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노 브로카의 거침없는 사회 고발: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Manila in the Claws of Light, 1975)
 


  필리핀 감독 리노 브로카(Lino Brocka)의 영화 '카인과 아벨(Cain and Abel, 1982)'은 구약 성서에서 영감을 받았다. 형 카인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창세기의 끔찍한 형제 살해는 필리핀의 시골 마을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가모장(家母長)이며 대지주인 돈나 피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 로렌조와 차남 엘리스. 돈나 피나는 엘리스만을 지독히 편애한다. 실질적으로 농장을 관리하는 로렌조는 어머니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만 소용이 없다. 엘리스가 형이 받기로 한 땅을 달라고 하면서 이 집안의 비극이 시작된다. 사소한 다툼은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부르고, 폭력 조직들 사이의 총격전으로 확장된다.

  결국 형제 모두 죽음에 이르는 이 막장 가족극은 빈곤한 내러티브와 극단적인 폭력이 기이하게 엉켜있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통속적인 가족 멜로 드라마가 끊임없이 필리핀 사회의 실상을 소환한다는 데에 있다. 권위적이며 독단적인 돈나 피나는 중세 시대 영주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의 장남 로렌조는 지역의 범죄 조직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 마을은 돈과 권력, 폭력과 범죄가 뒤얽힌 거대한 복마전과도 같다. '카인과 아벨'에서 리노 브로카는 필리핀 사회에 스며든 증오와 폭력의 그림자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대표작인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Manila in the Claws of Light, 1975)'는 이 감독의 관심사를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는 흑백의 화면 속 중국인 거리를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거리의 한 구석에서 노숙자 같은 행색의 청년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다. 화면은 이제 컬러로 변한다. 그는 중국어 간판이 걸린 2층 건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화면은 곧바로 거친 건설 현장으로 바뀐다. 청년의 이름은 훌리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훌리오는 이제 막노동을 하려고 한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배고픔으로 쓰러진다. 훌리오는 동료들의 도움과 배려로 조금씩 도시 생활에 안착한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일터가 사기와 협잡, 죽음의 위험이 도사린 곳임을 알아차린다.

  포악한 공사장의 십장(什長)은 인부들을 혹사시킨다. 그는 훌리오를 비롯한 다른 인부들의 돈을 착복하는 파렴치한 인간이다. 훌리오가 받는 임금은 겨우 하루 끼니를 때우고 조금 남는 돈이다. 그렇게 힘겹게 번 돈을 동료 인부들은 창녀들에게 써버리기도 한다. 더러는 공사장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리노 브로카는 착취적 자본주의가 어떻게 노동자를 빈곤의 악순환 속에 가두는지 고발한다. 훌리오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아통의 집을 방문할 때, 카메라는 마닐라 빈민가의 처절한 실상을 포착한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에서 여자들은 악다구니를 쓰며 싸운다. 쓰레기와 오물은 곳곳에 널려있다. 창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은 오후 늦게 나가서 아침에 돌아온다.

  부조리가 만연한 고층 빌딩의 건설현장과 최하층의 열악한 주거지. 그 다음으로 브로카가 보여주는 곳은 도시의 홍등가이다. 일을 못한다고 해고당한 훌리오는 게이 클럽에까지 흘러들어간다. 훌리오는 밤의 도시를 비추는 네온 불빛 속에 은밀히 성을 사고 파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마닐라로 떠나 소식이 끊긴 그의 여자 친구도 어쩌면 그런 곳에 있을지 모른다고 훌리오는 생각한다. 그가 고향 마을의 리가야를 유인해 데려간 크루즈 부인을 발견한 곳이 바로 중국인 거리이다. 그곳에서 훌리오는 하염없이 리가야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리가야를 찾는 훌리오의 필사적인 여정은 거대 도시 마닐라의 숨겨진 이면을 드러낸다. 훌리오는 임금을 부당하게 떼이고, 사기꾼에게 돈을 빼앗기는 일을 당한다. 그는 인간적으로 의지했던 아통이 공사장 십장과 맞서다 결국 감옥에서 비명횡사했음을 알게 된다. 아통의 착한 여동생은 창녀가 되었다. 순박한 어촌 총각 훌리오에게 이 도시의 모든 것은 썩은 내가 나며 견디기 힘든 역겨움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마음은 점차 거칠어진다. 훌리오의 내면에 응축된 분노는 여자 친구 리가야의 비극적 죽음에 마침내 폭발한다.

  리노 브로카는 마닐라에서 결국 살인자가 되어버린 어촌 총각 훌리오를 통해 마르코스 시대의 필리핀을 고발한다. 추악한 사업가는 노동자를 착취하며, 권력은 그러한 자본과 긴밀히 결탁한다. 아통의 비극적 죽음은 그것을 입증한다. 부패한 사회 구조는 리가야 같은 순박한 시골 처녀가 성 착취 산업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방치한다.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는 결국 리노 브로카의 치열한 현실 탐구의 산물이며, 영화를 통한 사회적 발언인 셈이다.

  이 영화의 사회참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결함도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 중국인은 탐욕스럽고 착취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들이 사는 거리는 비리와 범죄의 온상처럼 비춰진다. 이는 중국인에 대한 일방적 편견과 혐오를 부추길 수 있다. 그럼에도 리노 브로카의 카메라는 직설적이다.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었던 그가 영화 속에서 동성 매춘을 묘사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이 감독은 거침없는 투지와 솔직함을 지녔다.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에서 그는 거대 도시 마닐라의 저류를 탐색하며, 동시대 고통받는 하층민의 삶을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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