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등학교 1년 선배인 M은 전형적인 수재(秀才)였다. 공부를 잘했던 M이 무슨 장학금이며 표창같은 것을 자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공부 잘하는 그 선배가 무척 부러웠었다. 나는 과학 선생에게 그 선배가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더랬다.

  "야, 너 M이 얼마나 어렵게 공부하는지 아냐? 걔네집 무지 가난해. 단칸방에서 식구들이 다 살아. 그런 곳에서 M이 공부를 한다고."

  선배 M은 명문대 치대에 들어갔다. 학교 대의원 회의의 임원이라는 공통점으로 나는 M과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 M이 대학에 들어간 뒤로 나는 몇 번 편지를 보냈고, 답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고서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문득, 나는 M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구글 검색창에 M의 이름을 입력하니 바로 검색 결과가 뜬다. M은 모교 대학병원의 조교수가 되어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병원 홈페이지에 나온 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었다. 뭐라고 썼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선배가 이룬 성취를 보니 기쁘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내가 보낸 메일에 M은 아주 짧은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인생의 성공이 외적인 지위나 이룬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올바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

  뭔가 읽는 사람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재수없는 답장이었다. 나는 M의 그 말이 같잖은 충고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나는 M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며칠 전, 참으로 쓸데없는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구글 검색창에 M의 이름을 써넣어 본 것이다. 나는 몇 초가 지나지 않아 그 쓸데없는 짓에 대해 후회하게 되었다. M은 강남의 대형 치과의 대표 원장이 되어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촌스러운 외모의 M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단칸방에서 고군분투하며 공부하던 선배 M은 그야말로 인간승리-이 표현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를, 아니 그 단어 대신 입신양명(立身揚名)인가, 아무튼 진짜 성공한 전문직 여성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병원 홈페이지에 나온 그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나는 M이 아직도 인생의 의미는 외적인 성공에 있지 않는다고 믿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3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의대 진학은 출세의 지름길이다. 그런 면에서 고 3때 같은 반이었던 L도 그것이 진리임을 보여주었다. 나는 의대를 가겠다는 일념으로 이과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내 문제는 의사라는 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형적인 '문과 머리'라는 데에 있었다. 나에게 어려운 이과 수학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어떻게든 수학을 잘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나는 악전고투 끝에 패잔병으로 남았다. 결국 내신 1등급을 받기는 했어도 의대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1, 2학년 때는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던 L은 고 3때 수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나는 L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어. 집안에 의사나 판검사는 한 명 정도 있어야 한다고. 난 어떻게든 의대에 갈 거야."

  내신 2등급으로 L은 지방대 의대에 진학했다. L이 레지던트였을 때 나는 L을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나는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늦은 나이에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L은 남성 위주의 의사 사회에서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내비쳤다. 그리고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다. 이제 L은 대학병원 안과의 과장이다. 아마도 L의 부친은 집안에 의사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만족할 것이다.

  엊그제였나, 우연히 인터넷 뉴스를 클릭하다가 S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S는 자신의 신작 소설을 홍보하고 있었다. S는 내가 들었던 시 창작 수업의 수강생이었다. 수업을 담당한 시인 선생은 S가 쓴 시에 대해 가혹한 혹평을 했더랬다.

  "이건 요설(妖說)이야, 요설. 이런 글은 뭐랄까, 문학의 바닥을 보여주는 아주 안좋은 글에 해당하지."

  시인 선생은 혹평했던 S와는 달리, H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은 H가 조만간 등단할 것이라고 했고, 그는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2년인가 3년 뒤에 H는 등단했다. H는 이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시인이다. 그런데 선생이 요설이라며 극악의 평을 했던 S도 등단했다. 나는 H도, S의 글도 다 싫어했다. 글로도 인간적으로도 둘은 내게 밉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시인 선생의 안목에는 어느 정도 공감했다. 그런 나에게 S의 등단은 나름 충격이었다. 소설가로서 S는 몇 권의 책을 연이어 냈다. 저런 소설도 팔리기는 하네... S의 소식은 몇년 동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S는 이제 신작 소설을 들고 나온 것이다. 영조(英祖)는 사도 세자에 대한 편벽된 미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귀를 씻는 일'이었다. 실록에는 사도 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영조가 귀를 씻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S의 신작 홍보 뉴스를 읽고 나니 나는 영조처럼 귀를, 아니 눈을 씻고 싶어졌다.  

  러프 컷(rough cut). 그것은 영화를 촬영한 원본 그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보는 영화는 '편집(editing)'이라는 마법을 거쳐야만 한다. 편집 이전의 원본인 러프 컷에는 모든 것이 뒤엉켜 있다. 서사는 엉망진창이고 촬영 과정의 온갖 실수와 결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혼란의 도가니에서 에디터는 정교하게 불순물을 걸러낸다. 가끔 누군가의 인생 이력을 들여다 보노라면 편집자가 감독의 의도대로 잘 뽑아낸 필름처럼 보일 때가 있다. 아마도 나에게는 고등학교 시절의 M과 L, 그리고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의 S와 H의 이야기가 그렇게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나, 도대체 뭘 하면서 살아온 걸까?"

  내 인생의 러프 컷을 돌려보는 일은 뼈저린 회한을 동반한다. 장르는 불분명하고 서사는 개연성도 없다. 신의 손을 가진 편집자가 와도 그 러프 컷은 구제가 안될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렇다. 잘 편집된 보기 좋은 영화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러프 컷 인생을 끌어안으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나는 러프 컷 자체가 영화로 나온 것을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인생의 러프 컷에서 나름의 의미를 끌어내는 일은 오직 그것을 찍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언젠가 이 러프 컷을 내가 편집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뒤죽박죽이 된 필름들을 나만의 솜씨로 이어붙이다 보면 멋진 실험 영화 한 편이 탄생할 수도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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