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청하가 여기 있네."

  머리가 허연 노인이 아파트 분리수거함에서 능숙하게 술병을 꺼낸다. 나는 산책 나가는 길에 그 할머니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가만 보니 노인은 공병 보증금이 있는 술병이 눈에 띄면 가져가는 모양이었다. 청하 300ml 작은 병의 공병 보증금은 100원. 그 보다 훨씬 큰 700ml 용량의 백화수복은 130원이다. 그 할머니가 작은 청하병을 보고 반가움의 탄성을 질렀을 법도 하다.

  사실 청주는 집안 제사를 지낼 때 빼고는 따로 구매할 일이 없는 물품이기는 하다. 그 청주를 요리에 좀 쓰고 나면 병이 나온다. 술병 한 귀퉁이에 빨간 테두리로 인쇄된 부분에는 공병 보증금이 적혀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마트에 가져가기 귀찮아서 아파트 분리수거함에 내놓는다. 유리병으로 표기된 분리수거함에는 그렇게 공병보증금을 받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술병이 쌓인다. 대개는 그 병들은 경비들의 가외 수입으로 쓰이는 모양이다. 분리수거함에는 경고문까지 붙여져 있다.

  "공병을 함부로 가져가지 마십시오. CC TV 확인 후 도난 행위에 대해 조치할 것입니다."

  그런데 분리수거함에서 공병을 가져가는 것이 과연 절도에 해당하는가? 나는 그 경고문을 볼 때마다 쓴웃음을 짓게 된다. 어쨌든 경비들 입장에서는 입주민이 버린 공병은 자신들의 수입에 해당하는데, 그걸 빼앗기는 형국이라 저런 말도 안되는 글을 써붙였을 것이다. 그런 경비들에게 '청하 할머니' 같은 이들은 공공의 적임이 분명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나는 산책을 가던 도중에 그 할머니의 공병 수거 현장을 목격했다. 마치 맨손으로 물고기를 날렵하게 잡아내듯, 노인은 순식간에 청하 병을 일별해내어 건졌다. 할머니에게 각 아파트 동마다 놓여있는 분리수거함은 자신만의 사업장과도 같았다. 노인은 불룩해진 비닐 봉투를 손에 들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는 친구 노인과 분리수거함 앞에서 만나서 병을 몇 개 주웠나에 대해 떠들어댔다. 나는 머릿속으로 저 할머니가 하루에 수확(?)하는 공병이 과연 얼마나 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각 단지의 아파트마다 있는 분리수거함에서 하루에 100원짜리 공병을 10개 주으면 1000원, 한 달이면 3만원이 된다. 노인에게는 나름대로 솔찮은 용돈벌이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경비의 눈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해야겠지만 말이다.

  반드시 공병을 줍고 말겠다는 의지. 나는 그 '청하 할머니'의 말과 행동거지에서 그 결연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궁상맞음과 맞닿아 있음에도 노인이 청하 병을 발견했을 때 내지르는 감탄사는 행복감 그 자체의 표현이었다. 저렇게 적은 액수라도 공짜로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은 소시민적인 행복에 해당하는가? 나는 비로소 노인이 보여주는 그 억척스러움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사진 출처: 내가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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