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엄마를 산책시키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아파트 현관 입구를 지나가는데, 거기에 못 보던 소식지가 있었다. '**구 노인회 소식지'라고 적힌 4쪽 자리 신문이었다. 엄마가 공원 벤치에서 깔고 앉으면 좋겠네, 그런 마음으로 한 부를 집어 들고 왔다. 뭐 노인회 회원들 공치사나 적혀 있겠지 싶어서 별로 읽을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첫 페이지의 글이 유독 눈에 와서 박혔다. 글쓴이는 치매 노모를 둔 사람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 글은 시 같았다. 단문으로 띄엄띄엄 줄을 바꿔가며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매우 간결하게 써 내려간 그 글의 행간에는 치매 간병을 하느라 9년을 보낸 이의 고통이 베어져 있었다. 처음에 글쓴이는 노모의 간병을 위해 요양보호사를 집에 보냈다. 모친은 요양보호사가 집안 물건을 훔친다면서 욕하고 헐뜯었다. 외부 사람을 집에 들이기 싫어하니, 글쓴이와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모친을 보살폈다. 그런데 워낙 강골의 성격을 지닌 어머니는 병증이 심해지면서 자식들을 꽤나 들들 볶았던 모양이다. 긴병에 효자없다고 자식들은 간병에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다. 글쓴이의 형제들은 논의 끝에 모친을 요양원에 보내려 했다. 노모가 안가겠다고 버티며 실랑이하는 사이에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제 요양원에서 지내는 모친은 글쓴이가 면회 갈 때마다 그곳에서 자기를 빼달라며 울며 매달린다고 했다.

  '부모 잘 모시는 것을 자식의 도리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저는 어머니 돌아가시기만을 바라는 패륜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그 글귀에 이르자 글쓴이의 어려움과 슬픔이 절절히 느껴졌다. 스스로를 패륜아로 지칭한 글쓴이를 그 누가 비난하고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나는 새삼 '좋은 글'의 요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오늘 읽은 이 짧은 산문은 무슨 대단히 박학다식하거나 유려한 문체로 쓰인 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글쓴이의 진심은 글의 투박한 외면을 뚫고 전면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때로 진심, 우리가 진정성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문체(style)가 주는 즐거움과 감동을 뛰어넘는다. 자기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나누고자 하는 개방성이야말로 좋은 글쓰기의 기본 요건이 된다.

  나는 오늘도 엄마를 모시고 아침 공원 산책을 다녀왔고, 낮 동안에 엄마를 보살펴 드렸다. 이렇게 지낸 지가 어느덧 2년째이다. 엄마는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하고, 방금 했던 이야기를 고장이 난 테이프 틀어놓듯 반복한다. 그렇게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집안일이 밀려있다. 최근에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 메일 박스에 쌓이는 뉴스 레터와 외국어 공부를 조금 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같은 일상이 다시 반복된다. 이건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다.

  "아이구, 이 사람 정말 힘들겠구나."

  엄마는 내가 깔고 앉으라고 준 노인회 소식지를 읽고 나서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을 바람에 공원의 나무들은 우수수 낙엽을 떨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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