. 그런데 생각만으로도 어렵다. 아이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닫고 있다. 아이의 입을 열게 만들 방법을 궁리해 봐야지. 내가 표류 중인 계모의 바다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거센 파도가 나의 작은 나뭇조각을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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