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薄福)하다. 복이 없거나 팔자가 사나움을 일컫는 말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엄마(Mother, 1952)'를 보고 있노라면, 주인공인 엄마의 삶에 저절로 그 말이 떠오른다. 패전 직후의 일본, 세 아이의 엄마 마사코는 장남을 병으로 잃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도 세상을 뜬다. 이 엄마는 이제 18살이 된 큰딸 토시코와 어린 딸 히사코, 그리고 여동생의 아들 테츠를 보살펴야 한다. 모두가 어렵고 가난한 시절, 가족은 집 한 켠을 개조해서 세탁소를 꾸려가고 있다. 하지만 일을 도와주는 남편의 친구 키무라도 언제까지 있을 형편이 아니다. 엄마는 입이라도 덜기 위해 작은딸을 큰숙부 내외에게 보내려는 참이다.

  분명 전쟁은 끝났다. 그럼에도 이 영화 곳곳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전쟁 이전에 남편 로사쿠가 운영하던 세탁소는 아주 잘되었고, 그것으로 가족은 안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는 동안 가족의 삶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취직했던 아들은 열악한 노동 여건 속에서 병을 얻는다. 남편은 어떻게든 세탁소를 다시 열어보려고 애쓰다가 과로로 쓰러진다. 엄마의 여동생 노리코는 만주에서 남편을 잃었다. 세탁소 일을 돕는 키무라는 전쟁 포로로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어렵게 생환했다.

  남편의 장례식에 모인 마을 여자들은 전쟁통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이야기를 한다. 마사코가 작은딸을 맡기려는 큰숙부 내외는 징병으로 끌려나간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큰숙모는 아들의 사진을 놓고 거미를 실에 묶어 길게 내려뜨려 본다. 거미가 움직이자 아들이 살아있는 것이라며 내심 희망을 가져본다. 군부와 지배 계급의 침략적 제국주의에 일본 국민의 삶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영화 '엄마'의 주인공 마사코는 그 전쟁의 여파를 자신의 삶에서 견뎌내는 중이다. 마사코는 아픈 남편을 병원에 데려가고 싶지만, 그러려면 집안 살림을 다 팔아야할 지경이다. 그걸 아는 남편은 한사코 병원에 가기를 거부한다. 남편과 아들의 죽음, 그리고 작은 딸과의 이별. 그 모든 것은 전쟁이 가져다준 가난과 이어져 있다.

  나루세 미키오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 가족의 삶을 마냥 신산스럽게 그려내지 않는다. 영화 '엄마'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큰딸 토키코는 마을 빵집 청년 에이지와 풋풋한 사랑을 시작한다. 세탁소를 찾는 진상 손님들과의 일화, 토키코가 마을 축제의 노래 경연에 참여하는 장면, 가족이 놀이공원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은 전후 일본 민중의 삶을 엿볼 수 있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 온기의 중심축에는 엄마 역을 연기한 타나카 키누요(田中絹代)가 있다. 생의 대부분을 독신으로 지냈던 이 배우는 자신의 삶에서 '엄마'였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타나카 키누요가 보여주는 연기는 놀라움을 자아낸다. 슬픔과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며,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애를 쓰는 모성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적신다.

  영화 '엄마'에는 큰딸 토키코의 내레이션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시점은 전지적인 관찰자의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의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오직 관객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마사코는 가족이 평화롭게 지냈던 시절의 추억을 병석에 누운 남편과 공유한다. 토키코는 엄마의 재혼 소문에 대한 근심을 에이지에게 토로한다. 큰숙부네로 온 히사코는 자신이 그린 엄마의 초상화를 벽에다 차마 붙이지 못하고 책상 서랍에 조용히 넣는다. 아이는 그렇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감춘다.

  영화의 마지막, 키무라상이 떠나고 세탁소일을 돕기 위해 16살 소년이 집에 들어온다. 늦은 저녁, 소년은 고향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려다 잠이 들었다. 마사코는 '어머님(おかあさん)께'라는 글씨를 보며 소년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낸다. 이 엄마는 여동생이 곧 데려갈 장난꾸러기 조카의 장난을 기꺼이 받아준다. 주변의 모든 것을 보살피며 어려움을 감내하는 어머니의 삶. 토키코는 그런 엄마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묻는다. '엄마는 정말로 행복한가요?' 나루세 미키오는 어둠이 내려앉은 집 앞의 풍경과 함께 영화를 닫는다. 영화 '엄마'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는 한 여자, 아내, 어머니의 가슴 저린 초상을 그려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큰딸 토키코 역을 연기한 카가와 쿄코(香川京子)는 전후 일본 영화계를 풍미한 여배우였다. 이 영화에서 카가와 쿄코의 데뷔 초기 앳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 리뷰. 타나카 키누요는 이 영화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flowing-19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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