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작년 봄에 크록스 슬리퍼를 하나 샀다 나에게 이제까지
슬리퍼는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신는 것이지, 그걸
신고 어딜 돌아다닌다거나 하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크록스 슬리퍼를 사고 난 뒤에는 그걸 신고서 가까운
곳에는 편하게 돌아다니게 되었다 물론 맨발로 슬리퍼를
신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더운 여름에도 양말을 신고 다녔다
막상 슬리퍼를 신고 다니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잘 신고 다니다가 날이 추워지니 슬리퍼를 신으면 발이 시려웠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운동화를 꺼냈다 그런데 매번 운동화 뒤축에
뒤꿈치를 욱여넣는 일이 참으로 귀찮고 번거로웠다 나는 봄 여름 내내
잘 신고 다녔던 슬리퍼를 다시 꺼냈다 발이 좀 시려웠지만, 두툼한
울 양말을 신으니까 나름대로 신을 만했다 아이구 얘야, 춥겠다
네가 돈이 없어서 이 겨울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구나 엄마하고
신발 사러 가자 엄마가 사줄게 엄마는 슬리퍼를 신은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엄마, 난 슬리퍼가 너무 편해서 그래요
엄마는 내가 한 말을 다음번에는 까맣게 잊어버리므로 나는
나중에는 그래요 엄마, 신발이나 하나 사주세요, 라고 말하곤 했다
얼마 전에는 동네에서 길을 기다가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젊은 여자와 마주쳤다 예전 같으면, 한겨울에 무슨 슬리퍼를 신고
다니나 싶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여자가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반가웠다 아, 당신도 슬리퍼가 편해서
이 겨울에 신고 다니는군 나는 슬리퍼를 신고 다니게 되면서부터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엊그제는 반바지를 입고서 아파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청년을
보았다 겨울에 반바지라니, 뭔가 참으로 생경스러웠지만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저 사람은 열이 많은 사람인가 보군
그래서 반바지가 편한 거야 나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