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층 아파트의 이사에 거대 사다리차가 사용되지만, 아주 예전에는 아파트 옥상의 곤돌라(gondola)가 쓰였다. 거기에 이삿짐을 싣고 몇 번을 오르내리면 이사가 끝났다. 이토 치쇼(伊藤智生) 감독의 영화 '곤돌라(Gondola, 1987)'에서 남자 주인공은 곤돌라에 타서 빌딩의 외벽을 청소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아찔한 부감 쇼트로 청소부 료가 곤돌라에서 고층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면이다. 뜨거운 여름 날, 고공에서 빌딩 창문을 닦아내고 있는 료는 창문 너머 사무실 풍경을 들여다 보게 된다. 잘 정돈된 사무실에서 직원들은 저마다 바삐 일하고 있다. 부러움인지 자괴감인지 모를 감정을 느낀 료는 곤돌라에서 발밑의 도시 풍경을 응시한다. 료의 눈에 비친 마천루의 협곡에는 푸른 바닷물이 일렁인다.

  도시의 최하층 노동자로서 료는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 고급 레스토랑의 외벽 창문을 청소할 때, 료를 보게 된 외국인 손님은 웨이터를 불러 항의한다. 료는 그의 눈앞에서 당장 치워져야 할 물건과 같은 존재가 된다. 웨이터는 블라인드를 내리는 것으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한다. 료가 청소하는 고층 빌딩과 고급 주거지와는 달리, 그의 단칸 자취방은 누추하기 짝이 없다. 료가 고향에서 보내온 택배 상자를 열어 어머니의 음식을 맛볼 때, 화면은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뀐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된 료의 과거는 바닷가 어촌 마을의 청년이다. 그렇다. 료가 빌딩숲에서 바다를 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홀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 알콜 중독자 아버지, 가난한 살림. 료는 그곳을 떠나 도시의 빌딩 청소부가 되었다.

  삶이 외롭고 힘든 것으로 치자면,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소녀 카가리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는 불화로 헤어졌고, 함께 살고 있는 엄마는 카가리에게 무관심하다. 카가리의 집 곳곳은 블라인드가 설치되어 있다. 엄마는 자신의 침실에서 보이는 카가리의 방을 블라인드로 가려버린다. 이 아이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는 대상은 흰색 카나리아 새 치토. 그런데 이 새가 다친다. 피범벅이 된 새를 손에 들고 서있던 카가리를 마침 창문 청소를 하고 있던 료가 보게 된다. 새의 치료를 도운 료에게 카가리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얼핏 보기에 '곤돌라'는 영화과 졸업생이 만든 졸업작품 같다는 인상을 준다. 가난하고 외로운 청년과 상처받은 소녀. 둘의 우정은 료의 고향 마을 여행으로 더 깊어지고 풍부해진다. 카가리가 치토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하자, 료는 관까지 만들어서 정성스럽게 새의 장례식까지 치뤄준다. 도무지 현실이라면 있을 법하지 않은 동화같은 이야기. 약간은 어설퍼 보이는 이 영화를 반짝거리게 만드는 것은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빼어난 풍광과 서정성이다. 감독 이토 치쇼의 이 첫 영화에는 열정과 순수함이 존재한다.

  빚까지 내서 어렵게 영화를 찍었지만, '곤돌라'는 일본 국내에서 개봉관조차 잡기 어려웠다. 정작 영화가 호평을 받은 곳은 해외였다. '곤돌라'는 해외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어 관심을 받았다. 이토 치쇼는 1987년 요코하마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감독은 더이상 독립 예술 영화를 찍지 않았다. 반전(反轉)의 삶. 이 감독의 영화 여정에서 '곤돌라'는 분명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었다. 그는 '곤돌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AV(Adult Video)를 찍다가 아예 그 길로 들어섰다. 이름도 바꾸어 버렸다. 본명을 버리고 'TOHJIRO'라는 이름으로 무려 1000여 편에 이르는 AV를 찍었다. 이토 치쇼, 아니 토지로는 일본 성인 영화업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영화에 대한 초심을 버린 변절자인가? '곤돌라'에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이 감독의 관심이 분명히 드러나 있기는 하다. 엄마가 죽은 새를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가리는 샤워중인 엄마에게 분을 터뜨린다. 벌거벗은 엄마는 딸을 거칠게 밀쳐낸다. 그 장면 말고도 영화에는 목욕 장면이 또 있다. 나중에 카가리가 료의 고향 마을에 갔을 때, 료의 모친은 카가리와 함께 목욕을 한다. 이 장면에서 보이는 늙은 여성의 나신은 삶의 고통을 견뎌낸 몸이다. 료의 모친은 카가리가 엄마에게 상처받은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도록 만든다. 그렇게 료의 모친의 몸은 카가리 엄마의 젊은 육신과 대비된다.

  '곤돌라'의 원판 네거티브 필름이 손상되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토 치쇼는 자기 돈으로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했다. 그렇게 복원한 영화로 2017년, 무려 30년만에 영화를 재개봉한다. 새로운 세대의 관객들 반응이 좋아서였을까? 그가 '곤돌라'를 잇는 두 번째 영화를 찍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출처 ja.wikipedia.org). 자신의 영화 인생 대부분을 AV에 헌신한 이 노년의 감독이 어떤 영화를 내놓을지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어떤 면에서 영화 '곤돌라'는 이토 치쇼에게 평생을 두고 넘어야할 산 같은 작품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른 살 청년 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 세상을 향한 순수의 외침, 그 모든 것이 '곤돌라'에 봉인되어 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세월의 힘을 견뎌낸 영화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ameblo.jp
영화 도입부의 부감 쇼트. 료가 작업하는 곤돌라가 보인다



당시 신인배우였던 료 역의 Kai Kenta와 카가리 역의 Uemura Keiko는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 두 배우의 연기 작업은 이 작품 이후로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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