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 미키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은 좋지만, 거기엔 남자들이 없어요." 미조구치 겐지에게 나루세 미키오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만 주구장창 찍은 감독으로 각인된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 '권적운(鰯雲, Iwashigumo, 1958)'은 나루세 미키오의 필모그래피에서 특이한 작품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일본의 사회 변화와 세대 갈등을 중심 주제로 다룬다. 물론 나루세 미키오의 주된 관심사인 '여성의 삶'은 여기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전쟁 미망인인 야에는 농사를 지으며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신문기자 오카와는 농촌 기사를 쓰기 위해 야에를 인터뷰한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진다. 야에는 인색한 시어머니와 고된 농사일에 지쳐있다. 모처럼의 연애 감정은 야에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야에에게는 같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오빠 와스케가 있다. 와스케는 자신의 세 아들이 대를 이어 농사를 짓길 바란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 삶을 거부한다. 오빠네 집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운데, 야에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오카와는 도쿄로 발령을 받아 떠나기로 되어 있다. 야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권적운'에서 이야기의 중심축은 야에가 아니라, 오빠 와스케의 집안에 있다. 이 영화에서 농촌의 현실은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오카와가 야에와 만나게 된 계기는 농지개혁법 취재 때문이었다. 종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강도 높은 개혁으로 일본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농지개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52년농지법이 통과된다. 비로소 일본 농촌은 봉건적 농지 소유 제도가 철폐되고 자작농 중심의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대지주들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정부에 의해 강제로 헐값에 토지를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지주의 집안이었던 와스케는 이전보다 쪼그라든 땅에서 어렵게 농사를 짓고 있다.

  전형적인 구세대 농부로서 와스케의 사고방식은 자식들의 가치관과 여지없이 충돌한다. 그는 빚을 내서라도 아들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루고 싶어한다. 장남 하츠지는 그런 것을 허례허식으로 여긴다. 하츠지는 결혼 예식을 생략하고 도시에서 소박한 신혼 살림을 시작한다. 와스케의 막내 아들 준은 농부가 아닌 기술자가 되려고 한다. 기술학교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준은 아버지에게 논을 팔 것을 요구한다. 땅을 목숨처럼 여기는 와스케는 막내 아들의 청에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토지를 팔게 된다.  

  러닝타임 129분의, 컬러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영화 '권적운'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팬들에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영화가 농지법 도입 이후의 일본 농촌의 현실과 함께 신구 세대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야에와 오카와의 사랑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곁다리처럼 비춰진다. 그럼에도 나루세 미키오는 이 영화에 자신의 각인을 분명히 새겨넣는다. 전쟁미망인 야에는 농사로 독립적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오빠 와스케가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을 때, 야에는 경운기를 직접 운전하며 땅을 일군다. 오카와와의 관계에서 야에가 보여주는 주도적인 모습은 꽤 의미심장하다. 여관에서 야에는 오카와가 열어둔 창문을 닫아버리며, 그렇게 둘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야에는 유부남인 오카와와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마냥 억누르지는 않는다.

  야에를 바닷가에 데려간 오카와는 더 넓고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따라가서, 그가 보여주는 세상과 함께 할 것인가? 여전히 죽은 남편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전쟁미망인은 곧 자신의 현실을 깨닫는다. 야에에게는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들과 삶의 터전인 땅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오카와가 도쿄로 떠나는 날에 야에는 힘겹게 농사일을 하고 있다. 이 독립적인 여성의 삶은 외로울 수는 있지만, 비참하거나 서글프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권적운'에서 나루세 미키오는 전후 일본 농촌의 변화를 면밀하게 담아낸다. 거기에는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초상도 포개어져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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