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산책길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오늘 아침에 거길 지나가면서 보니, 가을 운동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의 국민학교 운동회가 떠올랐다. 운동이라면 지금도 몹시 싫어하는 나에게 운동회는 지겨운 연례 행사였다. 그럼에도 생각나는 것들이 있기는 하다.

  나는 달리기를 잘하는 애들이 몹시 부러웠었다. 달리기에서 등수에 들면 심판을 보는 선생들은 그 아이들의 팔목에 보라색 스탬프 잉크로 등수를 찍어주었다. 나중에 그 아이들은 본부석에 가서 자신의 팔에 찍힌 도장을 보여주고 이런저런 상품들을 받아갔다. 상품이라고 해봐야 연필과 공책, 필통, 크레파스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는 단 한 번도 받아볼 수 없었던 그 달리기 상품들이 너무나도 갖고 싶었더랬다. 어린 마음에도 어떤 일에 재능이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 괴로움을 얼핏 느꼈다. 이제 이 나이에 생각해 보니 인생의 많은 것들이 그 달리기 경품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간절히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 말이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천천히 지나고 나면 큰 사거리의 횡단보도가 나온다. 거길 건너면 작은 시민 공원으로 길이 이어진다. 사실 공원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한 동네 자투리땅에 불과한 곳이기는 하다. 별 거 없는 운동기구와 앉을 만한 벤치가 드문드문 놓여있는 공원. 오전 시간에 이 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대개가 나이가 있는 중장년층의 사람들, 노인들이다. 그들은 결코 뛰거나 과격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 설렁설렁 걷거나 운동기구를 이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한번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기는 했다. 족히 60은 넘어보이는 아줌마가 훌라후프를 돌리는데 어찌나 잘하는지,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저 아줌마는 나름대로 운동신경이 있는 사람이구나. 자전거 타기는 물론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저질 운동신경을 가진 나로서는 그런 사람을 보는 것이 신기하다.

  그렇게 손바닥만한 작은 공원을 지나면 인근의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요새 들어서 느끼는 점은 개 짖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는 것이다. 어느 집에서 개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하면 인접한 아파트 이곳저곳에서 그 소리에 응수하듯 개들이 짖어댄다. 컹컹, 왈왈, 으르렁... 마치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여러 마리의 개들이 일시에 짖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환장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절로 알게 된다. 개들은 볼 수도 없는 저 건너편 아파트의 개들을 물어뜯어버릴 것처럼 짖는다. 그 개들은 주인이 있어도 그 말귀를 들어처먹지 않거나, 아니면 주인이 집에 없으니 더 제멋대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에는 그렇게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아주 듣기 싫어했다. 그러나 요새는 그 개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된다. 쟤들도 여북하면 저럴까...

  '여북하다'는 정도가 매우 심하거나 상황이 좋지 않음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잠깐 산책하는 시간을 빼놓고는 하루종일 집에서 지내는 개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마당이 있는 주택도 아닌 아파트는 개들에게 좋은 환경도 아니다. 가끔 공원에서 대형견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을 본다. 내가 본 대형견의 견주들은 의외로 매너가 좋았다. 그들은 개에게 목줄은 물론 입마개를 씌우고서 산책을 나왔다. 그리고 그 개들은 꽤나 훈련이 잘 되어있어서 사람을 보고 짖거나 위협한 적도 드물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는 별개로 과연 그런 큰 개들이 아파트라는 곳에서 잘 지내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탁 트인 들판에서 사냥감을 쫓아가야할 셰퍼드나 하운드, 산에서 양떼 무리를 보살피며 기세등등하게 뛰어다녀야 할 커다란 털복숭이 양치기 개들이 콘크리트 보도 블럭을 천천히 걷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뭔가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키우는 개와 보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주인이 없는 시간 동안 개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외로움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 개들은 신경이 곤두서서 작은 자극에도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는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으로서 나는 미친듯이 짖는 개들의 마음을 달래 줄 방법이 없다. 아이구, 너희들도 참 안되었다. 참으로 사람들이 못할 짓을 하고 있구나...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할 뿐이다.

  문득, EBS의 클래스e에서 법의학자 유성호의 강의를 들었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는 고독사한 노인들의 시신을 부검할 때 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시신들 가운데에는 연조직(그는 '얼굴'이라는 단어를 차마 쓸 수 없었던듯 하다)이 사라지거나 심하게 훼손된 경우가 있다고 했다. 나중에 그 원인을 찾아보면 노인들이 키우던 반려 동물에게 있었다. 죽어버린 주인 옆에 남은 동물들이 대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너무 연로하거나 죽음을 앞둔 이들은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일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법의학자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울분에 찬 개들의 아파트 숲을 지나면 소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진 조그만 오솔길이 나온다. 조금 떨어진 내 앞쪽에서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맨발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아줌마 뒤로 보이는 할머니 둘도 맨발이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그 오솔길은 꽤나 질척거리는 진창길로 변해 있었다. 당연히 그들의 발은 진흙으로 뒤범벅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맨발로 걷기'로구나... 도대체 맨발로 걷는 열풍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어떤 말기암 환자가 '맨발로 걷기'를 하고나서 몸이 다 나았다는 체험담에서부터인듯 했다.

  내 생각에 저렇게 맨발로 걸으려면 최소한 파상풍 주사는 맞아야 한다. 그리고 당뇨병이 있는 이들은 절대로 저런 걷기를 하면 안된다. 당뇨족을 앓는 이들에게 작은 모래나 이물질은 염증이나 궤양, 최악의 경우 다리 절단에 이르게도 만든다. 산책길에서 진흙발로 걸어나오는 이들을 보면서, 나는 '맨발로 걷기'라는 이 광풍에 누군가 불운하게 다치거나 더 아픈 경우가 없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된다.

  나는 소나무 오솔길을 나와서 다시 아파트 단지로 들어선다. 집을 나올 때 보니 하늘빛이 많이 흐렸다. 후두둑, 흐린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져온 3단 우산을 천천히 폈다. 올해는 늦더위가 유독 질기게도 쉬이 물러가질 않았다. 하지만 이 비가 내리고 나면 그 길었던 여름도 진짜 작별을 고할 것이다. 이제 매미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파트 화단에 누군가 심어놓은 분꽃과 사루비아는 거의 다 졌다. 국화는 작은 꽃망울이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어느새 빗줄기가 세어지고 있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흐린 가을날의 산책은 그렇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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