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흐린 날

                                           

흐린 날이다

눈이 아파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돌아오는 길

보도블록 위에
우울이 눅진눅진하게 묻어난다

점심시간
시커먼 옷차림의 라이더들이
밥 배달을 하느라 거리를 헤집는다

도로변 미용실 주인은
열쇠로 가게 문을 잠근다
밥을 먹으러 가는 모양이다

람세스라는 간판은
미용실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래전 이집트의 파라오는
후미진 동네 미용실에
재림했다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린다
오른쪽에 초록색 불이 들어왔다
건널까

어차피 지금 건너도
또 한 번의 신호등을 기다려야 한다

나는 왼쪽을 택한다
인생도 이쪽저쪽 아무거나 택해도
똑같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나 많은 날들이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커다란 막대기로 강물을 휘저어
그 시간을 건져낼 수 있다면

깜빡
초록색 불이 눈에 번진다
질끈 눈을 감는다
산동제 때문이겠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딘다
넘어지면 안돼
몇 달째 욱신거리는 발바닥은
길바닥의 우울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래도 걸어야 한다는 걸

가야 할 집이 있기 때문에
그 집의 부엌엔 물이 새는
수도꼭지가 있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는다
겨울, 흐린 날
살아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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