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의 꿈은 당신의 자식들이 모두 약사가 되어 약국을 차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주 오래전에 그 약국의 이름까지 지어두셨다. '삼 남매 약국'. 의약 분업 이전에 약사들은 약의 처방과 조제의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특정 질병에 대한 약을 잘 만들어 파는 약국은 전국에 이름이 널리 퍼졌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피부병에는 서울의 A 약국, 관절염에는 천안의 B 약국, 불면증에는 부산의 C 약국... 이렇게 환자들은 병을 낫게 해줄 기적의 약을 찾아 유명 약국 유람에 나섰다.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약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었다. 나름의 비법으로 약을 만드는 약사가 큰돈을 버는 일이 가능했던 시대였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제약업계에서 보낸 부친이 보기에 가장 안정적인 직업은 '약사'였다. 물론 아버지는 제약 회사에서 영업을 하면서 많은 의사들도 만났다. 당신의 자식이 의사가 되면 당연히 좋겠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의대에 합격하기란 쉽지 않았다. 의대를 가기 위해 이과를 선택한 나는 수학의 벽에 좌절했다. 남동생은 공대에, 여동생은 인문대에 진학했다. 그렇게 되니 아버지의 꿈인 '삼 남매 약국'은 진작에 파토가 나버렸다. 

  아버지는 내가 약대에 진학하지 못한 일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내 문과 머리로는 이과가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병원에 가서 의사를 보거나, 약국에서 약을 지을 때 약사를 보면, 나는 저 일은 못하겠다 싶다. '전문직'이라는 명칭이 아무리 좋아도,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는 없다. 물론 그 직업을 가지면 평생을 두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거기에다 '의사'라는 직업은 얼마나 때깔이 좋은가? 의사 자식을 둔 부모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할 법도 하다.

  어머니의 계모임 친구들 가운데에는 K 아주머니가 있었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의료 기사였다. 그 아저씨는 의사 친척의 병원에서 온갖 궃은 일을 하며 설움을 겪었다. 긴 세월 동안 아저씨의 가슴에는 자기 자식을 반드시 의사로 만들겠다는 염원이 자리 잡았다. 그건 아내인 K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아주머니는 틈만 나면 절에 불공을 드리며 기도했다. 아주머니의 아들은 지방대 공대에 합격했지만, 의대에 가기 위해 재수를 했다. 아주머니의 주변 사람들 가운데, 그 아들이 의대에 합격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의대에 합격했다. 지방대이기는 해도 의대 합격은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아주머니와 남편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의료 기사로 살아온 그 힘들었던 세월의 한풀이는 아들의 의대 진학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제 그 아들은 서울에서 개업해서 강남의 비싼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내 부친은 노년의 많은 시간을 병고에 시달리다 돌아가셨다. 내가 살아온 인생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다. 당신이 보기엔 자식이 별 쓸모도 없는 공부를 하느라 돈과 시간을 낭비했을 뿐이었다. 내가 서른의 나이에 영화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마도 아버지는 살짝 다른 소망을 품기도 하셨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수능을 준비해서 약대에 진학해라. 약사가 되면 약국 개업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약 회사에는 약사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이 있다. 약사가 되어서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 영화는 취미로 얼마든지 할 수가 있지 않느냐...

  나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결국 모른 척 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 이후로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당신의 오롯한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동생들은 아등바등 제각각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말이 좋아 마케팅이지, 동생들이 하는 일은 물건을 파는 일이다. 각각 다루는 상품이 다를 뿐이다. 월급쟁이의 버거움과 비애를 동생들은 절실히 느끼며 살고 있다.

  "너는... 글을 쓰는 게 좋겠구나."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아버지는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그 말씀을 하셨다. 내게는 아버지의 그 말이 유언처럼 가슴에 박혀있다.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내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시절에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런저런 잡문들을 써 내려가고 있을 때에도 그렇다.

  나는 아주 가끔, 아버지의 꿈이었던 '삼 남매 약국'을 떠올려 본다.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약국에 전국에서 구름떼처럼 환자들이 몰려와서 약을 사가고, 우리 삼 남매는 아주 큰 부자가 되는 꿈. 물론 그 꿈은 '의약 분업'이라는 시대의 흐름 때문에라도 불가능했다. 지난주, 나는 추모 공원에 모신 아버지를 보고 왔다. 아버지의 유골함은 고요 속에 잠겨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룰 수 없었던 꿈에 대한 회한을 가지고 눈을 감으셨을 것이다. 글은 쓰고 있어요. 계시는 그곳에서 편히 쉬세요. 나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