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보온병에 우롱차를 우리기 위해 뜨거운 물을 부었다. 보온병 안쪽 뚜껑을 끼우려고 하는데 똑,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 아랫부분 플라스틱이 떨어졌다. 가만히 살펴보니 플라스틱이 삭아서 그리된 것이었다. 그랬다. 플라스틱이 삭아서 떨어질 만큼의 세월을 이 보온병은 지나왔다. 정확한 햇수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대략 30년은 좀 넘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 'Tiger 보온병'을 엄마는 아주 오래전에 수입 상품점에서 사 오셨다. 10년 전인가, 그 보온병이 엄마네 집 찬장에 처박혀 있던 것을 내가 찾아서 가지고 왔다. 겉면 스테인리스 부분에는 찌그러진 곳이 두어 군데 있었다. 할머니가 그걸 가지고 다니시다가 땅에 떨어져서 그리되었다. 그런 흠집과는 상관없이 이 보온병의 성능은 놀랍도록 짱짱했다. 저녁에 뜨거운 물을 부어두면 다음 날 저녁까지 따뜻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나는 우롱차를 우리는 데에 그 보온병을 썼다. 식탁 중앙에는 무려 4개의 보온병이 자리하고 있다. 한여름에도 나는 뜨거운 차를 마셨다. 차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운 여름에 찻물 끓이는 것도 일이다. 내가 쓰는 4개의 보온병 가운데 타이거 보온병은 가장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은색 스테인리스의 외관은 투박하고, 무게도 꽤 나갔지만, 나는 이 보온병을 참으로 좋아했다. 보온병 안쪽 뚜껑의 실리콘 부분의 경화는 이미 진작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는 뚜껑으로 물을 따르지 않고 매번 뚜껑을 열어서 쓰곤 했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오랜 시간을 이 보온병은 버텨내었다. 그리고 이제, 어쩔 수 없이 자진 폐업을 하는 가게처럼 보온병은 뚜껑의 부속을 스스로 끝장내 버린 것 같았다.

  뚜껑의 떨어진 아랫부분이 없으면, 물의 온기는 윗부분의 구멍으로 다 빠져나간다. 그러니 이 보온병은 무용지물이 된다. 혹시라도 그 뚜껑 부품을 구할 방법은 없을까? 궁리 끝에 타이거 보온병의 한국 지사 홈페이지를 찾았다. 그곳 홈페이지 한구석에 있는 고객 문의란에 글을 올리려고 보니 기가 막힌다. 이름, 전화번호, 집 주소, 이메일 주소... 보온병 뚜껑 하나 물어보려고 내 개인 정보를 그 사람들에게 줄 생각은 없다. 나는 문의 글을 쓰려다 그만두었다.

  Strong Vacuum Flask, BWP-C500, 0,47리터, For Your Refreshment. 보온병의 겉면에 붙어있는 라벨 테이프는 아직도 멀쩡하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보온병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이 보온병의 온전한 부속 뚜껑은 일본 타이거 보온병 회사 본사에나 있을 것이다. '우리 회사가 걸어온 길'과 같은 문구가 있는, 본사의 전시실에나 있지 않을까? 나는 보온병 뚜껑 부속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버리자.  

  오랫동안 써온 물건을 버리는 일이 매번 속 시원하지는 않다. 나에게는 몇 년 전 세일할 때 사둔 새 보온병이 2개나 있다. 이제 이 타이거 보온병을 버리고 그걸 쓰면 된다. 새 걸 쓸 수 있으니 좋긴 좋은데, 이상하게 이 보온병을 버리는 것이 아깝다. 얘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롯이 뜨거운 물의 온기를 견뎌내었다. 가끔 물건의 상품평을 읽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물건을 지칭할 때 '아이'라는 단어를 쓴다. 너무 예뻐서 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죠, 이런 식으로. 나는 그 표현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 보온병을 내다 버릴 수밖에 없는 지금에서야 '이 아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니, '아이'가 아니라 '노인'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정확한가? 투박한 몸통에는 찌그러진 자국이 있고, 뚜껑의 플라스틱은 삭아서 떨어졌다. 겉뚜껑도 예전에 안쪽 플라스틱과 분리된 것을 내가 강력 본드로 붙여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 아니 이 늙은 보온병은 참으로 꾸역꾸역 숨을 내쉬며 자신의 삶을 살아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Time to say Goodbye. 내 귀에는 안드레아 보첼리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함께 부르는 그 노래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타이거 보온병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의 분리수거함이 있는 곳에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마침내 '캔류, 고철'이라고 되어있는 통에 나는 보온병을 가만히 떨어뜨렸다. 챙그랑. 나는 보온병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는 돌아섰다. 고철더미 속에 잠겨버린 보온병을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안녕, 나의 보온병! 오직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인사를 건네었다.  



*Tiger 보온병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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