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4부



쇼치쿠(Shochiku, 松竹) 영화사의 이상한 모험

우주 대괴수 기라라(宇宙大怪獣ギララ, The X from Outer Space, 1967), 니혼마츠 카즈이(二本松嘉瑞)
곤충대전쟁(昆虫大戦争, Genocide, 1968), 니혼마츠 카즈이
흡혈귀 고케미도로(吸血鬼ゴケミドロ, Goke, Body Snatcher from Hell, 1968), 사토 하지메(佐藤肇)



4. 지구 멸망의 비관적 세계관:
곤충대전쟁(昆虫大戦争, Genocide, 1968),
흡혈귀 고케미도로(吸血鬼ゴケミドロ, Goke, Body Snatcher from Hell, 1968)


  '우주 대괴수 기라라(1967)'를 만든 그 이듬해, 니혼마츠 카즈이 감독은 '곤충대전쟁(昆虫大戦争, Genocide, 1968)'을 내놓았다. 영화는 '원자 폭탄의 발명은 인류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대학살(Genocide)'이라는 영어 제목이 암시하듯, '곤충대전쟁'에는 비관적 세계관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지구 멸망의 단초가 되는 것은 '독충'이다. 핵폭탄을 싣고 베트남으로 향하던 미군 수송기는 곤충 무리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아남 군도에 추락한다. 미군 수뇌부는 비밀리에 생존자와 핵폭탄의 행방을 조사한다. 두 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한 명의 생존자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미군의 죽음이 독충과 관련있다고 믿게된 곤충학자 나구모 박사는 독충의 근원지를 찾아나선다. 마침내 나구모 박사는 살인 곤충을 만들어낸 장본인과 마주하게 되는데...

  '곤충대전쟁'에는 당시 일본이 바라본 국제 관계의 역학이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미국은 오만한 패권 국가로 비춰진다. 미군 수사대는 무죄한 섬 주민을 미군 살해범으로 몰아간다. 그들이 나구모 박사를 비롯해 일본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강압적이고 무례하다. 일본은 패전 이후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통치를 받았다. 그 시기에 일본이 미국에 대해 갖게된 두려움과 증오의 감정이 이 영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무시무시한 핵폭탄을 사용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국가로 그려진다. 또한 영화는 '냉전(Cold War)'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과감하게 끌어들인다. 독충을 만들어낸 이는 나치 포로 수용소의 생존자 애너벨이었다. 이 유대인 여성은 무자비한 살상과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애너벨과 그 추종자들은 공산권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제 영화 속에서 대결의 주체는 미국과 공산국가로 확장된다.  

  독충의 가공할 살상력은 히치콕의 '새(The Birds, 1963)'를 떠올리게끔 만든다. 독충에 단 한번 물리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르며, 그들은 떼를 지어 사람을 공격한다. 나구모 박사는 독충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스스로 독충에 물리는 생체 실험을 감행한다. 박사는 이 살인 곤충이 단지 독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지능을 가진 새로운 생명체임을 알게 된다. 곤충들은 인류를 징벌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외친다. 결코 웃지 못할 지구 멸망의 대 시나리오는 사토 하지메 감독의 '흡혈귀 고케미도로(吸血鬼ゴケミドロ, Goke, Body Snatcher from Hell, 1968)'에서도 볼 수 있다.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기장은 피의 바다를 떠다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비행기 창문에는 새들이 부딪히며 죽는다. 알 수 없는 거대한 붉은 덩어리와 충돌한 비행기는 외딴 산기슭에 추락한다. 불시착한 비행기 승객들은 그곳에서 뜻밖의 존재와 마주한다. '흡혈귀 고케미도로(Goke, Body Snatcher from Hell, 1968)'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의 명백한 계승자이다.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는 인간의 몸과 영혼을 거침없이 침탈해서 좀비처럼 만들어 버린다. 돈 시겔(Don Siegel) 감독의 이 영화는 냉전 시대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두려움을 반영한다. '흡혈귀 고케미도로'에서 우주선의 생명체는 점액질의 물체로 인간의 몸에 스며든다. 그렇게 인간의 몸을 빼앗은 외계인 고케미도로는 '인류를 멸망시키러 왔다'고 선포한다.

  '곤충대전쟁'이 폭력과 살상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흡혈귀 고케미도로' 또한 전쟁의 광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영화 속에서 부패한 정치인은 무기판매상과 공생의 관계에 놓여있다. 무기판매상은 사업을 위해 정치인에게 뇌물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까지 공유한다. 남편을 베트남전에서 잃은 미국인 여성은 네이팜탄의 흉터를 보여주며 전쟁에 대한 증오심을 토로한다. 영화는 원폭의 참상을 목격한 일본의 전후 트라우마가 반전(反戰), 더 나아가 지구 멸망에 대한 어두운 전망과 조응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외계 문명의 침입자 고케미도로는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류에 대한 심판자와도 같다.

  '곤충대전쟁'과 '흡혈귀 고케미도로'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며 끝난다. '곤충대전쟁'에서 홀로 살아남은 여자가 뱃속의 아이와 무사히 삶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흡혈귀 고케미도로'에서 생존한 두 명의 승무원은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믿지 못한다.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있다. 지구 밖에서는 고케미도로의 우주선이 대기중이다. 과연 당시 일본 관객들은 두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분명한 점은 쇼치쿠 영화사의 이 대담한 모험이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쇼치쿠는 이제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감독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 1969–1995)'가 기나긴 침체기를 견뎌낼 동아줄이 되었기 때문이다. 니혼마츠 카즈이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곤충대전쟁'이 끝을 장식했다. 사토 하지메 감독은 TV 시리즈와 특촬물 제작 현장으로 돌아갔다. 쇼치쿠의 짧은 일탈은 그렇게 끝났다. 오늘날의 관객은 그 독특한 영화들 속에 전쟁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본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흡혈귀 고케미도로'에서 승객들이 칸사이 사투리(関西弁, かんさいべん)로 대화하는 부분은 꽤나 흥미롭게 들린다. 비행기가 그쪽 관서 지방 공항에서 승객들을 태운 듯.

***Kathy Horan은 '곤충대전쟁'의 애너벨, '흡혈귀 고케미도로'에서 미군 미망인 닐 부인으로 출연했다. 외국인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은 흔한 일이었던 모양.

****곤충대전쟁(昆虫大戦争, Genocide, 1968)에서는 1960년대 일본 영화에 자주 출연한 흑인 배우 Chico Roland를 볼 수 있다. 그다지 연기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주일 미군 출신의 이 배우는 당시 일본 영화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검은 태양(Black Sun)'에서는 주연 배우 자리를 꿰찼다.



쿠라하라 코레요시(蔵原惟繕) 감독, 검은 태양(Black Sun, 196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9/black-sun-1964.html


*****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1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1/1-house-of-terrors-1965.html

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2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1/2-house-1977.html

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3부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1/3-x-from-outer-space-19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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